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정치체계와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편익을 제공하며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의 노예로 만든다.

 

 

[본문발췌]

 

 

내가 사랑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없는 끌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우행(愚行)이 사랑' 이라면 결혼은 '장기간에 걸친 우행' 이라는 니체의 말을 나는 결혼 전부터 언제나 숭상했다.

 

 

서울은 이른바 문화의 드높은 '중심'이고 소비자본의 아름다운 '첨단'이나, 동시에 갈 길 모르는 망명자들의 감미로운 '피난처'이기도 했다. 나도 한때 그 분위기에 끼이고자 나의 고절한 시간들을 견딘 적이 있었다. 갈 길 모르던 망명자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 우리는 배우고 늙었을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잠언은 틀린 말이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문제의 잠언은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고 바꿔야 마땅했다.

 

 

어머니는 일종의 자본가였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자매의 몸종이나 청지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금이 나왔고 은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또 은이 나왔다. 그녀와 언니들이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어머니가 분배해주는 달콤한 과실에 철저히 굴종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분배해줄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어머니에게마저 그런 존경과 신뢰를 바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 신만, 쓴맛, 짠맛. 단것, 신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져. 뿐인가. 염도가 적당할 때 거둔 소금은 부드러운 짠맛이 나지만 32도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이 달라.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야. 사람들은 닷맛에서 일반적으로 위로와 사랑을 느껴. 가볍지. 그에 비해 신맛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짠맛은 뭐라고 할까, 옹골찬 균형이 떠올라.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쓴맛은 그럼 뭐냐. 쓴맛은, 어둠이라 할 수 있겠지...."

 

 

"염전의 바닥을 까뒤집어 고르게 하면 증발이 잘되니까 생산량이 물론 높아지지.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세. 내가 지금 판을 까뒤집는 건 단지 생산량 때문이 아닐세. 갯벌 아래, 그러니까 저기 눌린 어둠속에 미생물이 더 많아서 까뒤집는 거야. 그것들이 많이 포함돼야 모든 맛이 균형 있게 녹아들어 하나로 합쳐지니까. 나는 짜기만 한 소금은 싫어. 이제 세계인의 지상명령어가 돼 자네 같은 시인도 무심코 내게 들이대는 말, 그 생산량이란 말만 해도 그렇잖아. 예컨대 공업적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염은 염화나트륨 성분이 거의 전부야. 거기엔 오로지 짠맛밖에 없어요. 생산량이란 말도 바로 그렇지. 다른 게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이거든. 생산량의 증가를 가로막는 다른 것은 모두 불순물이라고 불러. 단연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생산량이란 관점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해로울 뿐이지. 젊은 사람이 애할지는 모르겠지만,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

 

 

모든 문제는 잉여 재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잉여는 소비를 부르고, 소비는 더 큰 욕망과 더 큰 잉여를 부르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이걸로 돈을 벌어 많이 모아야 한다면 상관이 있겠지만,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거야 그래도 충분하니까 된 거지. 생산성이란 말, 나는 증오하네. 잉여 재산을 쌓으려고 생산성 타령을 하는 것이겠지. 지구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낱말이 바로 그거야, 생산성! 재물 쌓아서 뭐하겠나. 애들 물려주려고? 핏줄 배불리려고?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저 혼자서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기르면 되는 거지. 난 우리 애들, 생산성의 노예로 살게 할 마음 없어. 포악한 말이야." 생산성의 폭압적인 가치를 버리는 대신 자연주의적 정성의 집결체로서 사람을 살리는 소금이 토판염이라 했다. 좋은 소금은 만물을 살린다고 그는 말했다.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 회사의 매출이 10으로 늘어나면 '단맛'에 길들여진 가족들의 소비 욕구는 어느새 100이 되었다.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가, 그에게 10을 주고 뒷구멍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100의 욕구를 갖도록 끊임없이 획책했다는 것을, 그는 가출하기 전엔 몰랐다. 그가 죽어라 빨대를 꽂아 빤 10의 꿀은 빚까지 보태 가족들에게 100으로 빨렸고, 그 100은 다시 고스란히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 안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아주 효율적인 구조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연봉이 올라도 계속 방어 불능 상태에 남게 되는 잔인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구조 안에 들면 부모 자식, 부부 관계되 안전하게 영위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자식들은 커가면서 아비의 말보다 저들에게 더 다급하게 영향받는 욕마의 '괴물'로 시시각각 변해갔다. 가족끼리 둘러앉아서도 더, 더, 더라고 말하면서 소비의 단맛을 쫓아가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얼마든 널려 있었다. 동료에게든 친구에게든, 비인간적인 빨대를 꽂아 욕망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들도 다 그 범위 안에 있었다.

 

 

흐르고 머무는 것이 자연이려니와, 흐르고 머무는 것이 곧 사람이었다.

 

 

"누구나 가슴속엔 시인이 살고 있네

 시인의 친구가 살고 있네

 바람이 메말라 사막이 되더라도

 눈물이 메말라 소금밭이 되더라도

 눈빛은 서글서글 속눈썹은 반짝반짝

 나의 친구 시인은 어린 나무처럼 잠들지

 누구나 가슴속엔 시인이 살고 있네

 시인의 친구가 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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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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