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 확장 다툼에서 다양성을 수용하며 동질성 찾는 다문명 세계로 변화하는 길목, 주도권을 뺏고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영향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다.
[본문발췌]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 민족과 국민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까지 그런 질문 앞에서 내놓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들은 부족, 민족집단, 신앙 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쓰인 문화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주어진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세대들이 우선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한 가치, 기준, 제도,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문명은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문화 지역, 문화적 특성과 현상의 집약이다. 월러스틴이 정의하는 문명은 모종의 역사적 총체를 형성하면서 이런 현상의 이형들과 공존하는(반드시 동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세계관, 관습, 구조, 문화(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모두)의 특수한 연쇄다. 도슨의 이해하는 문명은 ‘특수한 민족의 업적인 문화적 창조성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과정’의 산물인 반면, 뒤르켐과 모스에게 있어 문명은 ‘그 안에서 개별적 민족 문화는 전체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다수의 민족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윤리적 환경’이다. 슈펭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 …. 발달한 인류의 종이 누리를 수 있는 가장 외현적이고 인위적인 상태 …. 하나의 결론, 과정물을 승계한 완성물이다”라고 파악했다. 문화는 문명의 정의에서 사실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통 주제다.
무역과 교류가 평화나 유대감을 조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사회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변별이론distinctiveness theory은 특정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본다. “사람은 자신을 다른 인간, 특히 자신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과 구분짓는 특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파악한다. ….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10여 명의 여자들과 함께 있는 여성 심리학자는 자신을 심리학자로 여기지만 10여명의 남성 심리학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여자로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통신, 무역, 여행의 증가로 문명과 문명의 접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차츰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이 만
나서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은 스스로를 각각 독일인과 프랑스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 사우디아라비아인 한 명과 이집트인 한 명이 만났을 때는 각자를 유럽인과 아랍인으로 여길 것이다. 프랑스인은 북아프리카인의 프랑스 이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카톨릭이 국교인 같은 유럽의 폴란드 이민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미국인은 캐나다나 유럽 국가가 자국에 더 큰 투자를 해도 신경을 안 쓰다가 일본이 투자를 하면 아주 과민하게 반응한다. 도널드 호로위츠는 그런 심리를 재미나게 표현했다. “이보인(나이지리아 남동쪽에 사는 민족 - 옮긴이)은 …. 나이지리아 동부 지방에서는 오웨리 이보거나 오닛샤 이보다.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서는 그냥 이보다. 런던에 오면 그는 나이지리아인이다. 뉴욕에서는 아프리카인이다.” 사회학에서도 세계화 이론이 비슷한 결론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가히 유례가 없을 만큼 문명적, 사회적 상호 의존도가 깊어지고 거기에 입각한 의식이 확산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문명적, 사회적, 민족적 자의식은 심화된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부활, ‘성스러운 것으로의 복귀’는 세계를 ‘단일한 장소’로 보는 견해에 대한 부정적 답변인 셈이다.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가져온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지고 강력한 원인은 종교의 죽음을 이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던 원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후반부 세계를 휩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정체성의 원천과 권위체계가 산산조각 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뿌리를 잃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실업자로 전전했다. 그들은 낯선 군중 속에 섞이고 새로운 관계틀에 노출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새로운 뿌리가 필요했다. 안정된 공동체의 새로운 형식,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했다. 주류 종파이든 원리주의 종파이든 종교는 사람들의 그런 욕구에 부응했다. 리콴유는 동아시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한두 세대 만에 산업화에 도달한 농경사회다. 서구에서 2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일이 여기서는 5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벌어졌다.모든 것이 아주 빠듯한 시간틀 속에 우겨넣어지고 있어 혼란과 기능 장애는 불가피하다.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처럼 고속 성장을 해온 나라들을 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의 부상이다. …. 과거의 관습과 종교(조상 숭배, 샤머니즘)는 이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왜 여기 있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갈구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아를 정의내리지 못하는 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할 수 없다. 이익 추구는 자기 정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급속히 변하는 시기에는 확립된 정체성이 무너지므로 자아가 새롭게 정의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따지는 물음은 이익을 따지는 물음에 앞선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필요성을 느낀다. 종교는 이에 대한 강력한 답변을 제공하며, 종교 집단은 도시화로 상실된 공동체를 대신하는 작은 사회적 울타리가 되어준다. 하산 알 투라비가 말했듯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정체감과 방향성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역사적 정체성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창조한다. 아무리 보편적 목표를 내건 종교라 해도 신도와 비신도, 우월한 내집단과 열등하고 이질적인 외집단의 기본적인 구분을 통해 사람들에게 귀속감을 준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힘을 합쳐 서구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도전의 배후에 자리 잡은 원인들은 서로 관련성은 있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아시아의 자기주장은 경제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자기주장은 상당 부분 사회적 동원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21세기에도 세계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파장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과 여타 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은 이들의 정부가 대외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자원을 제공한다. 이슬람 국가들의 인구 증가,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연령층의 폭발적 증가는 원리주의, 테러리즘, 폭동, 노동력 수출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한다. 경제적 발전은 아시아 정부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인구 증가는 이슬람 정부와 비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가 서구가 주도해온 국제질서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세계 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은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몫으로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에도 지금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의 발전은 문명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난 세력 변동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 가면 인도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면서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인구 증가도 문명의 세력 판도에 중요한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청년 인구의 급증은 이슬람 부활의 추진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슬람의 호전성과 이민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비서구 문명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비서구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 비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의 충돌이 나타날 것이다.
세계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해 문화적 결속이 등장했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한 국가가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비동맹 노선을 고수할 수 있었으며 또 일부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동맹관계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안보 상황에 대한 독자적 판단, 세력균형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산, 이념적 선호를 바탕으로 관계를 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 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훨씬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나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답변, 곧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로 의지하는 것은 혈연, 믿음, 신앙, 가족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조상, 종교, 언어, 가치관, 제도를 가진 사람들과 뭉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다.
문명 패러다임은 유럽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라는 서유럽인 앞에 놓인 질문에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한다. 유럽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끝나고 이슬람교와 정교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체로 적대적인 경향을 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는 문명 간의 관계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층선은 이슬람과 이웃한 정교, 힌두, 아프리카,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 사이에 놓여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다.
비서구인들은 서구의 원칙과 서구의 행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을 서슴지 않고 지적한다. 위선, 이중 잣대, 단서 조항은 보편주의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집권을 돕는다면 재고의 대상이 되고, 이란과 이라크에게는 군축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방치하고, 자유무역은 경제성장을 낳는 만병통치약이지만 농업은 예외고, 중국의 인권은 문제 삼아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은 문제 삼지 않고, 석유 자원을 가진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은 기를 쓰고 막아도 석유 자원이 없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공격을 받으면 나 몰라라 한다. 이중 잣대는 어설픈 보편주의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다.
핵을 비롯한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은 다문명 세계에서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 분산의 중심적 현상이다.
미래는 변경 불가능한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미래도 영속적이지 않다. 문제는 유럽이 이슬람화할 것이냐 아니냐 또는 미국이 히스패닉화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이 상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한 2개의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대규모 공동체를 포함하는 단절국이 될 것이냐의 여부다. 이것은 다시 이민자의 규모와 그들이 유럽과 미국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동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의 갈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인접국들 사이에, 한 국가 안의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간에, 옛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낡은 질서의 파편 위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집단들 간에 발생한다. 단층선 분쟁은 특히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세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핵심국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주요국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분쟁을 낳는 쟁점들은 국제정치의 고전적 주제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엔, IMF, 세계은행처럼 지구적 규모를 갖는 국제기구의 운영과 발전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력.
- 핵 확산 금지, 무기 규제, 군비 경쟁을 둘러싼 논쟁에 반영되는 상대적 군사력.
- 무역, 투자 등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나타나는 경제력과 복지 수준.
- 한 문명에 속한 나라가 다른 문명에 거주하는 동족을 보호하고,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국 영토에서 다른 문명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노력과 관련 있는 인적 요소.
- 한 나라가 자신의 가치관을 다른 문명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촉구하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가치관과 문화의 갈등.
- 단층선 분쟁이면서도 핵심국들을 곧잘 전선으로 끌어내는 영토 분쟁.
이러한 문제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갈등의 근원이다. 그러나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부딪칠 때 문화적 차이는 갈등을 증폭시킨다. 상호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핵심국들은 자기 문명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제3의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적대관계에 있는 문명의 내부 분열과 결함을 조장하며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고자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방책, 은밀한 공작, 유인, 선전, 강압을 적절히 섞어서 구사한다. 그러나 핵심국들은 중동이나 인도 대륙처럼 단층선을 따라 서로 인접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 군사 충돌은 상호 자제한다. 핵심국 간의 전쟁은 다음 두 가지 상황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 핵심국을 포함한 동질적 집단들이 분쟁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단층선 분쟁이 문명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대립관계에 있는 핵심국들이 자제하거나 단층선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둘째, 문명들의 세력균형에 변화가 올 때, 핵심국들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투키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문명 내부에서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락하는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헤게모니 전쟁’의 역사다. 상이한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부상하는 핵심국과 쇠락하는 핵심국 사이의 분쟁 촉발 정도는 이들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앞에서 견제를 추구하느냐 편승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아 문명에서는 편승 현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부상은 미국, 인도, 러시아 같은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도모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를 볼 때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는 헤게모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두 사회의 문화적 유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서구와 중국 사이에는 그러한 종류의 유대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서구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군사 충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 이슬람의 역동성은 비교적 소규모로 벌어지는 단층선 분쟁이 지속되는 원천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부상은 핵심국 사이에 벌어지는 대규모 문명 전쟁의 잠재적 원천이 되고 있다.
이처럼 갈등이 지속되는 원인을 12세기 그리스도교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20세기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같은 일시적 현상에서 찾기는 어렵다. 갈등은 두 종교의 본질과 이들 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의 성격에서 나온다. 한편으로 이 갈등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을 고수하는 이슬람교의 가치관과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빚는 대립의 산물이다. 그러나 갈등은 유사성에서도 기인한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일신교인데, 일신교는 다신교와는 달리 자기 외부의 신성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파악한다. 둘 다 하나의 유일한 신앙을 모든 인간의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주의를 내건다. 이교도를 참다운 유일 신앙으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가 신앙인에게 있다고 보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포교에 커다란 비중을 둔다. 처음부터 이슬람은 정복을 통해 교세를 넓혔으며, 그리스도교도 그런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드’와 ‘십자군’이라는 평행선상에 놓인 개념은 서로 유사할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주요 종교들과 이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문명들이 역사를 순환적이거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함께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영토보다는 무기 확산, 인권과 민주주의, 원유 지배권, 이민, 이슬람 테러주의, 서구의 간섭 같은 문명 사이의 포괄적 쟁점에서 표출된다.
서구가 직면한 근본 문제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자신들 문화의 우월성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들 힘의 열세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문제를 우려하는 쪽은 CIA나 미 국방부가 아니라 서구다. 자기 문화의 보편성을 철석같이 믿고 비록 쇠퇴하고는 있지만 자기들은 아직도 우월하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할 사명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에 불을 지르는 핵심 성분이다.
경제성장은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들 사이에서 정치적 불안을 낳아 국가 간, 지역 간 세력균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경제 교류는 인적 접촉을 가져올 뿐이지 화합을 낳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 교류는 민족 간의 차이점에 대한 깊은 각성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국가 간의 무역은 이익만이 아니라 갈등도 낳는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타당하다면, 아시아의 경제적 서광은 아시아의 정치적 그늘, 곧 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아시아 국가들의 점증하는 자신감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국제정치를 교란시킨다. 첫째, 경제발전은 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 강화를 가능케하여 미래 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을 높이고 냉전 시대에 억눌려 있던 쟁점과 대결 의식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며 그 결과 이 지역의 분쟁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높인다. 둘째, 경제발전은 아시아 국가들과 서구 특히 미국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 싸움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킨다. 셋째, 아시아 최대의 강국인 중국의 경제성장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해 전통적 헤게모니를 재주장하고 나설 가능성을 높인다.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편승’하여 이러한 발전에 합류하거나 ‘견제’를 추구해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서구가 힘을 행사하던 지난 몇 세기 동안 중요한 국제관계는 서구의 주요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펼치는 게임이었고, 18세기에 들어와 부분적으로 러시아가,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은 거대한 분쟁과 협력의 중심무대였고, 냉전 시대에도 초강대국의 대결은 주로 유럽의 심장부에서 이루어졌다. 탈냉전 세계의 중요한 국제관계의 경연장이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다. 아시아는 문명의 가마솥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6대 문명(일본, 중화, 정교, 불교, 이슬람교, 서구)에 속한 국가들이 있으며, 남아시아에는 추가로 힌두 문명이 있다. 네 문명의 핵심국인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동아시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고, 남아시아에는 인도가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 점점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중진국들이 존재한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 전세에 비교할 수 있는 국제관계의 대단히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고, 이 다극적 상황에서 불확실성과 가변성 또한 커졌다.
동아시아는 복수의 문명, 복수의 축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유럽과 대조되며 경제적, 정치적 차이는 이 대조를 한층 부각시킨다. 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안정된 민주제도를 운영하고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발전의 수준이 매우 높다.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에는 하나의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 불안정한 몇몇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들, 아직도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4~5개 국가, 군부 정권, 개인 독재, 일당 지배 체제 국가들이 혼재한다. 일본과 싱가포르에서 베트남과 북한에 일기까지 경제발전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시장 경제와 경제 개방이 대세이긴 하지만, 경제 체제의 성격은 북한의 명령 경제에서 시작해서 국가 규제와 민간 기업의 다양한 혼합을 거쳐 홍콩 같은 자유방임 체계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모든 전쟁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기존의 상식이다. 이 상식은 단층선 전쟁에도 들어맞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단층선 분쟁은 일정 기간 동안 완전히 중단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종식되는 경우는 드물다. 단층선 전쟁은 갖은 휴전과 정전이 특징이지만, 핵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포괄적 평화협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단층선 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지속되는 적대관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걸핏하면 재발한다. 단층선 분쟁은 또 두 사회의 지리적 근접성, 상이한 종교와 문화, 이질적 사회구조,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회가 성숙해져 저변의 갈등이 사라질 수도 있다. 혹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절멸시켜 분쟁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신속하게 제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닌 한 분쟁은 지속되며 폭력 사태는 거듭 재연된다. 단층선 전쟁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단층선 분쟁은 영원히 이어진다.
단층선 전쟁을 중지시키는 합의에 잠정적으로라도 도달하려면 그 합의 내용에 1순위 당사자들의 지역적 세력관계와 2, 3순위 국가들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2순위 관련국과 대개 문명의 핵심국인 3순위 관련국은 가능성 있는 분쟁 종식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의 이해관계나 현실적 안보 필요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분쟁을 종식시키고 지역 분쟁이 지구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세계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층선 전쟁은 밑에서 끓어 오르지만 단층선 평화는 위에서 똑똑 떨어진다.
문명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은 개연성 높은 사태는 많아도 피할 길 없는 숙명적 사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명은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서구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외부의 도전 세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신의 내부적 쇠락 과정을 중단시키고 역전시킬 만한 능력이 과연 있는가의 여부다. 서구는 갱생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되는 내부의 부식으로 경제적으로나 인구로나 더 활력 있는 다른 문명들에게 종속당하는 몰락의 과정이 가속화될 것인가?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나 인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윤리 의식의 약화 문화적 쇠락, 정치적 분열이다. 윤리 의식의 약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범죄, 마약 사용, 전반적 폭력 등 반사회적 행동의 증가.
- 이혼율, 문맹, 10대 임신, 편부모 가정의 증가를 동반하는 가정의 와해.
- 자발적 결사에 참여하려는 정신과 거기서 싹트는 개인 상호 간의 신뢰를 뜻하는 ‘사회적 자본’의 약화.
- ‘노동 윤리’의 전반적 약화와 개인적 몰입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
- 미국의 경우 학력 수준의 저하로 나타나는, 학습 활동과 지적 활동에 대한 열의 감퇴.
결국, 앞으로 대규모의 문명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핵심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이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남다른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핵심국이 다른 문명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제의 원칙은 다문명, 다극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으뜸가는 전제 조건이다.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은 핵심국들끼리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 간의 단층선 전쟁을 억제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 타협을 해야 한다는 공동 중재의 원칙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공동의 문화에 대한 일체감보다는 공동의 적(또는 악)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 사회는 그것이 인간적이므로 보편적이며, 그것이 사회이므로 특수하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진도 하지만 주로 혼자서 걸어간다. 하지만 ‘가느다란’ 최소한의 윤리는 공통된 인간 조건에서 유래하며 ‘보편적 성향’은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 문화적 공존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뜻 보면 보편적일 듯싶은 한 문명의 특성을 부각시키기보다 대부분의 문명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길이다. 다문명적 세계에서는 보편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며 동질성을 모색하는 것이 건설적인 방안이다.
만일 인류가 보편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 문명은 이 동질성의 심화와 확대 과정에서 출현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제의 원칙과 중재의 원칙 이외에도 다문명 세계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동질성의 원칙이다. 어떤 문명에서 살고 있든 인간은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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