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연결, 공감, 친화력이 공생의 길이 있다.
[본문발췌]
우리 안에 잠재한 최선의 본성을 살리기 위한 열쇠는 최악의 본성을 발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적자 생존' 개념은 최악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한 연구는 가장 덩치가 크고 가장 힘세고 가장 비열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비축된 에너지를 고갈시켜 면역체계를 약화하고 결국 우리는 더 적은 수의 후손을 남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공격성이 높을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데, 싸워서 다치거나 잘못되면 죽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적자'는 우두머리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타인이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의 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왔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가축화징후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는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리처드 랭엄, 데일 피터슨, <악마 같은 남성>)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사회연결망은 많은 이유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약 1만 2000년 전 본토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고립되었다. 화석 기록을 보면 이 시기 전까지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더 큰 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집단과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만 년 뒤, 본토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겨우 몇십 종으로 줄어들었다.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 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을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은 첫째, 감정반응이 격하지 않고 관용이 높을수록 자연선택에 유리해졌고 이것이 협력적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능력과 연관되며 둘째, 우리의 외형과 생리 작용, 인지능력의 변화가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축화징후와 유사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이미 큰 뇌를 지니고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종 조상이 이 자연선택에 성공했다. 자기가축화는 다른 동물 종들에게서도 일어났을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종뿐이었다. 자기가축화 과정을 겪으며 감정반응을 더욱 억제함으로써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사람 사회에서 지배력을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한 용도로 공격성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나눔, 관용, 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사랑이 정체성이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펄럭이는 귀나 얼룩이 있는 털 같은 신체적 변화와는 달리 이 부산물은 실로 가공할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 종은 독재자가 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 종은 오로지 사회의 신용을 중시하며,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는 누가 되었건 배척하거나 죽이는, 작은 무리의 수렵채집인으로 살도록 진화했다. 수천 세대에 결쳐서 이 평등주의자 무리들이 전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는 동안 나머지 다른 사람 종은 모두 사라졌다. 독재의 씨앗은 우리가 최초로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함께 뿌려졌다. 식량을 생산하고 많은 양을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성장했다. 사람들은 물자를 독점하기 위해서 협력해야 했고 그 누구도 독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견제하던 작은 규모의 수렵채집 집단이라는 장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100명쯤 되는 무리 안에서는 쉽게 존재가 드러나 처벌받았을 독재자들이 익명이 가능해진 큰 무리 속에 숨어 한 사회 내의 하위집단을 선동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부족, 왕국, 제국, 민족국가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는 이 방식, 즉 싸워 이긴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농경 사회는 한 울타리 안에서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게임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민주적일 때 민주주의는 실패한다."고 2016년 언론인 앤드루 설리번은 경고한 바 있다. 관용을 베풀다 못해 스스로가 잠식되기 시작하는 때가 민주주의가 과도해지는 지점이다. "지고한 자유로부터 ... 야만적인 속박이 널리 퍼져" 폭군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말했다. "폭군의 최우선 관심사는 갖가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지도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을 가진 극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을 추진하고, 유사함이 아닌 다름을 찬양하며,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 살면서 자기가 속한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다름이 전체의 하나됨을 위협한다고 여긴다면, 다름을 찬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과녁의 원 외곽에 속하는 모든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위협이 되거나 자신들의 신념에 도전하는 이들을 도덕적 관점에서 배제, 즉 비인간화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정치적 신념은 유동적이다. 사람은 중도에서 원 외곽으로 나갈 수도 있고,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든가 나이가 든다거나 소득이 변하든가 하는 개인적 겨험이나 정치적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중도로 돌아갈 수도 있다. 원 외곽에 속하는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이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고 더욱더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정치는 더 불안정해진다. 그 위협이 커지면 온건한 중도에 속했던 사람들까지도 극단주의로 밀려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들을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뿐이다.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감옥에서 말했듯이, "지도자는 언제든 국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아주 쉬운 일이다. 그저 우리가 공격받고 있으며 평화주의자들에게는 당신들이 나라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고 말한 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면 된다. 어떤 국가에서든 원리는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접촉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은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에 따르면 더 평화로운 전략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폭력 시위는 위협감을 가중시켜 보복성 비인간화의 순환 고리에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건 극단에 가까운 신봉자일수록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외부자가 그 집회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집회의 '평화로운' 부분임을 기억하자. 평화로운 노력만이 내구력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서로 다른 배경과 관점 및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 생각을 교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무역로를 따라 형성된 정착 부락이 있었다. 머나먼 곳에서 떠나온 여행자들이 이곳에 모여 생각과 기술, 상품을 나누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이 역할을 하는 곳은 공원, 카페, 극장, 식당 같은 공공장소다. 우리는 이런 장소에서 이웃을 만나 어울리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해질 수 있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 아고타 크리스토프 (0) | 2023.04.16 |
---|---|
신비한 밭에 서서 - 가와구치 요시카즈 (0) | 2023.04.08 |
순서 파괴(Working Backwards) - 콜린 브라이어, 빌 카 (0) | 2023.03.18 |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수학의 힘 - 류쉐펑 (0) | 2023.03.11 |
마흔에 읽는 니체 - 장재형 (1) | 2023.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