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된 인간으로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인생을 욕하지 않으려면, 자기 삶을 살아라.
[본문발췌]
우리 인생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실로 악랄한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에는 반드시 본능적인 기쁨이 따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명의 발달이 일의 가치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말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을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과거 인간은 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비록 수명은 짧고 위험이 가득한 환경에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의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이는 비관적인 인생관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인류의 모든 고뇌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원래 산다는 것은 훨씬 즐겁고 사는 의미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즉 철학 따위가 생겨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인간은 좋고 말고 없이, 이 참을 수 없는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 재미없는 일에 구속되어 잿빛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즉 높은 연봉에 안정적이고 남에게도 좋아 보이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배운 것에 불과하니, 충분히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고용주가, 단순히 사회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데 목적이 있는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를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과 상여금과 퇴직금을 빌미로 지시에 따르기만 해야 하는 인형 취급을 당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처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직장을 떠날 때에는 이미 기력도 체력도 다 바닥나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는 함정에 내던져진다.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포기한 인간은, 저항의 정신을 내던진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스스로 포기한 어리석고 우매한 자에 불과하다.
이치가 그러한데, 아직 청춘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이미 죽어 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허황된 이미지나 좇게 하는 인터넷 세계를 전부라 여기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으로 뻥 뚫인 마음을 메우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기이한 나날들.
이성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다.
나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는 갖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본능이나 감정이 자신의 핵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의지를 조절하는 사고력을 우선하는 삶, 즉 이성에 따른 선택에 그 대답이 존재한다.
이성의 길을 걷는 순간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다. 자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더불어 인간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
이성을 꺼리고 감정을 우선시하며 본능에 따르는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느 옛말이 있듯이, 인간관계가 어긋나 남들이 멀리하는 탓에 점점 더 고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만 개성과 자립과 정체성을 부르짖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것을 추구하고 분명하게 확립해서 새로운 삶을 열어가려 한다면, 진정한 자아를 증명해 주는 이성과 함께 독립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이 넓은 세상에 다양한 직종이 있는데,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위치를 왜 그렇게 간단히 손쉽게 선택하는 것인가.
그 주된 이유가 일이 편하고 수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라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럴 수 있지만,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침체기에서 후퇴기로 뒷걸음질하고 있는 지금, 그것은 오래전에 신화가 된 이미 통용되지 않는 낙관이다.
어쩌다 그런 직장이 몇 군데 남아 있다고 해도,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어떤 나날을 보낼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인생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가. 비록 캄캄하지만 미래는 온갖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인생을 헤쳐 나가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참맛도 숨기고 있다. 이런 미래를 안정이라는 따분한 이름에 매달려 허비하려는가.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조금도 개척하지 않고 끝내는 생애에 어떤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돈은 그 일로 벌고, 취미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도 많다. 하지만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고 기분 전환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 중용적인 선택은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현명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애당초 일이냐 취미냐 하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생활의 기반인 일 자체가 재미있고 거기에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살고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타인이 주는 월급을 대신해 하는 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라는 것이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목적은 고용인을 만족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충족에 있다. 공무원의 세계에서도 그 점은 다르지 않다. 상사는 부하를 출세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직장이란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수입이야 많든 적든, 소박하나마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평생을 매진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면 자영업밖에 없다. 요컨대 이 세상에 직장이이라는 직업은 없다 치고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은 사육장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직장에 구속되어 있는 시간이 고작 하루의 삼분의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8시간을 위해 8시간의 수면이 필요하고 나머지 8시간에 출퇴근과 야근, 접대, 사교 등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이 없는 셈이다. 식사와 목욕, 때로는 독서까지도 직장을 위한 시간이 되고 만다. 쉬는 날 역시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푸는 데 다 쓰는 꼴이다 보니 이 또한 직장을 위한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퇴직하는 날까지 몇십 년을 고스란히 직장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야 타인을 위한 인생이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본인을 위한 인생이랄 수 없다.
설사 안정된 생활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런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내일 또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그런데 출발선에 선 시점에 그 중요한 조건을 팽개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선명하게 비치는 것은, 젊음이라고는 한 톨도 지니지 않은, 회의에 절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에 칭칭 휘감겨 있는, 온갖 결점을 드려낸 채 신빙성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예의 처지에 깊이 길든 '가축 인간'이다.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노예의 처지를 선택하다니,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업신여김을 당할 뿐인 비참함 신분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
그럼에도 일개 독립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학생 시절에 넘쳐흘렀던 자부심과 자존심은 다 어떻게 한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것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인가.
타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얼치기인가.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동물원의 동물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즉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게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생기 발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자유를 거머쥔 인간은 놀라우리만큼 적다. 많은 사람이 그 보물을 상실했으면서도 보통 다들 그렇다고 여기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복잡한 탓에 거짓이 많은 사회라는 조직, 거기서 생겨난 문명과 지위와 재산의 격차로 인해 생물로서 누려야 마땅한 '멋대로사는' 지상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끝내는 편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이야말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허황된 희망조차 실현되지 않고, 실제로는 조촐한 휴식의 장을 확보하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실망하면서 행복이 멀어짐을 절감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강한 자를 우러르며 우습기 짝이 없는 영웅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예정하고 계획한 대로 인생을 순조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밝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는 노예의 처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목을 조여 온다.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썩게 하고, 생기를 빼앗아간다. 그러다 끝내는 혼에도 녹이 슬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자신에게도 반발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무기물로 기울어 간다.
그러다 자신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시점에 정년의 날을 맞는다. 송별회의 애처로운 여운과 여생을 헤쳐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퇴직금과 허접한 꽃다발을 안고 직장 밖으로 쫓겨났을 때, 내일부터 할 일이 없는 공허함을 자유로 착각하고, 책임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편안함을 자유로 잘 못 알고,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이야말로 오랜 세월 바라 왔던 심경이 틀림없다고 믿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을 자축하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기껏해야 반 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취미 생활을 해 보지만 어느 것이나 허망하고, 하는 일이 없다는 처지가 몹시 비참하게 느껴지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 낙인찍힌 듯한 소외감에 시달린다. 그렇게 반가웠던 자유가 오히려 한없는 고독감을 불러오고, 현역 시절의 무용담에 귀 기울여 주는 이도 없어지니 술에 절어 지내게 된다. 날로 깊어지는 주름과 노인병과 죽음의 예감에 떨며 비관론에 짓눌려, 좀 더 달랐을 수도 있는 생애를 속수무책으로 끝낸다.
이들은, 대체로 이런 것이 직장인의 평균적인 삶이라 수긍하고는, 똑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아들을 한순 섞인 눈길로 바라본다. 그 긴 한숨이 끝났을 때, 직장인의 가면을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자신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모기 우는 소리처럼 자그많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을 만들었으면 고생을 덜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일부러 완성도가 떨어지는 생물을 만들어 죄 많은 존재라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자기 책임을 전가하고는, 몸부림치는 그 가엾은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극단적인 사디스트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나설 기회를 늘려 자신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게 하려는 냉혹한 나르시시트인가.
그렇게 천박한 존재가 신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른다. 만약 알고 있다면, 지구는 행성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 간단한 사실 정도는 경전이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또 이 하잘것없는 별 하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이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요컨대 신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사람은 돈과 명예에 약하다. 너무 약하다.
그리고 불안과 공갈에도 약하다. 너무 약하다.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자기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갖지 않으려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야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추종의 길을 택한 자는 인간이기보다 곤충에 가깝다. 설령 국가 체제를 바꿔 본들, 불특정 다수의 인식과 의식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비극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념 때문에 붕괴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현실에 너무 맞추다 보니, 즉 욕망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붕괴하고 있다.
국가를 필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안일하게 믿어서도 안 된다.
국가를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주 평범하지만 욕망으로 가득한 그냥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미는 당근을 거부하고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굴하지 않는 한,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근을 원하고 채찍 소리에 몸을 움츠리는 인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현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국민 대부분은 상대가 강자이면 그게 누가 되었든 추종하는 지조 없는 인종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동료를 배반하고 태도를 뒤집는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 동조하여 같은 부류가 될 것 같다는 조짐이 올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 인생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생각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은 사람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고, 자기를 타자에게 맡기는 꼴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가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나날 속에, 온갖 곳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심히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삶의 공식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도 거의 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 게다가 그 직장에 오래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것을 불변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강박관념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기 단계에 이미 다른 길은 봉쇄되고 만 것이다.
국가는 골 빈 국민을 좋아한다. 다루기 쉽고 제어하기 쉬운 존재!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나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을 불태우고, 생각하기에 존재 의의가 있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이성으로 자신을 계몽하면서 나아간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굳이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 삶의 참된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의존'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마음의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대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너를 키우는 자가 너를 파멸시키리니."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들에게
-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
그 어떤 국가도, 국가란 이름이 붙어 있는 나라는 하나같이, 실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
-
모든 종교는 선이라는 옷을 두른 악이며, 원래 자유로워야 할 개인을 속박하는 컬트이다.
-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이다.
-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치는 것이다.
-
자신의 껍데기를 깨부술 힘은 자신에게만 있다.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화하는 세계질서 - 레이 달리오 (0) | 2022.10.29 |
---|---|
방드르디, 야생의 삶 - 미셀 투르니에 (0) | 2022.10.22 |
여행의 속도 - 리칭즈 (1) | 2022.10.08 |
AI도 모르는 소비자 마음 - 박소윤 지음 (0) | 2022.10.01 |
아우라 - 카를로스 푸엔테스 (0) | 2022.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