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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8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 시집

P. G. 해머튼은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기가 길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지만...

 

세상이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들었는지,

세상은 시인을 왜 그리 빨리 보냈는지,

스물 아홉, 그 짧은 청춘의 끝자락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詩作 메모

 

 

 

오래 된 書籍(서책)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서표)을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포도밭 묘지 2 / 기형도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내 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짖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비가2 - 붉은 달 /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세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있을 그대.

잘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턱턱, 짧은 숨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소리의 뼈 / 기형도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 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아트>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김병옥 역)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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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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