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삶의 연료이자 위험 요소다.
[본문발췌]
"몬테로씨, 사람들은 자신이 외롭길 원하지요. 신성함에 다다르기 위해 고독이 필요하다면서 말이지요. 고독 속에 있을 때 유혹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에요."
[나 자신을 읽고 쓰기에 관하여] -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
'독창성'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탄생을 새로운, 언제나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보고자 하는 근대의 병이다. 또한 근대성이란 오직 죽음에게만 말을 건네는, 유행하는 허상이다.
이 세상에 아비 없는 책, 고아인 책이 있는가? 어떤 책의 후손이 아닌 책이? 인류의 문학적 상상력이 이룬 거대한 가계도에서 벗어난 단 한 페이지라도 있는가? 전통이 없는 창조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거꾸로 말해 재생, 새로운 창조, 즉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도 새로 돋는 푸른 잎사귀 없이 전통이 생존할 수 있겠는가?
위안과 욕망을 다룰줄 아는 이들 다섯 명은, 오늘날 내가 보기에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서류>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미스 볼드로인 셈인데, 미스 볼드론느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잔인하게 미친 미스 하비샴의 환생이고, 미스 하비샴은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에서 질투의 힘으로 카드에서 이기는 비법을 간직하는 옛 백작 부인의 영국인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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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유사한 구조는 그들이 모두 하나의 신화적 가족이라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이 구조들에는 일률적으로 노파, 젊은 여성, 그리고 젊은 남자라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푸시킨 작품에서 노파는 안나 페도로브나 백작 부인이고 젊은 여성은 그녀의 피보호자인 리사베타 이바노브나, 젊은 남자는 설비 회사 사원인 헤르만이다. 디킨스 작품에서 노파는 미스 하비샴, 소녀는 스텔라, 남자 주인공은 핍이다. 헨리 제임스 작품에서 노파는 미스 줄리아나 볼드로, 젊은 여성은 조카인 미스 티나, 끼어드는 젊은 남자는 이름 없는 해설자 H. J., 즉 "헨리 제임스"로 마이클 레드그레이브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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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작품에서 끼어든 젊은이는 노파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데, 푸시킨에서는 행운의 비밀, 디킨스에서는 사랑의 비밀, 제임스에서는 시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소녀는 순수하든 그렇지 않든 노파가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기 전에 그것을 알아내야 하는 속이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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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수엘로 부인, 아우라, 펠리페 몬테로는 이 저명한 모임에 가담했지만 '비틀어짐'이 있다. 아우라와 콘수엘로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펠리페의 가슴에서 욕망의 비밀을 찢어 내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남자는 이제 속아 넘어간다. 이것 자체가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비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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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대가로 화형에 쳐해진다 할지라도, 세 여성들 모두 근대 이성이 금지한 지식의 비밀, 저주받은 문서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양초 기름으로 얼룩진 편지들, 탐욕과 공포의 손길에 버림받은 카드뿐만이 아니라, 미래보다 더 위대한 힘으로, 역사학자 미슐레가 말하듯 자신을 투사하는 유물의 비밀을 지켰던 중세 마녀의 후예가 아닐까?
우리는 원래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바꾸려는 욕구가 있고, 그 어떤 욕망도 순수하지 않다.
[작품해설]
푸엔테스는 현실 세계를 낱낱이 분석하고 세밀하게 관찰하는 발자크의 태도와, 문학이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는 세르반테스의 테제를 아우른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과거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과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푸엔테스는 역사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유토피아적 역사관을 견지하는데, 역사란 일어난 일을 재구성한 사실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으면 좋았을 상상의 역사도 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합의 매개자인 아우라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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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엘로가 만든 환영이자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이다. ...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젊음과 재생의 욕망이 빚어낸 인물이다. 아우라와 콘수엘로는 부분과 전체라는 환유적 관계이다. 아우라(aura)라는 이름은 성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원환이자, 비교적 전통에서 마녀들이 요술을 부리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아우라는 콘수엘로가 만든 강력한 흑마술의 결과이자 욕망의 투영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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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우라는 독일의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에세이에서 예술 작품이 지니는 범접할 수 없고 일회적인 신비한 분위기라는 의미로 정의한 용어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것의 일회성을 드러낸다. 예술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예술가에게 생명이 깃든 신비로운 본질을 전한다. 자연은 스스로 생동하는 범신론적인 신비로움이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먼 곳'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종교적 기능이다. 숭배의 대상인 신에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되듯 예술 작품도 역시 그렇다. 마치 종교적 숭배의 대상처럼 예술 작품은 '아우라'를 갖는다. 즉 아우라는 "멀리 떨어진 것이 일회적으로 드러남."이라는 의미이다. 발터 벤야민은 산업사회가 되어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본다. 푸엔테스는 이러한 아우라의 의미를 육화시킨다. 파도가 출렁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로 묘사되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펠리페는 일회적이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단 한 번 눈을 마주친 것으로 펠리페에게 치명적인 매혹을 선사한다. 그녀는 그 이후 팜 파탈처럼 펠리페의 방문을 열고 나신으로 살며시 그를 유혹한다. 그리고 펠리페는 그녀는 영원히 염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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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젊음의 재현과 사랑의 재현, 이것은 예술가에게 창작이 그렇듯 콘수엘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것이 피어오르는 비눗방울과도 같은 단 한 번의 에피파니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 여운, 그 아우라는 영원히 남기에 그녀는 자신을 기꺼이 소진하고 만다. '위안'이라는 뜻의 '콘수엘로'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와 즐거움은, 바로 일회적이지만 너무도 눈부신 아우라의 재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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