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질문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우리를 성장과 발전하게 한다.
 

[본문발췌]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우주에 대한 신비감 없이 아이들이 잘 자랄 방법은 없다. 생각에 잠기는 아이가 인간의 미래이고 세계의 미래다.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 상상력, 이 네 가지는 시대 변화에 관계없이 교육이 성장 세대에게 반드시 길러주고 함양해야 하는 기본 능력이다. 
질문이 죽으면 호기심도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탐구의 열정도 죽는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이다.
 
 
 
민주주의를 할 줄 모르는 국민은 민주주의 느린 속도에 짜증내고 토론, 설득, 절충, 타협의 과정들이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느릿느릿한 합의 절차들을 곧잘 무능과 비효율로 간주한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우화 속의 개구리들처럼 옛날의 왕을, 혹은 독재자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천국과 도서관.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고 기억과 상상력이 용접되는 곳, 지적 모험의 땅, 돈도 비자도 필요 없는 여행지, 국경과 인종과 계급이 영원히 퇴각한 코즈모폴리턴의 세계, 거기가 도서관이다.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행은 그러나 이런 두 개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번째 만남이 있다. 제 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이전의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바뀌어 있다.
 
낯선 나라를 통해 되비쳐오는 제 나라의 얼굴 만나기, 그것이 여행의 한 소득이라면 대학 생활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도 나 아닌 것, 타자,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알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 자기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질문 던질 줄 아는 성찰과 비판의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이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다. 그것은 특권이되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진리의 소유 주장을 심문하는 특권, 정신의 가장 활발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겸손해지기 위한 특권이다.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될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락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행복의 방정식.

  •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이다.
  •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 쉽다.
  •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내가 가질 행복을 저 자가 갖고 있네그랴? 저런 도둑놈, 내 행복을 훔쳐가다니, 화가 치미는 바로 그 순간에 질투의 여신이 나타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확인시켜준다. 저 자가 가진 것은 너도 가져라, 뺏고 훔쳐서라도. 그러면 행복은 네것이다. 아니, 너는 저 자가 가진 것 이상으로 가져야 해.
  •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 방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려준 것은 석가모니다.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서 그것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붓다의 '깨침' 가운데 하나다. 욕망은 일정량의 크기로 묶이지 않는다. 100을 바라던 욕망은 그 100을 소유하는 순간 200으로 불어나고, 200을 갖는 순간 300으로 커져 달아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 만약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완벽한 제거와 고통의 완벽한 회피에 목표를 둔다면 그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통의 기원이 된다. 완벽한 행복의 추구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삶의 진실이 아니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 이상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열심히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

 
 
우파니샤드에 벼락신의 언어. '다다다', 첫번째 '다' 소리는 '다미아타'의 다로 "너를 다스리라"는 의미다. 두번째 '다'는 '다타'의 다로 "주어라"를 의미한다. 세번째 '다'는 '다야디암'의 첫 소리이며 의미는 "자비로워야한다"이다.
 
 
스승이란 누구인가? 세상에 대한 바른 관점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그런 노력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자, 경험과 지식과 상상력을 부단히 용접하고 관용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진실 앞에 자신을 세우려는 자, 좁은 이해관계의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에의 감각을 전달하는 자. 그가 지식행상 아닌 '스승'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 인문학에 안겨지는 사회적 책임은 강단 인문학적 작업과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이 중시해야 할 네 가지 책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1장 3절)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내고, 남의 눈을 잡기 위해 조석으로 안달하다가 안 되면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그게 '우리'다.  그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 전적으로 남들의 시선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관계의 건축술
빵과 의미는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빵이 삶의 바깥쪽을 버텨낸다면 의미는 삶의 안쪽을 지키고 지탱한다. 삶이 무의미해질 때 사람들은 시들시들 병들고 미치고 자살한다. 이 세계로부터 의미가 빠져나갈 때일수록 인간은 제 손으로 의미를 만들고 삶에 의미를 공급해야 할 책임 앞에 놓인다. 이 의미 공급 작업에 절대적 요청이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이 그 무용해 보이는 인문학적 질문의 '위대한 실용'이다. 나는 나 혼자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속에,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관계 덕분에 내가 된다. 그 관계를 떠나면 나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내 존재의 정당성("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내 삶의 문법("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인간은 인간을 발명해온 동물이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지금도 발명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해온 중요한 가치들 :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우정, 공존과 상생, 배려와 보살핌, 생명 존중과 평화 애호 등등
 
 
 
우리 시대를 괴롭히는 국지적 세계적 문제들 : 빈부 격차의 극단적 심화, 생태계 파괴, 넘쳐나는 쓰레기, 자원 고갈, 시장에 의한 사회 접수, 핵에너지의 위험성과 에너지 부족 문제, 노령화, 테러, 기후변화, 정보-지식의 왜곡과 조작, 과학과 윤리의 충돌, 말기 자본주의의 역기능, 민주주의의 위기 등
 
 
 
자기 성찰적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과 대면하는 일,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의 작업은 시작된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나의 형성과 발명),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내 삶의 발명),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어하는가?"(가치 추구와 발명) -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성숙이란 결국 무엇인가? 인간, 사회, 자연, 문명, 역사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능력의 형성, 그것이 성숙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인문학의 몫이며, 공공의 가치, 평화, 관용, 선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존중의 능력을 일깨우고 비판 정신과 대안적 상상력을 키우는 일도 인문학의 작업이다.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시민 덕목의 학문적 바탕을 다지는 것 역시 인문학이다. 이 시점에서 인문학의 위축은 그 차제로 사회적 위기다.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의 위대한 원리처럼, 사회의 가장 낮고 그늘진 곳, 빼앗기고 궁핍한 곳, 내팽개쳐지고 억눌리고 무시된 곳에 소생과 부활의 봄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자연의 사계는 제각각의 소리와 색깔과 동작을 갖고 있다. 여름은 자라는 것들의 소리와 윤기를, 가을은 익어가는 것들의 색채와 자세를, 겨울은 다시 기다리기 위해 근본으로 드는 것들의 멈추어버린 듯한 호흡과 낮은 엎드림의 몸짓을 갖고 있다. 봄은 새로 깨어나는 것들의 소리와 움직임과 색깔로 가득하다.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의 하품 소리, 곰들의 기지개, 터져나오는 싹들의 여린 녹색이 봄의 무대를 장식한다. 여름이 성장의 드라마이고 가을이 성숙의 서사, 겨울이 기다림의 형식이라면 봄은 단연 소생과 부활의 장르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균형 속에서 그의 현재를 관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것이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다. 양자 균형이 깨질 때 인간은 기억의 노예가 되거나 유쾌한 망각의 바보가 된다. "잊지 마라"라는 기억 명령은 과거의 신성화와 신비화를 위한 명령일 때에는 죽음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를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망각도 그러하다. 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 된다. 그러나 기억과 마찬가지로 망각도 건강한 현재를 위해 필요하며, 이 경우에만 망각은 유용성을 갖는다.
 
 
 
"도덕의 나침반을 잃으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게 된다" - 조지 워싱턴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질문'은 없다고 한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달에 얼마 벌고 얼마를 쓰느냐, 어디 부동산을 언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생각만 꽉 차 있고 손익의 대차대조표만 중요할 뿐 삶을 이끌 원칙과 가치의 화살표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좁좁한 울타리, 개구리 우물, 작은 세계의 수인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세대와도 다른, 어쩌면 단군 이래 최고의 개인주의적 편향을 가진 세대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공동체와 정의, 공존과 연민의 윤리를 완벽하게 시궁창으로 내던진 몰가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운 선택의 시대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라는 질문을 그들의 모든 중요한 선택과 행위의 배경에 깔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대학 졸업식의 로런스 서머스 총장의 축사
"나는 하버드 4년이 여러분들에게 편안한 안락지대 바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생각의 힘을 인정하며 바른 논리와 사유에 입각한 토론으로 세계를 바꾸어나갈 능력, 다수가 틀렸을 때에는 그 다수에 외로이 맞설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었기를 희망한다"
하버드가 길러내고자 하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생각의 창조자, 생각의 실천자이다.
"이치에 맞는 것들을 위해 일어서고 부당한 것들에 맞서며 남들이 싫어할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불편도 감내하라. 그대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의 말도 존경하고 경청하라. 우리 대학 졸업생들은 창조자로서, 생각의 실천자들로서만 이 세계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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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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