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사물의 개수만큼 삶을 짓누르는 무게가 된다. 삶의 즐거움과 자유는 내가 가진 사물의 개수와 반비례한다.
[본문발췌]
우리는 신용카드라는 장치를 통해 이미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에 ‘장악’당하고, ‘부품’으로 전락한다. 내가 신용카드를 쓰는 한 내 주체적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나는 부채인간이고, 기계적 금융 시스템에 예속된 노예이다.
휴대전화는 시공을 초월한 ‘나’의 확장이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사람들은 ‘나’의 시공을 무한대로 확장하고, 그 대신에 ‘나’의 핵심이라고 할 자아가 자아로써 있도록 단단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독의 온전함과 자유는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농경시대의 인간과 디지털 기술이 상용화되는 시대의 인간은 분명 다를 것이다. 철학자 미셸 셀르는 자연이라는 합집합에서 갈라져 나온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도구들, 이를테면 휴대전화와 같은 첨단기술을 집약해서 “시간의 압축물”을 만들어낸 다음, “기술이 외부에 요청한 변화의 반작용체”(파스칼 피크/장 디디에 뱅상/미셸 세르,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된다고 지적한다.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스마트’한 도구 - 사물을 만들고 이 ‘스마트’한 도구 - 사물들은 우리에게 돌아와 ‘스마트’한 진화를 이끈다. 인간이 시간을 압축하고 조작하는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셸 세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체험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다. 엄청나게 긴 시간을 자신에게 굴복시킬 힘을 가진 존재다. 무생물의 형성, 생물의 진화로부터 획득한 권위를 지닌 존재이자, 기호의 순환으로부터 얻어낸 권위를 지닌 존재요, 호미니언의 시간, 존재의 시간, 계통발생의 시간에서 얻은 권위를 지닌 존재다.”(파스칼 피크/장 디디에 뱅상/미셸 세르, <인간이란 무엇인가>) ‘스마트’한 도구 - 사물들을 만든 것은 기술이고, 이 기술의 핵심은 곧 시간의 압축이다. 인류가 이 시간의 압축체를 써서 창조적 진화물에서 진화의 창조자로 나서고 있다.
깊이는 곧 인간 됨됨이이고, 인격(내면에 숨은 사람)의 내용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깊이란 훌륭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도덕적 품성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심지가 깊은 사람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제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얼른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 심지가 깊은 사람이다. 그 반대의 사람은 허물이 있어도 고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허물이 허물이라는 생각에 미처 못 미치기 때문이다. 심지가 깊은 사람은 예禮, 타자에 대한 감정이 입, 배려, 심사숙고, 무거움, 지혜를 머금은 침묵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 말보다 남의 말을 경청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 지혜로써 자신이 내면 깊이를 드러낸다. 귀 기울임은 먼저 자신의 입을 닫고 침묵해야 한다. 침묵은 말을 아낀다는 뜻과 말을 가려서 한다는 뜻이 겹치고, 그것은 교양과 지혜의 증거이다.
모든 끝은 그저 끝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것의 시작과 맞물린다. 어둠에 감싸인 새벽은 밤의 끝이면서 하루를 여는 시작이다. 얼음과 북풍으로 몸과 마음을 시리게 했던 겨울의 끝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이어진다. 끝이 잃어버린 시간들의 보상일 때 그것은 축복으로 변한다. 끝은 긴 과정의 고통, 과정 속에 깃든 동요와 변덕들을 달콤한 과실로 바꾼다. 끝은 성숙이고 완성이다. 여름의 끝은 가을의 수확을 여는 시작이다.
실제로 주체 - 의지의, 자유의, 재현의 기관으로서의 주체, 또한 권력의, 지식의, 역사의 주체 - 는 사라진다. 그러나 주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양이가 자신의 미소를 허공에 떠돌도록 남겨 두었듯, 자기 뒤에 자신의 유령을, 자신의 나르시스적 복사판을 남긴다. 주체는 사라진다. 널리 분산되어 있고 유동적이고 실체가 없는 어떤 주체성, 즉 모든 것을 둘러싸고 모든 것을 육체와 분리된 공허한 의식의 거대한 공명판으로 바꾸어 버리는 허깨비에 못 이겨 사라진다. -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끝과 사라짐은 실재가 가진 에너지의 영점零點, 가치의 영점에 이르는 것이다. 제도, 가치, 개인들이 사라진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빈자리는 공허가 채운다. 공허는 위대하다. 그것은 공허가 모든 실재의 확고한 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공기와 바람이 비둘기의 비행에 본질적인 만큼 공허도 인생에서 본질적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대화로부터 추방한 자들>에서 인용한 칸트의 말)
사라짐은 인생의 끝 아니라 차라리 삶의 총체적 완성이다. 삶은 죽음에 닿아 비로소 둥글어진다. 인생의 끝은 꿈과 희망을 버렸을 때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들이닥친다. 꿈과 희망을 버린 사람에게서는 분발의 욕구에 더해지는 생동감, 도약의 환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수염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현재와 찰나들에 대응한다.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면도기에 잘려나간 수염들은 어떤 자취들, 부재의 징표들이다. 삶이란 것은 그런 망각의 흔적들 위에 쌓아올린 그 무엇이다. “망각은 기억의 살아 있는 힘이며, 추억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산물” (막 오제, <망각의 형태>)이라고 한 것은 막 오제라는 프랑스 출신의 인류학자이다. 망각은 일종의 존재 경화증이고, 추억은 망각의 잔여물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위에 꿋꿋하게 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망각은 그것이 모든 시제들과, 이를테면 시작을 체험하기 위해선 미래와, 순간을 즐기기 위해선 현재와, 귀환을 실천하기 위해선 과거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모든 경우와 결합할지라도 우리를 현재로 귀착시킨다. 그러니 현재에 계속 속해 있으려면 망각해야 하고, 죽어가지 않기 위해선 망각해야 하며, 변함없이 남아 있기 위해선 망각해야 한다.”(막 오제, <망각의 형태>)
로캉뎅은 주변의 사물들이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변형되는 지각의 왜곡 속에서 혼란에 빠진다. 이 자명한 것들 앞에서 겪는 분열은 자명한 것들의 분열이 아니라 의식 주체의 분열이다. “사물들이 자기의 이름들에서 이탈한다. 그들은 기괴하고 고집스럽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나는 사물들, 이름 없는 사물들의 한가운데 있다. 무방비 상태로…” (샤르트르, <구토>) 샤르트르는 시각 망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병리적 상태에 빠진 로캉텡이 드러내는 갖가지 반응들에 대한 임상의학적 관찰을 적어나간다. 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사물들의 세계란 무엇인가? 로캉텡은 미친 게 아니다. 그가 광기에 빠졌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실은 사물들에 내재한다고 믿어 왔던 질서와 가치들이 불변적 진실이 아니라 한낱 표면에 불과하고, 그것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가변성으로 뭉쳐진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로캉뎅은 그 가변성을 넘어 선 사물과 세계의 벌거벗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셈이다. 그가 겪는 현실 역시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조작한 하나의 거대한 허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의 불안은 이성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의 균열 속에서 나타난다. 그가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고통이 심해진 것은 자신의 삶이 본질에서 도망치는 삶이었다는 자각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구역질나고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분노”로 헐떡거린다.
과거에는 가난에 ‘불행’이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오늘날엔 ‘패배’라는 낙인을 찍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가난은 불행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빈곤은 삶에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삶은 불결하고 추악하고 겁나는 것으로 만든다.”(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가난은 사람을 유령으로, 그림자로, 그리고 짐승으로 만든다. 하지만 가난도 파괴할 수 없는 영혼의 순정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종종 탁자 위에서 사람들과 마주 보며 무언가를 먹을 때 그것을 느낀다. 에밀 시오랑은 가난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꿰뚫어 보고 지독히도 염세적인 철학에 감염되어 버렸다.
“어떤 유명한 작가는 악인만이 혼자 살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선한 사람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명제는 비록 격언까지는 아니었지만, 앞의 것보다 더 진실하고 이치에 맞다. 만약 악인이 혼자 있다면, 그는 어떤 짓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악인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그의 계략을 꾸미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속에서인 것이다. 악인이 되기 위해서는 희생자들이 있어야 한다. 즉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만약 내가 혼자라면 설령 그러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독한 인간은 선량하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인생에 대해 관조하고, 식물학과 인생의 공허에 대해 몽상하면서 사유가 풍부해질 수 있었다. 고독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나 자신과 만나고 우주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자기충족적인 시간이고, 그래서 고독이 감미롭고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의 본질은 더도 덜도 아닌 멈춤, 시간의 얼어붙음, 죽음이다. 사진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현실의 시간에서 뒷걸음질쳐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이때 과거란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다. 과연 죽음뿐일까? 사진은 시간과 존재의 정지라는 맥락에서 죽음이다. 동시에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존재의 회귀로서의 생생한 삶을 겪게 한다.
카메라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으로 축약하면서 그 대상을 기록한다. 사진은 대상을 전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망각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생겨나는 순간부터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 소실점에 가 닿는 순간 사물은 사라진다. 사진은 그 사라짐의 운명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다.
“사진을 통해서 현실을 확인하고 사진을 통해서 경험을 고양하려는 욕구,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심미적 소비주의의 일종이다.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불가항력적인 정신적 오염이다. 아름다움, 표면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목적, 이 세계를 구원하고 찬양하려는 태도 등을 절절히 갈망한다는 것 - 우리는 사진을 찍는 기쁨 속에서 에로틱하기 그지없는 이런 감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사진을 찍으며 경험을 고양하는 욕구가 “심미적 소비주의”에 닿아 있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우리는 걸핏하면 사진을 찍는다. 휴대전화의 카메라 기능을 이용해서 친구를 찍기도 하고, 음식을 찍기도 하고, 거리의 모습을 찍기도 하지만 그 행위 뒤에 어떤 욕망이 움직이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사진을 찍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움을 찾고 누리며,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세계를 찬양하려는 무의식의 욕망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경제와 생활 방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이 긴급 상황에서 텔레비전은 무엇을 하는가? 텔레비전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통 시스템이다. 모든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있으며, 보통 사람들은 매일 여섯 시간은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무엇을 위해서? 설탕과 고기, 술과 커피, 그리고 중독성 발암 물질에 대한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자동차를 비롯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삼키는 제품들을 구입하고, 모든 면에서 건강을 해치기 위해 고안한 듯한 생활 방식을 권장하고, 소중한 자원을 급격하게 낭비하고, 물질주의라는 정신병을 부추기고, 엄청난 양의 오염 물질과 쓰레기를 생산하고, 자국 내의 불공평한 부의 분배와 그 바깥에서의 비도덕적인 분배를 촉진하는 것,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일이다. - 니콜라스 존스(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움베르트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누구나 책을 통해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삶을 살 수가 있다. 그 시간을 연장하다 보면 결국은 불사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에코는 이렇게 썼다. “책은 생명 보험이며, 불사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트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불꽃의 관조는 하나의 근원적인 몽상을 영속화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로부터 떼어놓으며 몽상가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현전現前이지만, 그것의 옆에 있으면 우리는 멀리, 너무도 멀리 꿈꾸게 된다. ‘우리는 몽상 속에서 길을 잃는다.’ 불꽃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거기 있다. 그래서 몽상가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크게, 너무도 크게 꿈꾸면서 - 세계에 대해 꿈꾸면서 - 다른 곳으로 꿈꾸러 간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요리 기술은 마술과 연금술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연기, 불, 증기 등은 세계의 재료가 부글부글 끓고, 응고되거나 풀어져서 변신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현장인 동굴과의 연결된 상징이다.’(프랑코 라 체클라, <파스타와 피자>) 다시말해서 부엌은 음식이 끓고 음료가 발효하며 연금술과 같은 기능을 지닌 요리사가 이것들을 손으로 매만지는 연금술사의 동굴이다. 요리를 하는 것은 사물들을 값진 물질, 즉 현자들의 돌인 금 또는 정선된 음식으로 변신시키는 꿈의 실현이다. - 프란체스카 리고티, <부엌의 철학>
모든 물음은 이미 그 물음 속에 대답을 품는다.
“다른 사람의 소리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게 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의 목소리를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 묘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우리가 뭔가 멋진 일을 해냈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중요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만족하는 길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 못 찾았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찾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그때까지 멈추지 마십시오. …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프라이드, 부끄러움, 실패 등은 죽음 앞에서 모두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면 무언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덫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당신은 발가벗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 스티브 잡스
사물들은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자아의 일부가 되고, 삶의 바깥에서 심오함을 뽐내기도 한다. 셰리 터클은 삶에 관여하는 정도와 형식, 시간의 지속성 여부에 따라 사물을 디자인과 연주의 사물들, 훈련과 욕망의 사물들, 역사와 교류의 사물들, 변화와 이동의 사물들, 애도와 추억의 사물들로 가른다.(셰리 터클,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이 분류는 타당하다. 사물들은 삶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고, 자아를 시간적으로 연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에 필요한 것들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눈다.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으로 우정, 자유, 사색, 의식주를 들고,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좋은 집, 개인용 목욕 시설, 연회, 하인, 생선과 육류를 들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명성과 권력을 들었다.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고, 낮은 수입이 비참함과 동일시 될 수 없다. 다만 따뜻한 옷 몇 벌과 음식, 거처할 만한 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자유, 사색과 더불어 우정이 삶의 기초이고, 행복한 삶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것이다.
욕망은 속박이요 버림은 자유라고 한다면, 냉장고 속에 보관되는 식품들은 우리를 속박하는 쾌락에의 욕망에 연결된 그 무엇이다.
이 얼음묘지에 모여 있는 것들은 탐욕과 포만에의 욕망에서 잠시 유예된 것들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냉장고 속에 처넣은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잊힌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신과의 그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으며, 우리는 시뮬라르크가 되었고 감정적 실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덕적 실존을 상실했노라고, 이러한 설교는 시뮬라르크의 악마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시뮬라르크는 그 의미 맥락에서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것, 사건, 이마주 등을 포괄한다. 파열하듯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는 것, 지속하지도 않고 자기 동일성도 없지만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는 모든 사건들. 시뮬라르크의 기원은 철학의 태초인 플라톤에게까지 이른다. 플라톤은 현실 세계가 가치의 원형인 이데아의 복제물이라고 여겼다. 복제의 복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시뮬라르크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가르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다.
신문은 그 본질에서 세상 모든 것의 그림자와 중력들의 누설漏泄이다. 다양한 삶과 사건들의 모자이크, 이 모자이크는 선택적이다. 신문은 아무것이나 함부로 누설하지는 않는다. 누설에도 일정한 원칙이 따른다. 그 원칙은 인간적 흥미와 공공적 정보라는 가치다. 두 가지 원칙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젊은 여배우가 한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서 걷다가 넘어진 것은 신문에 나오지만, 이발사 은퇴자들의 모임 같은 것은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여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인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다.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다. 왜냐하면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다.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신문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매체, 즉 뜨거운 미디어이다.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도시는 뜨거운 곳이고, 반면에 정보가 저밀도로 존재하는 시골은 차가운 곳이다. 정보가 저밀도로 존재하는 시골에서는 신문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시골보다는 도시에 신문 구독자가 많은 것은 사회적 기회외 이익의 창출에 예민한 사람들이 더 많이 살기 때문이다.
시계의 통제를 받는 문명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삶을 그것 안에 묶고 가두며 지배한다.
우리는 시간이 규정하는 삶의 의미 안에서 의미를 구하고, 그 의미의 장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바깥에 자리 잡고서 우리의 일생을 터널과 같이 좁고 긴 영역으로 제한할뿐더러, 안에서 우리의 몸 자체를 지배하기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조건은 우리를 혈류의 박동과 세포의 끊임없는 재생 속에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 놓는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주로 태양의 모습을 통해 형성된다. 태양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우리 눈앞에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우리는 하늘에 박혀 있는 태양의 고정성과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동성의 관계로부터 시간이라는 실을 자아내고 초, 분, 시, 일, 주, 월, 년, 세기라는 단위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광막한 우주의 흐름을 시간이라는 촘촘한 그물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 리아 코헨, <탁자 위의 세계>
여행 가방 안에는 덜어내고 남는 최소한도의 물건들만 남는다. 그 간소함이 곧 삶의 복잡함을 이기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것이다. 여행가방이 작을수록 여행은 알차고 실속은 커지지만 그것이 클수록 여행은 그 본질에서 벗어나며 지루하고 고달파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가방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법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받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여행은 일상의 단조로움과 저 실용성의 끈덕진 구애에 대한 모반이다. 우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이 삶이 아니라 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모든 여행에는 낯설고 모호한 것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스민다. 여행에의 기대는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알랭 드 보통)에 대한 보랏빛 꿈으로 부풀고, 여행이 품은 불안은 낯설고 모호한 풍물들 속에 숨은 잠재적 위기들로 인해 커진다.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배와 기차, 비행기, 이 거대하고 민첩한 기계들이 주는 즐거움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행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 따르는 몸과 영혼의 수고는 충분히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장소가 주는 즐거움과 쾌락은 금세 끝난다. 여행의 정수, 여행의 행복은 그 목적지들이 아니라 여정 속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이 언제나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여행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사태, 난관들, 기상이변, 항공사의 착오들로 인한 무수한 변곡점들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은 모험이다. 그리고 여행의 잔여적 범주 안에는 내 안의 자아,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있다. 여행이 ‘생각의 산파’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가 새로운 생각을 낳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망외의 소득을 쥐고 득이양양해진다. 여행은 무수히 많은 생각과 생각을 잇는 몽상들을 낳는다.
결국 여행은 어디로든 떠남이고,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의 나아감이다.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 아닌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편도 여행! 우린 떠난 곳으로 돌아올 수도 없고, 이것을 두 번 반복할 수도 없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 그래서 그것이 그토록 감미로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온갖 횡포에 꿈이 짓밟힌다. 권력들이 만든 가치와 그 규준들, 꿈을 짓밟는 여러 횡포들! “운명의 횡포가 가진 돌연성과 불규칙성,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고약한 능력, 이 모든 것이 그 횡포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만든다.”(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우리 앞의 문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생존’이다. 세계는 ‘의자 뺏기 놀이’ 중이다.
왜 삶이 갈수록 힘들어지는가? 왜 일자리는 줄고 주름진 살림은 펴지지 않는가? 왜 열심히 일해도 빚에서 헤어날 수 없는가? 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가? 지나친 유동성의 증가가 문제다. ‘지구화’와 ‘개방성’도 이 유동성의 확산에 힘을 보탠다. 좋은 것도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퍼지지만 나쁜 것도 함께 퍼진다. 테러리즘 같은 것, 그로인해 세계는 더 많은 불안과 공포, 혼란의 회오리를 피할 수 없게 되고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변한다. … 땅이 물렁물렁해지면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지구화, 국제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통제 불가능한 시장의 변덕, 국수주의, 테러리즘의 위험성들로 사회적 토대가 물렁물렁해진다. 땅이 언제 푹 꺼질지, 그 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세계의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개인들의 삶 역시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영역으로 떠밀린다. 그 결과는? 비정규직과 백수, ‘88만원 세대’들이 양산되고,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진다. 불행한 조건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이들은 ‘난민’들, 홍은 ‘잉여인간’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세계는 점점 ‘지옥’으로 변하는데, 그 ‘지옥’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지옥은 삶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과 공포로 가득한 삶 자체다.
바우만의 은유를 빌린다면,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였다. 근대는 유토피아의 꿈이 그나마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을 잘 가꿈으로써 유토피아의 꿈을 추구할 수 있었다. 정원에 식물들을 배치하고, 불필요한 잡초들을 제거한다. 그렇게 정원사는 유토피아 창조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탈근대의 시대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이다. 사냥꾼이 되는냐 사냥감이 되느냐. 달리 말하면 죽이느냐 죽느냐다. 이런 사회는 ‘위험사회’이고, 위험이 깔린 세계는 곧 ‘지옥’이다. 이것이 진짜 ‘지옥’인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사냥이 사냥감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원사에게, 유토피아는 길의 끝이었다. 그러나 사냥꾼에게는 길 자체다. 정원사는 길의 끝을 유토피아의 정당화이자 궁극적 승리로 생각했다. 반면 사냥꾼에게, 길의 끝은 이미 삶의 현실이 된 유토피아의 종착점이자 수치스러운 패배이다. 한술 더 떠서 개인적인 실패를 보여 주는 꼼짝 못할 증거와 완전한 개인의 패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면, 자기만 배제되었다는 수치심과 따라서 (추측컨대) 자기만 능력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저기 멀리 있는 것이 이미 현실 안에서 실현된 그 무엇이고, 그것은 불멸이다. 문제는 그 사냥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개인의 수치스러운 패배로 귀결되며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즉시 사라진다. 그는 곧 바로 유토피아에서 밀려난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사냥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간 날들이 덧없는 것은 바쁘게 산 날들의 덧없음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불안은 영혼을 갉아먹고 이성은 서서히 마비된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그 영혼 속에서는 추억이 질척거린다.
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고 좌우대칭형의 외관을 가진 포유류이다. 불을 다룰 줄 알고, 선과 악을 구분하고, 화가 날 때는 공격을 하고, 두려울 때는 도망가고, 선택과 분류에 뛰어나고, 평생을 오른손잡이로 살고(왼손잡이들도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험담하기를 즐기고, 거짓말을 중요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쓰고, 추론에도 능하다.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부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우아하고 점잖다. 이들은 시, 음악, 동화를 짓고 즐기며, 헐벗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제 것을 기꺼이 덜어서 돕는다. 착한가 하면 악하고, 악한가 하면 착하다. 사람은 가장 비열한 존재이면서도 숭고하고, 가장 숭고한 존재이면서도 비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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