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재료와 정성, 그리고 그 음식을 사이에 두고 같이 먹으며 대화하는 사람이다.
[본문발췌]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적 차원에서 좋은 요소,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후대에 길이 남긴 용어, '미덕'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당시의 이상적인 시민을 규정하는 열 두 가지 미덕을 정의했다. 용기, 절제, 관용, 기품, 아량, 적절한 야심, 온화함, 정직, 재치, 친절, 겸손, 의분(義憤)이다. 세월이 흘러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미덕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미덕의 목록을 새로 만든다면 아마 다음과 가까울 것이다. 희망, 장난기, 성숙함, 안도감, 외교술, 냉소, 예민함, 지성, 친절, 인내심, 비관주의, 자기이해, 자기애, 자기주장, 동정심, 감사하는 마음이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음식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삶의 다양한 생각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런 생각들은 미각을 통해 음식을 맛볼 때마다 생생하게 상기되기 마련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인성을 개선하고 향상시려 음식과 의식을 자주 짝지었다. 예를 들어 선불교는 우리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기를 원한다. 이를 강연이나 책으로 설파하는 대신, 함께 차를 우리고 마심으로써 고요와 친절이 자리 잡도록 유도한다.
다도는 선불교의 핵심 의식으로, 가톨릭의 미사만큼이나 중요하다. 물이 끓기를 차분하게 기다리고, 준비한 잔에 찻잎을 살포시 담아 차를 우린다. 다도는 인내심과 온화한 유대감을 장려한다. 잔을 비롯한 다구는 정신이 단순해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소박하게 만든다. 차를 마시는 동안 지키는 침묵은 차를 마시는 순간에 집중하고 속세의 생각을 잠시 멈추어 위안을 주는 타인의 존재감과 다정함을 깨닫도록 만든다. 선불교는 몇몇 핵심적인 인간의 미덕에 좀 더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기념비적 의식을 고안한 것이다.
수많은 계획들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좌초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바닥나면 삶의 지난함에 믿음을 상실하면서 성취를 느끼기도 전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타인이 잠재력을 끌어내고,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 잠재적으로 대립하는 관점을 완만하게 조율하는 역량이 바로 외교술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약간의 냉소가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에 자리하는 어둡고 이기적인 구석을 정확하고도 침착하게 인식하는 능력 말이다. 약간의 냉소는 어느 제도에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며, 사람들의 동기가 항상 순수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타주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선 행위에도 사익 추구라는 동기가 작동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많이 안다고 유능한 선생이나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독자나 청중에게서 호기심을 끌어내고, 그들로 하여금 요점을 이해하게끔 만드는 사람이 선생이나 작가로 성장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리하고 명료하다. 복잡하고 모호한 소재나 사안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정리한다. 지성이라는 개념은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데, 얄궂게도 그 특권은 종종 강자의 편에 붙는다.
우리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상반된 주장을 하며, 동시에 너무 세세하게 구분하려 듦으로써 우리의 지성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또, 사실과 개념을 켜켜이 쌓아 두기만 하고, 다른 이들이 이해 못한 핵심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
감각이 확장되면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덕분에 우리의 감사하는 요령에 부족함이 있음을 깨닫고 좀 더 겸손해지면서, 감사한 일이 더 없는지 궁금해진다. 그 결과 대담하고 거대하며 불온한 생각의 언저리에 도달할 수도 있다.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세상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기분이 나아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타인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크고 진지한 것(돈, 자유, 사랑)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욕적일 정도로 자질구레한 것(건강한 식사, 포옹, 휴식)들 역시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요리를 하려면 일단 전문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음식이 주는 만족감은 기술의 정교함이 아니라 음식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와 우정의 깊이에 비례한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요리와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다. 요리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방법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가장 빼어난 점이 다른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받는 순간은 오히려 우리가 실패하거나 약점이 드러나 일을 망치고 실수할 때이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 모두 언제나 훌륭하지 않으며, 종종 두려움을 느끼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완벽함이 타인을 감탄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위협한다면, 결점은 타인과 교감하고 우정을 쌓을 계기를 마련한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는 열린 마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떤 면도 내게는 낯설지 않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는 이미 자신의 지독한 괴팍함을 깨닫고 있기에 타인의 괴팍함에 놀라지 않는다. 또한 겉모습으로 타인의 내면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실제 모습에 포용적이다.
이상하게도 열린 마음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 주목할 때 생성된다. 우리 내면에는 기이한 상상을 즐기고 사회 규범을 넘나드는 휴식 공간이 자리한다. 가령 절대 실행하지도 않을 지독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이다. 또는 예의범절에 엄격한 사람이라도 정교한 공상을 즐기고,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가치관을 가졌으면서도 돈에 집착한다. 꽤 침착해 보이지만 때로는 분노와 절망에 시달린다. 열린 마음을 지니면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애쓴다. 자신만큼이나 타인 역시 속내가 복잡하다고 가정하며 세계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덕주의는 선행이 보상받는다는, 종교적인 믿음에서 출발한 위력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이런 정의로운 비전을 정확히 충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사에서 누군가 잘못 판단한 사업 확장 계획 탓에 야근을 한다. 우리의 책임도 아니지만 늦게까지 일하고 종내에는 정리해고를 당한다. 선하게 행동한다고 딱히 제대로 보상을 받는 건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자기희생과 약속의 좌절에 진저리를 치는것은 놀랍지 않으며,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그런 일을 겪더라도 약해지지 말고 현실의 부당함에 적절히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전략적으로 무례하고 악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두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초월적 사유 속에선 내 삶만이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평정심을 갖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나'와 '내가 아닌' 대상과의 거리를 줄인다. 언제나 세계의 일부였던 자연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바람, 구름이나 파도와 함께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급은 아무것도 아니고, 소유는 무의미하며, 불평불만은 조바심을 잃는다.
만약 누군가 초월적 사유에 빠진 우리와 마주친다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 그리고 새롭게 엿보이는 너그러움과 이해심에 놀랄 것이다. 초월적 사유는 종종 미치도록 짧다. 늦은 밤이나 해 질 녘에 잠깐, 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나 기차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하지만 어떤 식재료, 특히 라벤더, 카르다몸, 강황과 계피를 통해 우리는 초월적 사유에 좀 더 체계적으로 다가가 고집스러운 자아를 조금은 누그러트릴 수 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인상적일지 몰라도 감정이 메마르고 실제 경험과 단절된 사유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 결과 학술적으로는 논리적이지만 관중을 감동시키거나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는 사상에 집착한다.
과도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삶을 편하게 사는 데 중요한 것들을 상당 부분 잊거나 무시하기 쉽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디자이너는 20세기 중반 바우하우스 철학을 도발적으로 암시해 아름답지만 앉기에는 엄청나게 불편한 의자를 만든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정치인은 이론적으로 훌륭하지만 시민들의 특징과 현실 감정을 반영하지 않는 정책을 입안하여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역사학자는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더라도 좋은 이야기를 알리는 일에 소홀하다.
그렇다고 이성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성에 무엇인가 더하는 방법이 현명하다는 말이다. 기억, 욕망, 맛, 냄새와 본능적인 경험 등을 이성과 엮는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라면 그렇지 않은 면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감각을 활성화하는 데 야외에서의 식사만큼 탁월한 방법이 또 없다.
거의 언제나 창조적 사유의 적은 불안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심오한 생각은 대체로 불안을 내재하고 있다.
정확하게 집어내고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 소중했던 신념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거나 과거의 판단 착오를 되새겨야 할지 모른다. 삶에 중요하고도 어려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찾아올 변화의 그림이 또렷해지기 시작하면, 성장보다 평온을 선호하는 내적 검열관이 이를 알아차린다. 창의력이 발휘되기 전에 중단되는 이유다.
경계심 많은 자아가 동요하면 피로를 느끼고 인터넷이나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사고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혼란에 빠트리고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이는 비록 중요하고 흥미로운 기능이지만, 단기적인 평화를 노골적으로 위협했던 창조적 사유를 향한 진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
창조적으로 사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단순히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다. 숲을 거니는 것도 좋다. 한발짝씩 내디디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우리의 정신 저 너머에서 절반만 형성되어 있었던 독창적인 발상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회를 만나기도 한다. 의도가 없었으므로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수필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천재의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방치된 자신의 생각을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소위 천재들이라고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선입견으로 방해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품고 있지만 대체로 너무 불안하거나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 외면한 길을 찾은 것이다.
종교가 특정한 음식을 조금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식생활과 도덕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연결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종교가 음식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단식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식사를 사랑하고, 또한 식사가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지배하는지 기리는 의식이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음식을 조금씩 덜 먹다 보면 다른 관심사나 걱정이 표면 위로 드러나곤 한다. 다른 이들에게 잘못했던 일에 대한 슬픔이나 고귀한 이상에 대한 헌신, 육체적 욕망과 관심을 자중하고 싶은 소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종교 밖에서도 일정 기간 동안의 단식 혹은 절제된 식생활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느낌에 대응하는 데 꽤나 유용하다. 아주 생생하고도 기본적인 방식으로써, 절제력을 발휘해 육체보다 정신이 우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렇게 고삐 풀린 자아를 다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다. 우리는 삶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극에 충격을 받곤 한다. 후회할 만한 말을 입에 담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으며, 나쁜 습관을 떨쳐 내지도 못한다. 우리는 더 집중력을 발휘해 노력하고, 단호함과 자신감을 갖기를 갈망한다. 그럴 때 음식은 우리가 직접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극을 제공한다.
우리는 완벽하기 위해 너무 많이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 매력적인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실패다.
사람들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는 외적 증거를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생활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커리어 쌓기가 얼마나 고된지, 가족들이 얼마나 불만족스러운지, 늘 걱정을 짊어지고 산다든지 하는 문제는 모두에게 익숙하기에 동질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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