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억.
[본문발췌]
세상은 온통 더 많은 걸 기억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과 건망증에 시달려 불안한 중년들과 치매를 걱정하는 노년들로 가득 차 있다. - 추천의 글, 정재승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기억은 효율을 꽤 따지는 편이다. 한마디로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하도록 진화했다. 의미가 없으면 잊는다. 그런데 우리 삶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이고 사소하다.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즉 늘 하는 일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이 사건들은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단조로운 일들이다. 일화기억은 늘 똑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범하고 전형적이고 뻔한 것들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이런 경험들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성인이 되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일화기억이 형성되는 시기는 평균 3세다. 3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때는 6세 혹은 7세 정도다. 이제부터의 기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 곁들여진 일화들이다.
왜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일을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뇌에서 언어의 발달은 일화기억을 강화, 저장, 인출하는 능력과 상응하여 일어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연관된 해부학적 구조와 회로가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은 경험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갖춘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일화기억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대개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모여 있다. 이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집중되는 회고절정의 시기다. 다양한 방면에서 첫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생은 목표와 의미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한다. 그래서 일화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기 위해서는 감정, 의외성, 의미 등이 필요하다.
저장된 일화기억을 인출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억의 인출은 녹화된 동영상의 재생이 아니라 이야기의 재구성이다. 지나간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 저장되어 있는 세부정보의 일부만을 불러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세한 부분을 빼먹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왜곡한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고려할 여유가 없던 정보, 맥락, 관점들이 지금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기억의 빈틈을 메워서 기억의 서사를 더 완벽하고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없던 정보를 꾸며내기도 한다. 당연히 이 정보는 대개 부정확하다.
일화기억은 매번 인출될 때마다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기 때문에 매번 우리가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잘못된 정보가 침투해 기억을 실제 경험과 다르게 왜곡할 수 있다. 일화기억에 거짓 정보가 침투하는 가장 흔하면서도 확실한 경로는 언어, 특히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일화기억은 단어의 선택과 유도질문으로 매우 쉽게 조작된다.
피질에서 한 번씩 끄집어낼 때마다 보관되어 있던 일화기억은 쉽게 변질되고, 우리는 꺼내온 기억 위에 새로 편집된 기억, 온갖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된 기억을 덮어씌운 다음 다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지나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쩌면 맞을 수도,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참과 거짓 중간 어디쯤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 배우자가 말하는 기억이 우리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발끈하지 말자.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도 아마 고의는 아니겠지만 잘못된 기억을 둘만의 추억이라고 여기며 간직해왔는지 모른다. 이 점을 깨닫고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도 완벽하게 알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자.
기억을 잠식하는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즉 반복과 의미 부여다.
우리는 뛰어난 기억력을 원하지만 모든 부담과 공로를 온전히 기억에만 돌릴 수는 없다. 기억체계가 최적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저장과 정보삭제가 균형을 이루도록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기억이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능력은 모든 것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유용한 정보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다. 신호를 저장하고 소음은 제거한다. 잊는 능력은 기억하는 능력만큼이나 꼭 필요하다.
만성스트레스는 기억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뇌와 몸의 반응에 극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다. 요가, 명상, 건강한 식습관, 운동, 마음챙김 수행, 감사와 공감을 통해 우리는 스트레스에 조금 둔감해지고, 도피 반응에 브레이크를 걸고, 불안이라는 독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방법들이 고혈압, 염증, 불안, 스트레스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활동은 코르티솔 수준도 정상화시킨다. 또한 해마의 신경생성을 강화함으로써 만성스트레스를 퇴치하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가 깨어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시냅스에 대사 잔해들이 쌓이는데, 깊은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가 이 잔해들을 청소한다. 숙면은 뇌의 대청소 시간인 셈이다. 특히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아밀로이드의 처리다. 하룻밤만 잠을 못 자도 뇌척수액에 아밀로이드와 타우(또 다른 알츠하이머병 예측지표)가 증가할 수 있다. 아밀로이드가 쌓이면 숙면을 방해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아밀로이드가 쌓이게 되므로 퇴적물 형성을 가속화하는 악순환 고리에 갇히게 된다. 수면 부족은 알츠하이머병을 진행시키는 매우 중요한 위험 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부터 수면 부족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194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은 하룻밤 평균 7.9시간을 잤다.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든 다 가지고 다 해봐야 한다는 압박, 치솟는 불안, 전자기기 사용 시간의 폭증, 깊은 밤까지 TV 시리즈 한 시즌을 정주행하는 습관 등으로 인해 우리의 수면 시간은 현저하게 줄었다. 오늘날 미국, 영국, 일본의 성인들은 하룻밤 평균 6.5시간을 잔다. 우리는 잠을 박탈당하고도 적게 자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곱 시간도 채 자지 않는 생활습관을 열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허세다. 수면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수면 시간에 대해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일곱 시간에서 아홉 시간을 자야 한다. 그보다 덜 자면 건강과 기억을 해친다.
기억이 한 인간을 이루는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감정, 의지, 감수성, 도덕적 가치가 있다. 한 인간을 자극하고 그에 따른 깊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다. - 알렉산드르 루리아
기억을 소중히 여기되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기억을 정말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면, 기억의 진정한 위대함을 인정하고 기억을 잘 돌볼 것이다. 올바른 도구를 사용하면 기억은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시험에서 A를 받을 수 있다. 기억의 진정한 가치에 감사할 것이며, 이런 감사의 마음은 수많은 연구가 증명하듯 우리의 행복과 안녕에 보탬이 된다. 동시에 기억을 가볍게 받아들이면 기억의 수많은 허점에 대해 느긋하고 관대해질 것이다. 불완전한 기억을 탓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한 걸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만성스트레스가 줄어야 기억력도 좋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처럼 우리의 삶이 편안해진다.
우리의 뇌는 애초에 일상적이거나 뻔한 일들을 담아두도록 설계되지 않은 반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반복적이고 뻔한 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기억하고 덜 잊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이긴 할까? 아마도 의미 있는 것만 남기고 모두 잊어버리길 바라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기대일 것이다. 즉 인생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자세히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기억은 내가 나임을 느끼게 해주고,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인식하게 해주며, 타인과의 연결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의 뇌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지금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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