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 풍요, 연결이 삶의 질과 정서적 빈곤을 가져오기도 한다.
가끔은 디스플레이, 네트웍과의 단절... 그리고 먹는것과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한도 해보고, 불편하더라도 몸을 써보는 삶이 마음을 풍요롭게하고 자연을 덜 훼손할 수 있는 삶의 한 방편이다.
[본문 발췌]
존재는 기능주의적 근거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 재즈가 뭐냐고 묻는 질문에 루이 암스트롱이 대답했듯이 "굳이 물어봐야 한다면 당신은 어차피 알 수 없다."
젊음이 우리 사이에 회자될 경우 대부분 과거의 특정 시기를 뜻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실과 결부된다. 사무엘 울만은 젊음이란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일찍이 얘기했건만,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들어 가는 어른들에게도 이런 지혜는 이제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듯하다. 젊음이 요원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가 젊음에 둘러싸여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것은 많다. 새로운 재료와 기획으로 만들어진 사물, 사업, 사건은 많다. 그러나 지금 새롭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미 내일이면 하루만큼 낡은 것이 된다. 새로움을 생산하는 만큼, 딱 그만큼 낡음도 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잠시만 유지되는 순간적인 개념과는 정반대로, 퍽 지속될 수 있어야 비로소 젊은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젊음은 생명의 생리이다. 적어도 의욕이 넘치고, 풋풋하고, 왕성한 생명의 생리이다. 새것이 강조되기에 실은 노쇠와 권태로 둘러싸인 채 사는 우리들에게 젊다는 것의 진정한 에너지와 개념이 와 닿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열대 우림의 넘쳐 나는 젊음 한가운데에있으면 그 어떤 노화 작용도 영원히 멈추고 생명이 끝내 승리할 것만 같다.
생활을 충분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충분히 먼 곳으로 가야 한다. 가까우면 이미 정의상 제대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먼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르진 않지만, 정말로 다른 곳이 가까운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장거리 이동에 항공기 이용이 일상화되면서부터 멀리 간다는 것은 거리가 아닌 시간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실제 이동하는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길어졌지만 여행자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기다림, 기다림, 끝도 없는 기다림이다. 창문 바깥을 쳐다봐도 구름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뿐 내가 전진하고 있음을 상대적으로 알려 줄 움직이는 물체가 없다. 정처 없이 공중에 떠다니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정신 차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그것마저 비행기에서 내려 천편일률적으로 생긴 공항을 빠져나와야 숨통이 트듯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에 소요되는 시간뿐 아니라 거리가 중요한 이유는 공간적 경험이 보다 정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떻게든 보내고 나면 사라지고, 심지어는 '죽여'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간은 몸으로 직접 통과해야 하며 집이 여기인 한, 간 만큼 똑같이 되짚어 돌아와야 한다. 잠을 자 버리거나 눈 감고 외면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적 경험에 비해, 공간적 경험은 보다 확실한 물리적 실재성을 지닌다. 목적지가 저 산 꼭대기라면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에서 그곳까지 한 뼘 한 뼘의 대지를 전부 더듬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디디다 보면 어느 정도의 힘을 들여야 어느 정도 진척되는지 체험할 수 있다. 내 보폭은 얼마인지, 팔을 쭉 뻗으면 어디까지 닿는지 몸소 측정한다. 돌을 밟을까 흙을 밟을까 그때그때 헤아리고 순간순간 결정한다. 솔방울의 알참, 새소리의 액체성이 똑똑히 오감을 타고 들어온다. 인식과 감흥은 촘촘해진다. 그리고 경험은 완전해진다. 권태와 무의미의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다.
화면이 지배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여기 사람들처럼 눈앞의 세계에 충실했다. 빈 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고,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본 책은 또 보고,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는 주워서 돌리고 쓰다듬었다. 앞마당에 부는 산들바람에 내 다리털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눈을 들어 야자나무 잎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감탄했다. 끊임없는 벌레의 이민 행려을 지켜보았고, 음식을 바라보며 식사했다. 고양이의 기지개를 따라 하고, 물고기가 첨벙거리며 남긴 동심원을 따라갔다. 햇빛이 빨래를 말리는 속도를 목격하고, 달빛으로 박쥐 날개의 실루엣을 분간했다. 나는 진짜 삼을 살았다. 현실은 충분했다. 증강 현실도, 가상현실도, 강화 현실도 모두 불필요했다. 풍요와 연결 속의 빈곤 대신 제한과 단절 속의 자족을 누렸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숲. 숲을 가능케 하고, 숲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비.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 침투. 지구상의 가장 완벽한 자연 현상. 정글, 밀림, 열대 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생물이 넘치는 비숲에는 오히려 인간이 적다. 아니 인간이 적어야만 여전히 비숲으로 존속한다. 그저 생물 다양성에 하나의 종을 추가하는 정도로만 존재감이 그쳐야 그것이 비숲이다. 하지만 이제 지구 어디에서도 온전한 처녀림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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