라다크, 황량한 땅이지만 마음의 안정과 정신적 휴식을 줄 것 같은 곳!
영화 <세 얼간이>의 마지막 장면에 판공초 호수의 아름다움이 그려지는 곳!
라다크를 처음 알게 된 책.
풍요의 역습! 대량생산, 산업형 농업과 축산업이 지속가능한 사회의 해결책은 아니다.
[본문발췌]
진보에 대한 두 가지 방식
1) 발전, 혁신을 외치며 기술과 자본, 에너지 집약적 경제 개발을 추구한다. (세계화, 전문화, 중앙집중식 경제)
--> 화폐경제, 도시,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은 자원에 기반을 둔 인플레이션 경제
2) 하지만 더욱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문화와 생태계 다양성이 필요하다. (탈중심화의 지역경제체제)
--> 생태 친화적이고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생활 방식
라다크생태개발그룹LEDeG, www.ledeg.org/
에너지, 농업, 건강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기술적 대안을 찾아 경제적인 측면은 물론 환경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합리성 추구, 재생 가능하고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
다양성이라는 것이 생태계에 있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강점이 되는 것처럼, 인류의 문화에 있어서도 다채로움과 서로의 다른 점을 수용하려는 태도는평화롭고 풍요롭고 조화로운 발전에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하고 있는 이때 우리를 위협하는 환경재난과 사회붕괴 현상을 막으려면 우리는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된 지구촌을 포기하고 세계화 경제의 대안인 지역중심경제를 가슴으로 안아야 할 것이다.
서구의 문화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야 대신에 보다 전문적이고 즉각적인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전문가에게 높은 의존도를 보인다. 경제개발과 자본의 힘은 사상 유례 없는 전문화와 집중화와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인 생활방식쪽으로 이 세계를 몰고 간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ISEC (www.isec.org.uk), '대규모 위의 소규모', 글로벌 경제의 소비지향적 획일 문화에 맞선 전 세계의 지역 공동체를 지원하며 지역의 고유 문화에 기반을 둔 대안 모색.
ISEC 중점 사안
1) 인습적 개발 계획과 글로벌 경제의 심리적 정신적 환경적 측면의 비용
2) 소규모 농경인과 소비자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는 식량 수급 및 농경 시스템
3) 문화와 생물학적 다양성, 자연치화적 사회의 수익성
4)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경제체제 확립과 공동체 활성화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선 두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못한다. 여성은 지혜의 상징이고 남성은 자비심의 상징이다. 그 둘이 함께함으로써 불교의 근본이 형성된다.
- 어느 라다크 승려의 말
불교에서 깨달음의 방법에 있어 그 근간이 되는 것은 자비심이다. 티베트의 성자이자 시인인 밀라레파는 자비는 '공'의 개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존재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와 '나'는 완전하게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일체가 된다.
우주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것의 전체성과 단일성은 변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모든 존재는 움직임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
자아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은 아마도 깨달음에 이르는 데 있어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분리된 자아와 분리된 사물에 대한 관념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찾던 것을 얻는 순간 그 빛은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라다크 사람들의 시각은 비영원성에 대한 직관적 이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집착을 버리는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대신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축복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생활의 많은 부분을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색칠을 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집착을 버린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상에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차이는 넓고도 포괄적인 자아의식을 지니고 두려움과 자기보호의 경계선 뒤로 움츠러들지 않아야 한다.
라다크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 사이의 유대관계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내면의 평화로움과 기쁨이 넘치는 삶의 태도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건강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무지함' 속에 머물고 있는 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종교의 가르침이었다.
만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에 있어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그것과 함께 여유롭게 흘러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전통경제체제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서로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체제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더욱 더 벌어지게 되어 더 이상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일 정도다. 지역 내의 상호관계는 붕괴되고 있으며 전통사회에서와 같은 절제심이나 협동심 역시 마찬가지다.
개발,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강요된 서구의 표준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외 현상은 적개심과 분노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 사태와 근본주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전통적 세계관은 변화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변화라는 것은 자비심 혹은 관용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며 세상의 모든 현상 사이의 유대관계를 전제로 한다.
예전의 문화는 자연환경의 한계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를 갖는 동시에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적 체계 속의 관계들은 서로서로를 보강해주었고 조화와 안정감을 더 향상시켰다.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자기 집 정원에서 기른 감자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다음 가루로 만들고 얼리고 말린 밝은 색깔의 감자과자를 사먹는 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더 좋다고 한다. 이런 식의 소비과정은 더 많은 운송량과 더 많은 화석연료와 더 많은 공해물질과 더 많은 화학첨가물과 방부제가 소요된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GNP 상승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경제성장의 차원에서 권장되고 있다.
산업형 농경은 지역마다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던 농작물의 다양한 종자들을 없애버리고 표준화된 종자를 사용한다. 다국적 기업과 대규모 석유화학 기업들은 제3세계로부터 곡물의 종자들을 탈취하고 수천 년간 지역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것들의 유전정보를 이용하여 합성종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그 합성종자를 화학 성분의 비료나 농약과 함께 제3세계 농부들에게 되판다. 그런 합성 종자들은 자체적인 재생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에 농부들은 대기업들로부터 종자와 화학 물질들을 계속해서 구입해야 하는 순환적 종속구조에 갇혀버리게 된다.
자연이 산업화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형될 수 있게 됨으로써 표준화와 획일화라는 결과가 나타났고 취약성은 더 증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인류의 복지문제가 아니라 상업적 이익있었다.
이런 활동은 생명의 다양성을 침식하는 한편 생물학적 상호보완성의 연결고리를 끊고 있다.
통합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상징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총체적인 조화 그리고 함께 하자라는 그것의 이상은 모든 종교계와 사상계로부터 환영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주의의 가장 높은 목표를 반영한다. '하나의 시장'은 공동체와 협력을 의미하고 '지구촌' 이라는 말에서는 관용 그리고 상호교류라는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어디에도 경제의 통합과 기술의 획일화로 인해 환경파괴와 공동체의 해체가 나타난다는 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의 경제상황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대신 사람들을 점점 더 분열시키는 한편 빈부의 격차 역시 더욱 벌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그 막강한 정치경제권력의 중앙집중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자본 및 에너지 집약형의 경제개발은 자급형 사회구조를 저해할 뿐이다.
사람들의 자긍심과 자급구조를 더욱 장려함으로써 생명체 유지의 다양성을 지키는 한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속적 개발을 창출해야 한다.
소비지향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의 확산이 중단되지 않는 한 빈곤과 사회분열과 생태계 붕괴를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 기술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것과 함께 지역 자원과 지식, 기술의 최대한 활용을 장려함으로써 생태와 문화적 다양성 유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출발점이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이라면 그 필연적 결과물은 다양성의 복원이라 할 수 있다.
지역경제체제의 부활을 지원함으로써 우리는 문화와 생태의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부탄의 국왕은 한 사회의 복지를 가늠하는 지표는 'GNP'가 아니라 'GNH'라고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에 대해 정신적, 사회적 빈곤과 심리적 불안감 그리고 문화적 활성화의 상실이라는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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