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에 익숙한 우리에게 던지는 원초적 질문,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에 되새겨볼 주제다.


[본문발췌]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망치를 손에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다." - 마크 트웨인


도덕성이 주로 도덕적 추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선천성과 사회적 학습이 어떻게든 조합되어 도덕성이 형성된다는 주장이 가장 가능성 높은 대답으로 남는다. 우리 인간은 날 때부터 바른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바르다고 여기는지는 반드시 배움을 통해야만 알 수 있다.


정교한 추론에는 두 종류가 있고 둘은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우선 그중 하나인 탐구적 사고는 우리가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관점을 공평하게 헤아려보는 것"을 일컫는다. 그에 비해 확증적 사고는 우리가 "특정 관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기울이는 일방적인 노력"을 말한다.
책임감이 탐구적 사고를 증가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의사결정자는 어떤 견해를 갖기 전 그 견해를 나중에 자신이 청중에게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2) 의사결정자는 청중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야 한다.
(3) 의사결정자가 보기에 청중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정확성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될 때에야 사람들은 그야말로 피 터지게 노력하여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는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우리 삶은 거의 백이면 백 여기에 해당한다), 책임감 압력은 확증적 사고만 더 증가시킬 뿐이다. 사람들은 정말 올바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올바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더 애쓰는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에게 치밀하게 추론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 학교는 IQ가 높은 지원자들을 선별해내는 역할을 했고, 이 IQ가 더 높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의 논쟁 능력을 예측해주는 지표로 IQ만 한 것은 없지만, IQ는 내 편의 논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로지 그것만을 에측해줄 수 있었다. 즉, 똑똑한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사나 훌륭한 공보관 역할을 더 없이 훌륭히 해내지만, 상대편의 논거를 찾아내는 데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전체 쟁점을 좀 더 온전하고 공평하게 탐구하는 데 IQ를 쏟아붓기보다는 자신의 논변을 더 든든히 떠받치는 데 IQ를 쏟아붓는다"


일상의 무미건조하고 손쉬운 일들에서도 우리의 사고는 탐구적이기보다는 확증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물며 사사로운 이해, 사회적 정체성, 강력한 감정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결론을 원하는 상황이라면, 나아가 그것을 요구까지 하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탐구적 사고를 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부가 추론 능력을 활용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꺾는다 해도 개개인 모두가 공동의 연대 혹은 공동의 운명을 느껴 서로가 적정선을 지키며 상호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면, 결국에 그 집단에서는 훌륭한 추론 능력이 사회 체계의 창발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찾기를 목표로 하거나(첩보 기관이나 과학계) 훌륭한 공공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입법부나 자문위원회) 집단 혹은 기관에서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훌륭한 사고가 아니라 훌륭한 행동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합리주의를 손에서 놓고 직관주의를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 한 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단순히 사람들을 힘으로 을러 생긴 무식한 권력을 인간적 권위라고 할 수 없다. 질서와 정의 유지라는 책임까지 짊어져야 인간적 권위인 것이다. 물론 권위자들도 자기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는 순전히 일신의 이득을 위해 아랫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 권위 기반은 정치에서는 좌파보다 우파에 의해 훨씬 손쉽게 이용될 수 있는 도덕성 기반이다. 좌파의 경우 위계질서, 불평등, 권력에 맞서는 것을 자신들 본연의 특성으로 삼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 그리고 이해 집단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통용적 동인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어떻게든 우리의 도덕 모듈을 자극하려고 애쓴다. 우리에게서 표나 돈이나 시간을 얻어내려면 도덕성 기반 중 적어도 하나는 반드시 활성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평등을 무엇보다 신성시하며, 나아가 시민의 권리와 인권 쟁취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 좌파가 지지하는 정책들을 보면 보통 부자에게 더 높은 세금을 매기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며, 때로 국민 모두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는 성격을 띠는데, 자유/압제 기반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지역주의에 더 가까운 특징을 가진다. 즉, 인류 전체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중요시한다. 이들의 경우에는 자유/압제 기반과 독재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서 경제적 보수주의의 수많은 교조를 뒷받침해낸다. 그리하여 (진보적 복지국가와 그것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으로) 나를 짓밟지 말고, (억압적인 규제로) 내 사업을 짓밟지 말 것이며, (유엔 및 주권에 해가 되는 국제조약을 만들어) 내 나라를 짓밟지 말라는 주장이 나온다.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신성한 가치가 평등이 아니라 자유이다.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자와 정치적으로 한편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세 가지 기반의 도덕성을 가진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고 있다. 진보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기반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단 진보주의자들은 공평성(비례의 원칙)이 동정심이나 압제에 대한 저항과 상충할 때에는 공평성은 버리고 그 대신 이 둘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주의자의 도덕성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에 비해서 배려 기반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른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 대부분은 자연선택이 개인 차원에서 작동한 결과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전부 그렇지는 않다. 우리 인간은 집단과 관련된 적응의 특성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영장류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보다 크고 고결한 무엇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도 갖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90퍼센트가 침팬지와 같고,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은 추종자들이 누구를 따를 때 얻게 될 개인적 이득에 호소하는 반면,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은 추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스스로를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닌, 자기보다 커다란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변혁적 리더들은 스스로가 집단 헌신의 본보기가 됨으로써(예를 들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나'보다 '우리'라는 말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구성원 사이의 동질감을 강화하는 한편, 집단의 목표와 공통된 가치, 그리고 공동의 이익을 한층 강화해나간다.


행복은 사이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 나 자신과 나의 일, 나 자신과 나보다 더 거대한 무엇, 이 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행복은 비로소 찾아온다.


도덕적 체계란 가치, 미덕, 규범, 관습, 정체성, 제도, 첨단 기술 등이 진화한 심리 기제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도덕적 체계로서 함께 작용하여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거나 규제하며, 나아가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한다.


자신을 넘어선 무엇에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다른 이들과 무리지어 그 주위에 몰려드는 것, 이는 다른 것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비범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가 한 팀으로 뭉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업을 추구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몇 가지 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정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주의는 확실히 적정선을 넘어서는 경향이 있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며, 고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쌓인 도덕적 자본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쌓여 있는 도덕적 자본은 잘 지켜내지만, 특정 계층의 희생자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으며, 모종의 강력한 이해관계에 따른 약탈을 제어하지 못하며,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제도를 바꾸거나 고칠 줄 모른다는 약점이 있다.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도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편을 갈라 싸우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편이 나뉘면 우리는 매 싸움에 이 세상의 운명이라도 걸린 듯이 서로 이를 악물고 싸운다. 도덕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각 편에는 저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이야기 중에는 뭔가 귀담아들을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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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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