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가 높을 수록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은 커진다.
개성, 다양성, 그리고 이런 것들을 경청, 토론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해제: 존 스튜어트 밀과 자유론 - 박문재]
인간 정신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서 잘못을 시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행동은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다수의 전횡"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사상의 자유", "선택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개성이 발달하게 되면, 개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활력이 넘치게 된다는 인식을 토대로,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이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한계를 제시한다.
(1)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근거로서의 "효용": 밀은 제러미 벤담의 영향을 받은 공리주의자답게 "효용"을 제1의 가치로 삼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본적인 사상원리로 전제한다. 인간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최대의 효용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 자신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모든 재능을 완전히 꽃피워서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발전을 최대한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 인류라는 것도 결국에는 개개인의 집합이기 때문에, 개인이 최대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환경을 조성해줄 때에만 가장 발전할 수 있다.
(2)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것으로서의 자유: 다음으로 밀은 개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한 개인의 의견과 행동이 아무리 옳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진리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틀린 것이 있고, 아무리 틀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옳은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개인에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와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자유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절대로 틀릴 수는 없다"infallibility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것은 독단이자 독선이며 독재다. 따라서 어떤 의견이 아무리 틀리고 사회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자유를 막는 것보다도 허용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이득이 된다.
(3) 사회적 행위가 아닌 모든 개인의 행위에 주어져야 하는 자유: 따라서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사회적 행위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적 정부는 그러한 개인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고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판단할 때에 오직 "직접적인" 영향만을 따지고, "간접적인" 영향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행동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인 경우에는, 전자의 자유가 후자의 간접적인 피해보다 우선한다고 본 것이다.
(4) 인간 자신과 인류 발전을 이끌 원동력으로서의 개개인의 "개성": 밀은 모든 개인에게 자유가 허용될 때에만 개개인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개성"이 온전히 발현되고, 이 무수한 개성들이 의견의 표현과 토론을 통해 함께 어우러질 때만이 개개인과 인류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5)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원리로서의 "해악":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 원리가 "효용"이라면, 개인의 행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때에 그 행동을 제한하는 원리는 "해악"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사회적 해악이 되는데, 이러한 해악을 방치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효용이 훼손되고 발전은 저해된다. 따라서 사회나 정부는 적절한 개입을 통해 그러한 해악을 규제함으로써, 사람들과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6) 자유를 배워나가는 훈련으로서의 "자치"
(7)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지적 역량"
[본문 발췌]
내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철학적 필연론"으로 잘못 명명된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 온 이른바 "의지의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민적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 즉 사회가 개인에 대해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그 한계에 대한 것이다.
권력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권력이라는 무기는 외적을 물리치는 데만이 아니라, 신민을 억압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공동체 안에서 힘이 약한 구성원들이 수많은 독수리들에 의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힘이 센 독수리를 세워서 나머지 독수리들을 통제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독수리들의 왕은 다른 수많은 독수리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양들을 잡아먹는 데 열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양들은 그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들을 늘 경계하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했다. 그래서 공동체를 염려하는 애국자들의 목표는 지배자가 공동체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에 제한을 두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유"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제한은 두 가지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첫 번째는 정치적 자유들 또는 권리들이라 불리는 영역들, 즉 권력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들을 정해 놓고서, 지배자가 그 영역들을 침범했을 때에는 그것을 의무 위반으로 간주하여, 특정한 사항에 대한 저항 또는 전면적인 저항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대체로 시간적으로 좀 더 나중에 사용된 방편으로서, 지배 권력이 행하는 좀 더 중요한 행위들 중 일부에 대해서는 공동체의 동의, 또는 공동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종의 집단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것을 헌법에 규정함으로써 그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개인적 자유의 필연성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이글의 목적은, 사회가 법률적 벌칙이라는 형태의 물리적인 힘을 수단으로 해서든, 여론에 의한 도덕적 강압을 수단으로 해서든, 개인을 강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규율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 원칙은, 인간이 자신의 어느 구성원의 행위의 자유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유일한 것은 자기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뿐이라는 것이다. 문명화된 공동체가 자신의 구성원에 대해서 그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경우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 위해를 막고자 하는 경우뿐이라는 말이다. 당사자인 그 구성원 자신의 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익은 그러한 개입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공동체가 개입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그 구성원에게 더 좋다거나,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현명하거나 심지어 올바른 조치로 본다는 이유로,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거나 하지 말도록 강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이유들은 그에게 항의하거나, 그와 논쟁하거나, 그를 설득하거나, 그에게 간청하기 위한 타당한 근거는 될 수 있지만, 그를 강제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 그에게 해악을 가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그의 행위를 미리 차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만, 그것은 정당화된다. 사회는 한 사람의 행위 중에서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속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한 권리로서 절대적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그 주권이 개인에게 있다.
인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고유한 영역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는 "의식"이라는 내면적인 영역이다. 거기에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실천적이거나 사변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모든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과 정서를 가질 절대적인 자유가 속한다. 의견을 표현하고 출판하는 자유는 한 개인의 행위 중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원리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거의 사상의 자유만큼이나 중요하고, 대체로 동일한 이유들에 의거해 있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사상의 자유와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취향과 추구의 자유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맞는 인생 계획을 세우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이 어리석다거나 비뚤어졌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방해 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각 개인의 이러한 자유로부터 결사의 자유가 나온다. 물론, 이 자유에도 여러 제약들이 따른다. 이것은 성인들이 다른 사라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목적을 위하여 강제적이거나 속아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진정한 의사에 의거해서 단체를 결성할 자유다.
전체적으로 이런 자유들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그 통치 형태와는 상관없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이런 자유들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가로막고자 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자유만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개개인들을 강제해서 인류에 이익이 되어 보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개개인들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 보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인류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
오늘날의 세계 도처에서는 사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여론의 힘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 법의 힘을 빌려서 개개인을 부당하게 통제하고자하는 경향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권력을 강화시켜서 개개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잠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게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변화들과 경향성은 그대로 놓아두면 저절로 사라질 해악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정반대로 점점 더 힘을 얻어서 가공할 만한 일이 되어갈 해악이다. 권력자의 자격으로서든, 아니면 동료 시민의 자격으로서든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행위규범으로 강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인간 본성에 수반되는 몇몇 가장 좋은 감정들과 가장 나쁜 감정들에 의해서 아주 강력하게 밑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는 거의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는 강력한 도덕적 신념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권력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현재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사회의 권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온 인류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권력을 장악한 한 사람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인류 전체를 침묵시키는 것만큼이나 정당하지 못하다. 한 개인의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이 심각한 해악이 되는 이유는 그런 행위는 현재의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까지, 그리고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인류 전체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견해가 옳은 경우에는, 인류는 오류를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그 견해가 틀린 경우에는, 오류와의 충돌을 통해서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유리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인류의 건전한 식견이나 판단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인정하지만,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관련해서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이 틀릴 경우를 대비해서 어떤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아주 확실하다고 느끼는 어떤 의견이 사실은 그들 자신이 인정한 대로 틀린 경우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일수록, 통상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는 완벽하게 옳고 절대로 틀릴 수 없다는 암묵적인 믿음 위에서 그 세계가 지닌 의견들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의견에 의거해서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이익은 방치되어 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도 이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행위에 적용되는 반론은 그 어떤 특정한 행위에 대해서도 유효한 반론이 될 수 없다.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의견을 만들어내고, 그 의견이 올바르다는 것이 아주 확실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의견을 절대로 강제해서는 안 되는 것은 정부와 개인의 의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의 삶의 목적들을 이루는 데 필요한 행동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 충분한 확실성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 우리 자신의 행동을 위한 올바른 지침이라는 것을 전제할 수 있고, 또한 전제하여야 한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거나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그 의견이 반박되지도 않고 틀렸음이 증명되지도 않아서, 그 의견을 올바른 것으로 전제하고서 행동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인간의 역량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리의 의견이 이성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에 대해 최고의 확실성을 얻어낼 수 있다.
인류에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우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특질이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 토론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틀린 의견들과 실천들은 사실과 근거에 의해 점차 밀려난다. 하지만 사실들과 근거들이 인간의 지성에 어떤 효과를 미치기 위해서는 지성 앞에 호출되어야 한다. 사실들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들이 지닌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필요하다.
토론의 필요성.
인간의 판단이 지니는 모든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틀렸을 때에 바로잡을 수 있다는 데 달려 있다. 그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을 때에만,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정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했을 때, 도대체 그런 결과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늘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경청해서, 그들이 하는 올바른 말들에 의해서도 유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틀린 말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어떤 점에서 틀렸는지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유익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어떤 문제의 전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갖 다양한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 온갖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각양각색의 방식들을 깊이 연구해 보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지성의 본질을 생각할 때,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해 나갈 때에만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서 확고한 습관으로 정착시키는 것만이 신뢰할 수 있는 의견과 판단을 생산해내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토대이다.
이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단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처하게 되면, 이단들의 의견에 대한 공정하고 철저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고, 만일 그런 토론이 이루어졌더라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잘못되었음이 드러나서 축출될 수 있었던 의견들이 토론이 차단됨으로써 도리어 살아남을 수 있게 되며, 심지어 확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정통적인 결론만을 용납하고 그것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는 경우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이단들의 지성이 아니라, 도리어 일반 사람들의 지성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혹시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을 우려하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정신적인 발전은 저해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성도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사상가의 첫 번째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없다. 진리와 관련해서 인류가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미 옳다는 것이 증명된 의견들을 늘 좇아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갖춘 후에 스스로 사고해 나가다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다.
한 사회가 옳다고 전제하는 대원칙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몇몇 시기들에서 나타났던 사회 전반에 걸친 고도로 활발한 정신 활동을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인류에게 중요하고 큰 문제들에 대한 논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거대하게 활활 타오를 때에만, 인간의 지성은 그 토대로부터 뒤흔들리게 되고, 그 충격은 지극히 평범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가해져서, 그들의 지성이 고양되어, 그들도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일정 정도 되찾게 될 수 있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의견이 아무리 옳다고 할지라도, 그 의견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전면적이고 자유로우며 무제한한 토론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의견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단지 죽은 독단적 의견으로 취급될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하나의 분명한 정답이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없는 수학 같은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근거를 가르쳐주고 증명하는 법을 알게 해줄 수 있다. 수학적 진리를 증명하는 것의 특이성은 확실한 정답이 있어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 분명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론도 있을 수 없고, 반론에 대해 대답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는 각각의 의견을 밑받침해주는 일련의 서로 상반되는 근거들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진리를 이끌어내어야 한다. 심지어 자연과학에서도 언제나 동일한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들이 존재한다. 천동설과 지동설, 불에 타는 성분이 플로지스톤이라는 이론과 산소라는 이론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경우에는 왜 다른 이론이 옳은 것이 될 수 없는지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증명되고, 어떻게 그것이 증명될 수 있는지를 알 때까지는, 다른 쪽 이론이 옳은 근거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덕이나 종교, 정치나 사회관계, 인생사 같이 무한히 더 복잡한 문제들을 살필 때에는, 어떤 의견이 옳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논증의 사분의 삼은 그 의견과 다른 의견들을 밑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을 반박하는 데 할애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이해한 부분만을 아는 사람은 그 문제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시하는 논거들이 타당해서, 아무도 그 논거들을 반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논거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논거들을 반박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어느 쪽의 의견이 더 나은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한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를 중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권위 있는 사람의 판단을 따르거나, 일반 사람들처럼 가장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
또한 상대방의 논거들을 듣고자 하는 경우에도, 자기 쪽 진영에서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 논거들을 이해해서 조목조목 반박한 것들을 곁들여서 제시한 내용에 입각해서 듣는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상대방의 논거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방식도 아니고, 그 논거들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도 아니다. 그 논거들을 실제로 믿고 있고,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옹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고 설득력 있는 논거들을 알아야 한다. 현안의 진상을 올바르게 보고 해결하는 것을 가로막는 난점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전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난점들을 해결하고 진정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설령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경우에도, 그 소수의 다른 의견 속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들어야 할 유익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거의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소수가 침묵하게 되면, 인류는 진리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각각 진리의 어느 부분을 반영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진리의 절반을 담고 있는 어떤 의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억압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가공할 해악이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도 찬반양론을 모두 들을 수밖에 없는 곳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하지만 오직 한 쪽의 의견만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는, 그 의견 속에 들어 있는 오류들이 진리로 여겨지고 굳어져서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 의견이 마치 진리 전체인 양 과장됨으로써, 그 의견 중에서 진리인 부분은 진리로서의 효과를 지닐 수 없게 되고 만다.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들 중에서, 어떤 문제에서 진리인 부분과 오류인 부분을 가려내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극히 드물고, 각 사람은 진리의 오직 한 부분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의 각각의 부분들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각 부분들을 경청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어떤 의견을 단정적으로 말하게 되면, 비록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의사 표현 방식을 엄격하게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의사 표현 방식이 지닌 더 큰 문제는 상대방에게 확신을 심어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자폭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데 있다. 그런 의사 표현 방식 중에서 최악의 것은 궤변을 일삼고, 사실들이나 근거들을 은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거짓으로 제시하고, 반대 의견을 왜곡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대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아주 유명한 빌헬름 폰 훔볼트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주제로 삼아서 한 소논문을 썼는데도, 독일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그 명제는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사람의 모호하고 일시적인 욕망들이 이끄는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 이성의 영원히 변치 않는 명령들에 따라 정해진 인간의 목표는 인간의 능력들을 최고로 가장 조화롭게 발전시켜서 완전하고 일관되며 통일된 전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쉬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목표, “특히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시도 잊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각자의 개성에 맞춰서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다양한 상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결합될 때, “개개인의 활력과 갖가지 다양성”이 생겨나고, 이들이 합쳐져서 “독창성”을 이루게 된다.
인지, 판단, 독특한 감정, 정신 활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 같은 인간의 능력들은 오직 선택을 행할 때에만 훈련된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을 행한다면,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일을 관습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분별하는 훈련도 되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을 원하는 훈련도 되지 않는다. 근육의 힘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도 오직 사용할 때에만 커진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믿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 일을 한다면,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능력들은 전혀 훈련될 수 없다.
사람이 세계 또는 그를 직접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정해준 대로 자신의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원숭이 같이 흉내 내는 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보기 위해서 관찰력을 사용해야 하고, 미리 내다보기 위해서 추리력과 판단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서 활동력을 사용해야 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분별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내린 후에는 자신이 신중하게 결정한 것을 실현해내기 위해서 확고한 의지력과 자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서 완성해나가고 찬란하게 꽃피워 나가는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완성해 나가고 찬란하게 꽃피워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된 자동기계들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집을 지어주고 곡물을 길러주며 전쟁도 해주고 재판도 해주며, 심지어 교회를 짓고 기도하는 것도 대신해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반면에, 오늘날 이 세계의 좀 더 개화된 지역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수많은 생물의 종들 가운데서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그런 자동기계로 대체해 버린다면, 그것은 이득이 아니라, 상당한 손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정해진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서 정해진 곳에 배치되어 정해진 일을 정확히 해내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내면의 힘을 따라 사방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그가 속한 문화 속에서 발전되고 수정되어 표현된 것인 자신만의 욕망과 충동을 가진 사람은 개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만의 욕망과 충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개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개성이 없는 증기기관과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충동을 지니고 있고, 그의 충동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의지의 지배 아래 있다면, 그는 활력이 뒷받침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개개인마다 서로 다른 욕망과 충동을 소유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장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강력한 자질을 타고나서 발전시키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회에 별로 좋지 않으며, 사람들이 전체적이고 평균적으로 높은 활력을 지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본성이 마음껏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도록 허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개인에게 그런 삶을 허용하는 수준이 높은 시대일수록, 그 시대는 인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후대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독재가 행해지는 곳에서도, 개성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최악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반면에, 개성을 짓밟고 말살하는 것은, 그것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그리고 그것이 신의 뜻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상관 없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독재다.
독창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가치 있는 요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회에는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해서, 이전에 진리였던 것들이 이제는 더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 외에도, 새로운 실천들을 처음으로 시작해서, 좀 더 개화되고 진전된 행동과 더 나은 품격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의 예를 사람들 앞에 제시하는 선구자들도 필요하다. 인간 사회가 모든 면에서 이미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행함으로써 인류에 공헌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을 선구적으로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개척해놓은 길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행하기만 한다면, 인류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인류 중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극소수의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그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그대로 고여서 썩은 저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좋은 것들을 새롭게 들여오는 것도 그들이고, 인간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것도 그들이다.
천재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소수이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고 계속해서 유지해주어야만 한다. 천재성은 오직 자유의 대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쉴 수 있다. 천재라는 말 자체 속에는 이미 그들이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개성이 강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가 자신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개성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몇 가지 정형화된 표본들은 천재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아주 심한 억압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들이 소심해서 그러한 표본들 중 하나를 억지로 받아들여서 거기에 적응하려고 마음을 먹음으로써, 그러한 억압 아래에서는 펼칠 수 없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전시키거나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인간 사회는 그들에게 주어진 천재성으로부터 그 어떤 유익도 거의 얻어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천재들 중에서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들에게 채워진 족쇄를 부수어버리는 경우에는, 천재들은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로 만드는 데 실패한 사회의 공격대상이 된다. 즉,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강이 “네덜란드 운하”처럼 좁은 구역을 유유히 흐르지 못한다고 불평하듯이, 사회는 그들을 향해 미쳤다느니 정상이 아니라느니 심한 독설을 퍼부으며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오늘날에는 대중이 부각되면서 개인은 사라졌다. 정치에서 그것은 여론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 시대에 권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중”의 권력이다. 정부의 권력도 존재하긴 하지만, 정부는 이미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따라가는 기관이 되어 있다. 이런 일은 공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적인 삶과 관련된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대중이지만, 그 대중은 실체가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변화만이 아니라 진보를 추구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들을 발명해내고, 어느 기간 동안 사용하다가, 또다시 더 좋은 기계를 발명해내어 이전의 것을 버리고 더 발전된 것을 사용한다. 또한 정치와 교육과 도덕에서 진보를 위해 애쓴다 - 물론, 오늘날 도덕에 있어서의 진보라는 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강제해서 우리와 똑같이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대중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대의 사회와 대중이 반대하는 것은 발전이나 진보가 아니다. 도리어, 오늘날 대중은 자신들이야말로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한다.
대중이 반대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개성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서로 달라야만, 자신의 부족함이나 다른 사람들의 뛰어남을 주목하게 되고, 서로의 장점들을 결합해서 개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 전부를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로 만들어야만,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를 위한 행동의 원칙
첫 번째는,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명시적인 법규나 암묵적인 번째는,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명시적인 법규나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따라 개개인의 권리로 인정된 특정한 이익들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개개인은 사회나 그 구성원들을 어떤 침해나 해코지로부터 방어하는 데 필요한 과업들과 희생들 중에서 공평한 원리에 의거해서 정해진 자신의 몫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런 의무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강제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행하게 만드는 것은 정당하다. 사회가 개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의 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들의 복리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잘못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이 법적으로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회가 여론을 통해 그 사람을 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어떤 사람의 행동 중에서 어느 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게 되면, 그 즉시 사회는 그 사람의 그 행동에 판단하고 개입할 권한을 갖게 되고,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를 공론에 부칮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행동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그들은 모두 성인이고 평균적인 지능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원할 때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에는, 사회가 그 행동에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모든 행동들과 관련해서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개개인에게 완벽한 자유가 주어져서, 그런 행동을 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하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나타내보이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비난과 처벌을 받는 것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 일들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했느냐, 아니면 우리가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일들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서 엄청난 차이를 초래한다.
전자의 경우에 그 사람이 우리를 불쾌하게 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도 되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멀리해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모든 벌을 이미 받고 있거나 앞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 사람의 삶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이미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의 잘못에 대해 의도적으로 응징을 가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그의 삶을 더욱더 망쳐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를 응징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그 자신이 겪고 있는 해악들을 피하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이미 받고 있는 벌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동정, 아니 아마도 혐오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분노나 적개심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를 사회의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호의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에게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그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징벌은 그를 내버려 두는 것이고, 그것 이상으로 무엇인가 응징을 가하고자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반면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규범을 어긴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그러한 행동은 완전히 다르게 취급된다. 그의 행동으로 인한 해로운 결과들이 그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치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신의 모든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응징해야 하고, 명백한 징벌의 목적으로 그에게 고통을 가해야 하며, 그 징벌이 충분히 혹독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는 그 사람을 범죄자로서 법정에 세우고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론이나 사회적인 압박 등과 같은 여러 방법들을 동원해서 우리 자신이 판결을 선고하고 그 판결을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는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자기 식대로 행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우리 자신의 일을 우리 식대로 행할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유를 사용할 때, 그것이 부수적으로 그 사람에게 징벌이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징벌을 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명제
첫 번째 명제는, 개인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서는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사회가 개인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반감이나 비난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수단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에 충고하거나 훈계하거나 설득하거나 상종하지 않는 것뿐이다.
두 번째 명제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들을 했을 때에는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고,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사회적 또는 법적 처벌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은 한 개인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는 개인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
“효율성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는 권력을 최대한으로 분산시켜라. 하지만 정보는 가급적 최대한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그 곳에서 정보를 분배하라.”
정부가 개인의 노력과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고 촉진시키는 활동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인과 집단들의 활동과 역량을 이끌어내는 대신에, 그들이 해야 할 활동들을 정부 자신이 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조언해주며 때로는 경고를 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잘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에, 그들에게 족쇄를 채워서 그런 상태에서 일하게 하거나, 그들을 옆에 세워두고서 그들의 일을 직접 나서서 할 때, 폐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가치다. 따라서 국가가 여러 가지 일들에서 좀 더 효율적인 행정 처리나 많은 경험을 통해 실무 능력이 뛰어난 관료들을 선호해서, 국민 개개인들을 정신적으로 발전시켜서 그들의 정신적인 능력이 폭넓어지고 수준이 높아졌을 때에 그것이 가져다줄 이익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가 비록 좋은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국민 개개인들을 더욱 유순하게 만들어서 국가의 말을 더 잘 듣는 사람들이 되게 함으로써 그 국민을 왜소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국가는 머지않아 그런 왜소한 국민으로는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국가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 국민을 국가가 시키는대로 하는 대로 하는 완벽한 기계로 만들어놓았지만, 그렇게 부드럽게 잘 돌아가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활력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런 국민이 전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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