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장애물과 실패, 오류가 있더라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 진보의 시작이다.

 

 

 

진보 (進步) [명사] 1.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2.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비슷한 말] 개명, 개진, 개화, 향상, 발달, 약진, 진전, 발전

[반대말] 보수, 퇴보

 

(네이버 영어사전) 1.progress,advance, progress,advance   2.[예문] 진보 성향의 단체 a progressive group

 

 

[글과 책 속에 쓰인 '진보'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신영복, <처음처럼>

[창과 문] 창문보다는 문이 더 좋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현장으로 열리는 실천의 시작입니다. 창문이 먼곳을 바라보는 명상의 양지라면 문은 결연히 문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입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진보와 보수는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진보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의 조정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며, 보수는 익숙한 것을 지키려 하다보니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태도를 말한다. 보수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법칙을 인간의 제도에 적용하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틀렸다"고 해야 마땅하다. 현재의 제도는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것이어서 오늘의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신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왜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누구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사회의 공인된 생활양식은 옳은 것, 선한 것, 합당한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토대로 성립한다. 그런데 생활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확신에 찬 진보주의자에게는 우울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베블런의 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편들려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으니 진보주의자들이 그를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내가 진보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진보정치는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에 튼튼하게 닻을 내린 도덕적 이상과 인류에 대한 자비심,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과 겸허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요청한다. 한마디로 줄여서, 진보정치는 자유주의적 기풍과 철학이 필요하다. 이것을 갖추어야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이 대중의 더 큰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과학의 진보는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인 혁명적 변화, 즉 패러다임 전환에 따른다.

 

에러가 지금 당장은 실패로 보일지라도, 진보와 성장, 창조의 길이 된다.

 

진보와 혁신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진보 - 몸이 어떤 장소로 나아가는 진보, 생각이 어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 - 는 매번 촉발되었다가 모면되는 추락의 형태를 취한다. 철학에서건 과학에서건 서양 역사 속에서 진보는 언제나 하나의 확신에서 문제 삼기로, 두 번째 확신과 만회에서 새로운 문제 삼기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철학적 체계, 학문적 이론, 정치적 주장, 미학적 세계 모두 동일한 움직임이 되풀이된다. 넘어뜨리기, 만회하기, 다시 넘어뜨리기, 다시 만회하기, 그러면서 나아간다. 이런 형태의 걷기를 곳곳에서 '진보'라고 부르는 건 우연히 아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은 사실 걷기를 말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걷기'는 Gradus, '걷다'는 Gradere이다. 진보pro-gresus는 나아가게 하는 것,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나 정신적 세계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걷기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인간의 걷기와 깊고도 정확하게 상응한다.

 

철학은 진리를,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나은 것과 선한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하며, 진보를 낳고, 생각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어 더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붙들고 싶어 한다. 어떤 점에서 모든 철학적 사유는 더 이상 썩지 않고 단단히 버티는 요소를 찾는 탐색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한 가지 진실 - 원리, 토대, 본래의 확신 - 을 찾는 일은 걷기를 멈추고 마침내 탄탄한 땅을 닫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여러 세기 동안 철학자들은 오직 언젠가는 멈춰 서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고 걷지 않았을까? 궁극적인 요소 - 플라톤의 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리, 플로티누스의 일자, 테카르트의 코기토, 스피노자의 무한히 무한한 존재 등등 - 에 도달하고자 했던 모든 철학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철학자들은 모든 균형 깨기 시도에도, 모든 부식 시도에도 남아 있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다. 그들은 줄곧 '현자의 돌'을 꿈꿨다. 부수기, 산화시키기, 파괴하기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도에도 온전하게 남을 '현자의 돌'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균형 깨기나 추라그이 위험에 놓이지 않을 진리를 찾는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철학적 사유가 어디를, 어떤 장소를, 어떤 땅을 걷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가장 단순 대답은 이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철학 고유의 요소인 표상 속을 나아간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적 세계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를,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처한 자리를, 우리 존재와 이 세상의 상관관계를 '표상하는' 방식 속을 나아간다.

 

 

류콴홍, <철학우화>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발전'의 의의를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이며, 동시에 사회진보와 인류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했었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는 얼마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요.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개체군에는 또 다른 안정점이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고 때때로 이쪽 안정점에서 저쪽 안정점으로 갑자기 펄쩍 뛰어넘기도 한다. 진보를 향한 진화는 꾸준히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한 안정기에서 다음 안정기로 불연속적인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시무레 미치코, <신들의 마을>

진보하는 과학문명이란 보다 복잡하고 합법적인 야만세계로 역행하는 폭력지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동양의 덕성이 그 체질에 감추고 있는 전제주의와 서구 근대가 기술의 역사 속에서 관철해온 합리주의의 더없이 황폐한 결합에 의해 일본 근대 화학산업은 발전하였고, 이 열도의 골수에 파고든 썩은 종양의 한 부분을 미나마타병 사건은 보여주고 있었다.

 

 

장대익, <다윈의 서재>

진화는 진보가 아니며 다양성의 증가일 뿐. - 스티븐 제이 굴드, <풀하우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맨해튼이 굉장한 도시라는 것 외에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또 있었다. 맨해튼은 진보정치와 진보적 사상의 중심지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온갖 종류의 불평등을 끝장내는 것이다. 또한 노동하는 남녀를 해방시키고 자신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창조적 소동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났던 지식인들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 외의 다른 지역은 무시했다. 또 이곳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하고 고립된 이기주의자에 불과했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빈곤과 전쟁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보'의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하면 할수록 인간은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진실로 인간답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 다시 말하여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정신과 타자에의 능동적인 환대와 같은 오랜 세월 인류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덕행은 극히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 역자후기 중에서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맞춘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조지 버나드 쇼, <혁명가를 위한 격언>, <인간과 초인> 중, 1903년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는 자연에서의 생존 경쟁과 사회에서의 생존 경쟁 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장도 희소한 자원을 두고 경쟁이 계속되는 곳으로, 사람들 역시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진보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법칙을 이용해 인간은 자연을 수정한다. 제 보기 좋을 대로, 혹은 제 살기 편할 대로 뜯어고쳐 인공의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을 억지로 인간에 동화시키는 것을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인간화'라 불렀다. 마르크스 같은 이도 이를 '진보'라 부르며 축성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보기에 자연의 인간화란 결국 '자연의 탈자연화'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자연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게 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마냥 축복이기만 할까?

 

 

고미숙,<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이 세상에 온전한 제도란 불가능하다. 이걸 이루면 저것이 부족해지고, 저걸 보충하면 이것이 모자라게 되는 법. 그것이 인생과 우주의 이치가 아닐지. 그래서 역사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실천이란 어떤 정해진 목표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치 속에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에는 목표도, 방향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거기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진화일 뿐이다. 흔한 속담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오직 '변화'라는 그 사실 자체만이 우리의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되는 이 진보의 시대에,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동차가 지금 상태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요"다. 전기 시대에 바퀴 자체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여자 타자수가 비즈니스의 세계에 나타난 뒤부터 침 뱉는 통이 없어졌듯이 자동차도 확실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자동차 산업을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 왔는가? 단지 바퀴가 쓸모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바퀴의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나 인쇄술처럼, 바퀴도 문화 속에서 부수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광고는, 시끄럽게 같은 내용을 연속적으로 되풀이하는 반복 속에서 아주 작은 핵심적 내용이나 패턴이 서서히 그 자신을 드러내개 된다는 매우 진보된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광고는 시끄러움의 원리를 설득이라는 지평까지 밀고 나간다. 그것은 마치 세뇌시키는 과정과 흡사하다. 무의식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는 이 심층적 원리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명확하게 짜 놓은 정강들은 뒷전이고 대신에 후보자들의 품성을 강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정확히 그 반대다. 그러나 일상의 삶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그 둘은 확연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가 됐든 선거에서 이긴다면 직면할 공산이 큰 결정적인 쟁점들에 관해 해당 후보자가 전반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싶다. 기후 변화, 외교, 정치/경제적 불평등, 개인적 권리 등에 관해 후보자가 취하는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나 일단 선출되고 나면 그 사람은 분명 더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풍경을 상대해야하고 그 풍경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방향성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건전하다 하더라도 그 이싱의 것을 요구받을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근본적인 덕들, 즉 어려운 상황에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용기, 과도함의 고삐를 죄는 절제, 자신의 결정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하는 정의감, 그리고 당연히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불확실한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적인 지혜가 될 것이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 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 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이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 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 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체제도가 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 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회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 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20세기 정치의 장에서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 여러 정치체제가 각각의 이상을 앞세워 불꽃 튀는 공방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든 보수든, 또는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간에 30년, 40년 후 인류가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정치가와 유권자는 세상의 변화에서 소외되고 과학기술만 극적인 발전을 거듭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1장 인류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유발 하라리)>

 

정치인들은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중도에 위치해 있으면 당선되기 어려우니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웁니다. 공화당원은 민주당원보다 훨씬 일찍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화당은 민주당 텃밭에서 세력을 키우려고 애쓰기보다 공화당이 이길 확률이 높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전력을 쏟아부은 것이죠.- <6장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조앤 윌리엄스)>

 

 

홍익희, <유대인 이야기>

포퍼는 "인류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에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이 균형을 이룬다.'는 기존의 정설을 거부한 소로스의 투자 철학은 포퍼 교수의 이 같은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소로스는 "수요와 공급이 주어졌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시장 참여자들의 생각과 시장의 움직임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적인, 곧 재귀적인 관계를 갖는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심리학을 경제학에 접목해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는 행동경제학은 고전학파 이론의 가정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합리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행동의 오류성을 지적한 조지 소로스는 행동경제학을 몸에 체화한 투자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그래서 방송을 오래하는 전문적인 방송인들도 두 유형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한 부류는 어떻게든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이다. 자신의 노력과 결과 사이에서 작은 인과관계라도 찾아내면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더 잘 통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류가 선택해온 길이다. 합리성을 믿고, 과학적 진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바로 근대성이다. 또다른 부류는 바로 무조건적 믿음에 의탁하는 이들이다. 유능하고 신망이 있는 프로듀서와 그 팀을 믿는 것이다. '아무개 피디라면 믿을 수 있어'라는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인간들을 지배하던 태도, 다시 말해 절대적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E. F. 슈마허 외 지음, <자발적 가난>

대부분의 사치, 이른바 삶의 안락함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닐뿐더러 인류 진보의 명백한 장애물이다. 사치와 안락함에 지혜로이 대처한 이들은 가난한 자들보다 더 청빈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고대 그리스, 중국, 인도, 페르시아의 현인들은 겉으로 부유한 자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으며 내면이 부유한 사람보다 더 부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발적 가난을 통해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공정하고 지혜로운 삶의 관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발적 가난은 고통스러운 절제와 무분별한 사치의 중간쯤에 있는 즐겁고 진보적이고 소박한 삶의 형태이기도 하니까.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은 과학과 기술의 근본적인 재편성을 포함한다. 여기서 과학과 기술은 지혜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야 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구조 자체로 끌어들여야 한다.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사회구조와 인간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과학적, 기술적 '해결책'은, 아무리 훌륭하게 고안된 것이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혜택(benefit)도 없는 것이다. 대형 기계화는 경제력이 점점 더 집중되고 환경이 점점 더 파괴되는 상황을 동반하는 것이므로,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혜에 대한 하나의 부정이다. 지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유기적인 것, 부드러운 것, 비폭력적인 것,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향해 새롭게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흔히 말해지듯이, 평화는 분할 불가능한(indivisible) 것이다. 그렇다면 무자비한 과학과 폭력적인 기술 위에서 어떻게 평화가 확보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는 파괴적인 움직임을 역전시키는 발명이나 기계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술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필자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산 방법과 장비를 요구한다고 답변하고자 한다. 이러한 세 가지 특성으로부터 비폭력이 생겨나고, 영속성이 보장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출현한다. 

  •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값이 싸며,

  • 소규모 이용에 적합하고,

  • 인간의 창조적 욕구에 부합될 수 있는 것.

 

과학이 점점 더 폭력적인 방향으로 진보하면서 마침내 핵분열에 도달하고 나서 핵융합으로 나아가는 것은 앞으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낳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방향이 운명처럼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좀더 활기차게 고양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는 바, 그것은 바로 신에게서 물려받은 거대하면서도 경이롭고 이해하기 힘든 자연체계 - 인간은 이것의 일부일 뿐, 결코 이것을 만든 존재가 결코 아니다 - 와 협동할 수 있는, 온갖 비폭력적이면서 조화롭고 조직적인 방법을 의식적으로 탐구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집중을 과학적으로 측정한 값은 감각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과 온도계의 눈금이 맞지 않듯이. 그러나 계측값은 감각보다 더욱 객관적이며 정확한 근거와 기준이 된다. 감각과 달리 대량으로 기록하여 참고할 수 있고, 그 변화량과 법칙성을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 새로운 기준(계측값)이 확립되면, 미분해서 변화를 정의하거나 적분해서 축적을 정의하거나 기하학적인 구조를 정량화할 수 있다. 이는 과학적인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과학이 진보하는 속도는 한층 빨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측값을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하면 누구나 그 개념을 공유할 수 있고 그것에 입각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온도계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계측값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감각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과학적 기반이 있는 기준을 찾아내고 그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관을 세우는 일이다.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소와 '차가운 악'의 파괴행각을 전세계 공동체의 양심과 의식에 일깨워주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진보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현대 축산 단지는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으며, 지구의 일부분을 인간, 동물, 식물이 거주할 수 없는 메마른 황무지로 변화시켰다. 합리성과 객관성의 이름으로 축산 단지는 자연과 인간의 노동력을 공개된 시장에서 조직과 교환이 가능한 상업적 자원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시장 효용성의 이름으로 축산 단지는 소와 육가공 공장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들을 생산과 소비의 단위, 어떤 본질적이거나 신성한 가치를 상실해 버린 효용과 목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첨단 기술 비육장, 조합 공정과 패스트푸드 매장의 속도에 적합하도록 조정된 텅 빈 껍질과 같은 존재로 말이다.

 

 

박영숙, 제롬 글렌, <세계미래보고서 2019>

급진적이고 흥미진진한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개인에게나, 인류 전체에게나 진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연료가 된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제 정보화 시대를 넘어 창의력과 상상력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부정가치는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첫째는 가치가 아닌 선을 관심사로 삼는 공동체를 서술할 때도 '가치' 측정이 목적인 경제적 범주를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경우입니다. 선은 일정 장소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여러 요소의 혼합체와 지역적 '이념'에 - 팔라셀수스와 다마노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 속하는 반면, 가치는 과학이라는 추상적 이념에 어울리는 수치입니다. 부정가치가 눈에 띄지 않는 두 번째 원인은 진보가 이루어질 거라는 강박적 확신입니다. 공생을 원시 경제로 격하하고 전통을 혐오하는 행위에 타 문화의 진보에 헌신한다는 그럴 듯한 허울을 입히지만, 사실은 과거를 근시안적으로 파괴하도록 부추길 뿐입니다. 전통을 폐기의 역사적 표현으로 보고 과거의 쓰레기와 함께 버려야 하는 대사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20세기의 진보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경제는 돈의 흐름을 증가시키는 하나의 장치 같았습니다. 에너지, 정보, 돈 등이 모두 똑같은 규칙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각각에 엔트로피 법칙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생산 설비 개발, 숙련 노동자의 증가, 저축 증대 등을 '성장'의 구체적 모습으로 보았고, 성장하면 조만간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손에 넣게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돈의 흐름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더욱 해체되고 있는데도 더 많은 사람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려면 근본적으로 돈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렇게 널리 퍼진 돈의 흐름에 따르는 사회 해체를 표현할 수 있는 솔깃한 유비로 보였습니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재벌권력 또는 넓게 말해 자본권력과 싸우지 않으면서 단순히 현재의 정부권력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진보 정치를 다 한다고 자부하는 것은 실은 세상을 속이는 것이다. 마치 왕조시대 양반들 사이의 권력다툼이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여당과 야당의 권력 다툼 역시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정부가 아니라 기업을 민주화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진보적 과제인 것이다. 

 

노예로서 지배자와 싸우는 것은 쉬워도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서 책임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정치권 언저리에서 떠돌았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집단적 세력 강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정치는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체로서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발터 벤야민

 

 

최윤식/최현식, <제4의 물결이 온다>

산업의 대위기나 국가의 위기는 큰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패러다임을 바꾸고, 문명의 위대한 진보를 낳는 위대한 기회는 기존 패러다임 위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위대한 성공의 결과물인 독점이 붕괴하면서 탄생한다. 기존 질서에 따라 만들어진 옛 경계가 파괴되고, 기존 산업이 만들어놓은 독점시장이 붕괴하면 산업과 시장이 크게 흔들리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구세대에 속하는 기존 산업의 붕괴와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시장의 혼란은 기존의 시장 참가자들에게도 큰 변화를 강제한다. 다시 번영의 씨앗이 움트며 새로운 번영의 사이클이 시작된다. 그러나 새로운 번영의 사이클은 같은 나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대륙, 새로운 기업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인류의 생활이 모든 시기에 더 향상된다는, 모든 세대가 앞선 세대를 완전히 능가한다는, 따라서 앞선 세대는 단지 후속하는 세대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를 수용한다면, 신은 불공평한 존재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세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후속하는 세대의 준비 단계로만 의미를 가질 뿐이어서 신성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시대는 신과 직접 접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시대의 가치는 그 시대에서 출현한 무엇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실존 그 자체, 그 시대 자체의 고유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역사를 서술할 때 개별적인 생애 대한 관찰이 전적으로 고유한 매력을 가지게 된다. 모든 시기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34~35쪽

 

역사를 단 하나의 일관성 있는 진화 과정으로 간주하는 것은 헤겔의 사상에서 유래했으며 마르크스가 상식으로 만들었다. 두 사상가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사회는 노예 제도와 자급자족 농업에 기초한 단순한 부족 사회에서 여러 종류의 신권 제도, 군주 제도, 봉건적인 귀족 제도를 거쳐 자유민주주의와 기술 본위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발전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의 진화가 한없이 계속되는 게 아니라 인류가 가장 심오하고 근본적인 동경을 충족해 주는 사회를 실현했을 때 종말을 맞으리라고 믿었다. 둘 모두 '역사의 종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 사회 진화의 종말은 더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의 근거를 이루는 여러 원리나 제도가 더는 진보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역사의 종말> 8~9쪽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비창조적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 '미메시스(mimesis)'라고 한다.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뜻이다. 창조적 소수자가 미메시스를 창출하면 사회는 응전에 성공하고 문명은 성장한다. 반면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비창조적 다수자가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런 과정을 '네메시스(nemesis)'라고 한다. 네메시스는 '화를 내면 비난'한다는 뜻이다.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다수자는 미메시스를 철회하고 면종복배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폭력으로 맞서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화하며, 사회는 응전 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며 문명은 쇠퇴한다.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서양의 직선적인(linear) 관점과 동양의 순환적인(circular) 관점은 장시간에 걸쳐 발생하는 변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양의 유토피아 개념에는 유교 사상이나 고대 중국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

  • 유토피아를 향한 직선적 진보가 가정되어 있다.

  • 일단 도달하면 그 상태는 영원히 지속된다.

  • 운명이나 초인간적인 개입이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

  •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 그리고 유토피아는 인간 본성에 대한 몇 가지 극단적인 가정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특징은 동양인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는 여러 면에서 반대된다. 동양인들은 진보보다는 '회귀'를 추구하고,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용'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양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하며, 인간의 소망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광수, <네루의 세계사편력 다시 읽기>

네루가 보는 역사의 주제는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진보입니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거나, 낡은 지식이 반박되거나,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단순히 쓰레기로 변하여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식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변 사물을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식으로 진보한다는 얘기다. 새로운 세계관, 사실, 이론이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지구의 곡면을 생각해보면, 새로운 이론이 나올 때마다 우리 발밑의 땅이 구부러진 정도가 더 정확해졌다. 좀 더 복잡한 예를 들자면, 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턴의 이론을 흡수한 뒤 이를 더욱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은 것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아직도 일상 생활에서 뉴턴 역학을 이용하지만(사실 거의 항상 그렇다) 아인슈타인은 극단의 세계, 이를테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운동할 경우 등의 상태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높여놓았다.

 

개념의 발견이든,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책이든 새로운 것은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등장하게 되어 있다. 세상은 대부분 이렇게 돌아간다. 과학적 개념은 서로에게 의지하여 발전하면서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 지식을 낳고 새로운 해결책의 기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의 창출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일정 수준의 지식이 이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희병과 매기는 기술 발전의 정도가 기존 지식의 양에 비례함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기술을 조금이라도 진보시키는 기존의 방법, 개념 등이 많을수록 그 기술이 성장할 가능성은 커진다. ... 과학도 그렇지만 기술도 근본적으로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이러한 성장이 이제까지 성취한 바에 의존할 때 지수함수적으로 두 배가 되는 것을 계산하기 쉽다. 지식의 축적이라는 기본 개념을 활용하여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수학적 모델을 통해 이를 설명해왔다. 그러므로 지수함수적 성장이 자기실현 가설은 아니지만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 사이에는 분명히 피드백이 존재한다. 주춧돌 역할을 하는 과학 기술 지식이 많을수록 새로운 기술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이것이야말로 과학 혁명의 핵심이다. 즉 기존 이론이 새로운 관찰 결과와 발견에 의해 무너진다는 원칙에 지식의 진보가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러한 진보 방식 속에서는 오류가 사람들을 진실로부터 멀리 떼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오류는 사람들을 조금씩 진실 쪽으로 끌어다 놓는다." - 캐서린 슐츠, <오류의 인문학>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전쟁이나 뜻하지 않은 재앙만 빼놓으면, 미래에는 기계에 의한 진보의 행진이 갈수록 빨라질 것으로만 보인다는 식이다. 즉, 기계가 일을 덜어주고 생각을 덜어주고 고통을 덜어주며, 위생과 효율과 조직이 향상되며, 그럴수록 더 많은 기계가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적절히 풍자한 세계에, 이제는 친숙한 웰스의 유토피아, 즉 작고 뚱뚱한 사람들의 세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그들의 공상에 나오는 작고 뚱뚱한 사람들은 뚱뚱하지도 작지도 않다. 그보다는 '신 같은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모든 기계적 진보는 점점 더 효율을 추구하며, 결국엔 '아무 흠도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그러나 아무 흠도 없는 세상에서는, 웰스 씨가 '신'적이라 여기는 많은 자질이 가축이 귀를 움직일 줄 아는 능력만큼이나 무가치할 것이다. 웰스의 유토피아 소설 <신같은 인간Men Like Gods>이나 <꿈The Dream>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를테면 용감하고, 관대하고, 튼튼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물리적인 위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기계에 의한 진보는 분명히 위험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육체적 용기가 남아 있기 쉬울까? 그것이 '가능하긴' 할까? 그리고 육체노동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육체적 힘이 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아무 흠도 없는 세상에서는 충실이니 아량이니 하는 것들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꿈>이나 <신 같은 인간> 같은 책에서 힘이나 용기나 아량 등과 같은 자질이 살아 있는 것은 그것들이 매력적인 특성이며 온전한 인간에게 필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이를테면 용기를 기르기 위해 인위적인 위험을 만들어내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아령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진보라는 관념에 대체로 나타나는 대단한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환경을 안전하고 편하게는 하는 것인데, 정작 거기 사는 사람은 자신을 용감하고 강인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동시에 뒤로 절박하게 물러나려고 하는 꼴이다. 이는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 중세의 사슬 갑옷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하여 중세 라틴어로 대화를 하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니 결국 진보의 옹호자가 시대착오의 옹호자가 되는 셈이다.

 

기계는 보다 효율적이 됨으로써, 즉 보다 결함 없는 것이 됨으로써 진화한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목표는 결함 없는 세상인 것이다(결함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일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다).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노고와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좌절시킨다고 하겠다. 그것은 눈과 손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한다. '진보'의 사도들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긴지를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대체 손은 왜 쓴단 말인가? 코를 풀거나 연필을 깍는 데도 손을 쓸 필요가 있나? 어깨에 쇠와 고무로 만든 무슨 장치를 달아 쓰면 될 테고, 그러면 팔은 뼈와 가죽만 남은 줄기처럼 시들어버릴 것 아닌가?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진보'가 암시하는 목표는 '딱히' 병 속에 든 뇌는 아닐지 모르나, 아무튼 편함과 무기력이 지배하는 인간 이하의 무시무시한 수렁일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러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말과 '사회주의'라는 말이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계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은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당연시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언제나 기계화, 합리화, 근대화에 호의적이거나, 적어도 호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회주의가 대체로 기계적 진보라는 관념과 결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단순히 필요한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거의 일종의 종교로서 그렇다는 점이다. ... 카렐 차페크는 <R.U.R>의 무시무시한 결말에서 그런 점을 충실히 드러내는데, 로봇들이 마지막 남은 인류를 죽인 다음에 "집을 많이 짓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그냥 짓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어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똥더미 속에 감춰져버린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지적 생활의 정신적 기반은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매우 독특해서 정답은 없습니다. 참고서도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즉 독창성입니다. 자기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훈련을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독창적인 지적 훈련은 상황에 따라, 나의 성장속도에 따라 행동규범에 변화를 줍니다. 마치 진보적 민주국가에서 법률이 끊임없이 개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우리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문학적 장점을 지닌 책은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보인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을 무시하는 말이다. 역사를 통틀어 지금과 같은 진보 대 반동의 투쟁은 언제나 있어왔으며, 어느 시대든 최고의 양서들은 항상 다양한 관점을(다른 것들에 비해 명백히 잘못된 관점들까짇) 반영해왔던 것이다. 어느 작가가 선전원 노릇을 하는 한, 우리가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선은 그가 자신이 하는 말을 진정으로 믿을 것, 그리고 심하게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을 것 정도다. ...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과학은 발달할 수 있어도 예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공통적인 것이 독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난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이러한 신고전주의적 세계관이 우리의 세계관과 몇 광년은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면, 부분적으로는 두 관념 사이에 낭만주의가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한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고, 변화란 대체로 겁내기보다는 환영해야 할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세력을 떨쳐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이미지에 따라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예지력입니다. 그것은 시뿐 아니라 정치 혁명에도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이 새롭게 강조됩니다. 이제 인간은 늘 과오에 빠져들기 쉽고 확고한 권위의 호된 질책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결함 많은 피조물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근원은 무한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열망과 분투는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진정한 집은 영원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너그러운 신뢰를 키워야 합니다. 열정과 애정은 대체로 온유한 것이지요. 냉정한 이성과 달리, 열정과 애정은 우리를 자연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묶어줍니다. 그것은 인위적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번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참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노예처럼 과거를 모방하지 않고, 풍부하고 낯선 것을 탄생시킵니다.

 

 

유시민, <표현의 기술>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뻔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시느이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검토하고 그걸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반드시 현재의 가치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혈을 기울여 현재의 가치관을 분석하고, 그 안에 있는 오류와 편견을 들춰내고, 그것이 어째서 세상과 조화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무지가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국기행>

과학은 한때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이 궁핍과 열정과 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 정신적 고뇌와 번민을 해결해 주는 처방전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고, 과학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야만주의에 봉사하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도덕적인 무기가 되어 버렸다. 각종 형태의 야만주의가 끔찍하면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더 과학적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쌓여 가는 시체 더미들 속에서 과학의 도덕적 파산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과학과 도덕이 사이좋게 병진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말 끔찍한 일은 과학이 발달하는 것에 반비레하여 도덕이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마침내 원시적 야수의 상태에 이르게 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적 진보가 현대 세계의 가장 위협적인 신화로 전락한 것이다.

 

 

더글러스 호프스태더,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명확성과 진보의 주요 원천이며,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과거에 수학에서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수학자들은 즉시 모순을 야기한 체계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체계에서 벗어나, 그 체계에 대해서 추론하고, 체계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모순의 발견과 수리는 수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고 일련의 오류 출발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

 

 

팀 페리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려고 한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 맞추려는 노력을 관찰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조지 버나드 쇼, <혁명자를 위한 좌우명>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의'와 '에의' '으로의' '에서의' '에 있어서의' '에로의' '으로부터의' 같은 일본식 조사는 주로 글에서 볼 수 있다. 말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너무나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못난 글을 쓴다. '민중의 주인 된 삶' '문학에의 초대' '고향으로의 귀향' '급변하는 사회에 있어서의 문학의 영원성' '냉전 체제로의 회귀'와 같이 일본말 조사를 따라 쓴 글은 학술 논문부터 문학평론, 신문 기사, 방송 리포트, 여성잡지를 가릴 것 없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미디어에 널려 있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산업화세력을 보수, 민주화세력을 진보라고 할 경우 대한민국 국민은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한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빨랐던 탓에 생긴 현상이다. 서유럽에서는 300여년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래서 절충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큰 차이가 세대 대립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과학은 더 이상 정적이고 초시간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는 것이 되었다. 과학에서의 진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증했고 보완했다. ... 라이엘이 지질학에서 수행한 것과 다윈이 생물학에서 수행한 것은 이제 천문학에서도 수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천문학은 우주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다루는 과학이 되었다; 게다가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조사한다는 것은 사실(fact)이 아니라 사건(event)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은 우리의 어려움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란 투쟁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의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건 나쁘다고 판단하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 그러나 간접적인 경우보다는 직접적인 경우가 더 많은데 - 다른 집단들을 희생시킨 어떤 집단들이 성취한다. 패배자들은 대가를 치른다. 재난은 역사에 고유한 것이다. 역사의 모든 위대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승리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있다.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어떤 이들이 보다 큰 행복을 타인의 희생과 견주어볼 수 있게 하는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런 식의 비교 검토는 있어야 한다. 이는 오로지 역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때때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경우보다 더 자주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일에, 혹은 어쩌면 선을 낳을지도 모를 악을 행해야 하는 일에 불가피하게 말려들고 있다. 역사에서는 이 문제가 '진보의 비용'이라든가 '혁명의 대가'라는 특별한 제목 아래 종종 토의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베이컨이 <혁신론(On Innovations)>이라는 논설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습의 완강한 유지는 혁신만큼이나 난폭한 것이다.' 특권이 없는 사람들이 치러야 할 보수(保守)의 비용은 특권을 빼앗긴 자들이 치러야 할 혁신의 비용만큼이나 크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재난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모든 통치형태에 잠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급진적인 것만큼이나 보수적인 교리이다. 존슨(1709-1784, 영국의 문학자) 박사는 더 작은 악이라는 논거를 거침없이 내세워 현존하는 불평등의 존속을 정당화했다. "보편적인 평등 상태에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터이므로, 그것보다는 누군가가 불행한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때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 유명한 엥겔스의 화려한 글은 기분 나쁠 만큼 적절하다. "역사는 모든 여신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잔인한 여신일 터이니, 그녀는 전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경제 발전의 시기에도 시체 더미 위로 승리의 전차를 몰아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거의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당하여 내몰리지 않는 한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 용기를 내지 않는다." (1893년 2월 24일자, 다니엘슨(Danielson)에게 보낸 편지.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 Correspondence 1846-95 (1934), p510)

 

역사란 운동이다. 그리고 운동은 비교를 의미한다. 역사가들이 '선'이나 '악'처럼 타협이 불가능한 적대적인 용어보다는 '진보적'이라거나 '반동적'이라는 말과 같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용어로 자신들의 도덕적인 판단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식의 판단은 상이한 사회나 역사적 현상을 어떤 절대적 기준과의 연관 속에서가 아니라 서로 간의 연관 속에서 규정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게다가 절대적이고 역사 외적(extra-historical)이라고 생각되는 가치들을 검토할 때, 우리는 그것들도 역시 실제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정한 시간에 혹은 일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가치나 이상이 출현하는 것은 장소와 시간의 역사적 조건들로 설명할 수 있다. 평등, 자유, 정의, 자연법 등과 같이 절대적이라고 추정되는 것들의 실제적인 내용은 시대 혹은 지역에 따라서 변한다. 모든 집단은 그 자신만의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집단은 낯설고 거북스런 가치의 침입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며, 그런 가치에 대해서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는, 또는 비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아니면 더욱 유치하게는 비영국적이고 비미국적이라는 무례한 형용사들을 가져다붙인다.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역사로부터 유리된 추상적인 기준이나 가치는 추상적인 개인만큼이나 일종의 환상이다.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신념과 우리가 설정하는 판단의 기준은 역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인간 행위의 모든 다른 측면들과 똑같이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완전한 자립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학문은 - 무엇보다도 사회과학은 -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역사는 다른 학문과 구별될 것이다.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 이래, 인간에게 중요한 생물학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획득을 통한 진보는 세대 단위로 측정될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세대의 경험을 축적하여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전시킨다는 데에 있다. 5000년 전의 조상보다 현대인의 두뇌가 더 크지도 않으며 타고난 사고능력이 더 큰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동안 여러 세대의 경험을 습득하여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합체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을 몇 배나 증가시켜왔다. 생물학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획득형질(acquired characteristics)의 전승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바로 그 기초인 것이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가치는 사실에 개입하여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의 가치는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구비하고 있는 장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주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주변 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온 저 주변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의 가치들을 통해서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과장하여 사실과 가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거나 부당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과 가치에 관한 문제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진리(truth)'라는 단어 -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 양쪽에 걸쳐 있는, 그리고 그 양쪽의 요소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단어 - 의 용법이다. 방금 말한 이중성은 영어만의 특이성은 아니다. 라틴계 언어들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단어들, 즉 독일어의 '바르하이트(Wahrheit)'나 러시아어의 '프라우다(prauda)'는 모두 그와 같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떤 언어든지 단순히 사실의 진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가치판단도 아닌, 그 두 가지 요소를 함께 포괄하는 진리라는 이 단어가 필요한 모양이다. 내가 지난주에 런던에 간 것은 하나의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보통 그것을 진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에는 가치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다른 한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선언문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를 언급했을 때, 여러분은 그 말에는 사실에 관한 내용보다 가치에 관한 내용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 때문에 하나의 진리로 간주될 수 있을 그 말의 권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이 양 극단 - 몰가치적인 사실들이라는 북극과 사실들로 전환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가치판단들이라는 남극 - 사이의 어딘가에 역사적 진리의 영역이 놓여 있다. 내가 첫 번째 강연에서 말했듯이,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여러분은 정적인 세계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사실과 가치의 구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적인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 만일 여러분이 낡은 투의 단어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 진보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나는 진보를 '역사서술의 근거가 될 과학적인 가설'이라고 본 액턴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역사외적이고 초이성적인 힘에 과거의 의미를 예속시킴으로써 역사를 신학으로 바꿀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역사를 문학 - 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과거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와 설화들의 묶음 - 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미래의 진보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의 진보에 대한 관심도 이내 포기할 것이다. 내가 첫번째 강연의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사회관을 반영한다. 지금 나는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역사의 미래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밝힘으로써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학문에서든 역사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사에서의 진보는 기존질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고 현존질서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전제들에 대해서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인간들의 그 대담한 자발성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E. F. 슈마허, <굿워크>

'최선'을 쫓느라 '차선' 마저 놓치게 되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과거에 있었던 훌륭한 지식과 장비가 사라져 버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쫓아야 진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은 환영할 만한 것이겠죠. 적어도 그런 흐름이 '최선'을 누릴 형편도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차선'이라도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예일 대학교 경영대학원장을 지낸 제프리 가튼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나는 지도자들에게 가치와 윤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는 많은 교양과목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생활 보호나 유전자 실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런 분야에는 국제적인 관리 체계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 국내적으로도 관리 체계가 거의 없지요. 중국은 어떤 동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유전공학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연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런 활동은 어떤 법적 윤리적 원칙들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할까요? 올바른 원칙들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누가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기술적 진보와 이러한 인간적인 의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요? 당신이 MIT에 들어가서 한 일이라고는 핵물리학을 공부한 게 전부라면 이런 문제를 풀 수 없을 겁니다. 이는 가장 큰 역설입니다. 우리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훨씬 더 광범위한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여러 시스템을 작동하기 위해 과학기술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겠지만, 그 목표를 설정하는 일에서는 다른 유형의 지도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국가 안정을 위한 명목으로 빈부의 차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문명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슬에 묶여 있다. ... 인간은 국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개인 우선' 사상이다. 또한 인간은 항상 서로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그 집합체가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는 국가의 모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제'일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루소는 말했다. 루소가 꼽은 이상형은 고대 그리스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집회에서 투표를 통해 정치를 하고 국가의 규제는 없었던 시대야말로 자연적인 상태이며, 여기에는 불평등도 부자유도 없었다. 즉 국가는 공공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정신의 이러한 측면들이 조성하는 대치 상황은 단지 정상을 둘러싸고 보존과 향상이라는 두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었다. 전자는 원천, 젊고 건강한 상태와 같이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후자는 우리 자신 또는 인류의 완성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목표의 설정에 목말라 있다. 두 가지 종류의 진보가 있는 셈이다. 단어에는 우리가 소리 높여 외쳐대는 시끄러운 미사여구를 모두 녹여내어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 정상이란 단순히 전형적인 것이나 가치 중립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인 평균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건강), 그리고 어떠한 상태여야 하는지(우리가 선택한 운명)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친숙하고 무색무취로 들리는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20세기의 가장 강력한 이념적 도구의 하나로 부상한 이유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설명이 되나. 천문학, 생의학 그리고 생리심리학은 이 모든 기준들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불행히도 점성술, UFO학, 창조 과학,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어떤 기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자연과학은 이론과 증거로 꽉 맞물려 있으며 근대 문명의 기술적 진보에 근간이 되어 왔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과학은 개인의 심리적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으나 기술 발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일과 놀이와 사랑만으로는 인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것만으로는 누릴 가치가 있는 행복을 다 누릴 수 없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면서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용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품격 있는 인생이다.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내는 아름답고 유쾌한 변화를 '진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진보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타파 또는 극복하는 것만이 진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보에 대한 '체제론적 접근법'이다. ... 어떤 사람들은 진보를 불합리한 제도와 물질의 결핍, 낡은 사고방식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존재로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진보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이다. ...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론, 철학,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보주의를 어떤 이론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감정 또는 정신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감정이나 정신적 태도는 상대적이다.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와 다른 감정을 품고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대하는 게 합리적이다. 태도의 차이를 옳고 그름 또는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악의 잣대로 모든 일을 판단하게 되면 자칫 삶을 이념에 종속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좌익 소아병과 극우 맹동주의, 좌익 전체주의, 우익 국가주의는 모두 동일한 원인에서 파생한 이념의 병이다 이 병의 원인은 '불관용'이다.

 

 

토머스 S. 쿤, <과학 혁명의 구조>

나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의 문제들, 즉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과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 등은 실험과학과 이론과학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모두를 차지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과학의 문헌을 모두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반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문제들도 들어 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문제의 풀이는 과학적 활동 전부를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상연구의 진보에 의해서 마련된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압도적 다수는 보통 앞에서 요약한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연구는 여타의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의 실행을 중단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곧이어 실제로 그러한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폐기가 바로 과학혁명이 돌아가는 축이 된다(혁명[revolution]의 중심과 회전[revolution]의 축을 비유적으로 빗대어 쓴 말). 그러나 그런 혁명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는 정상과학적 연구 활동의 총체적인 조망에 관해서 개관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발전은 직선적인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의 변화이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이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진화론과 유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듯이, 과학의 발전도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폭력의 추이 앞에 플러스 부호가 붙느냐 마이너스 부호가 붙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도 관련된다. 사람들은 흔히 생물학에 기초한 인간 본성 이론은 폭력에 대한 숙명론과 결부시키고 마음을 빈 서판으로 보는 이론은 진보와 결부시키지만, 내가 볼 때는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 종이 처음 세상에 등장하여 역사가 시작되었던 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폭력이 증가했다고 믿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세상 때문에 아마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염되었다. 반면 폭력이 감소했다고 믿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는 비록 시작은 초라했으나 문명의 이기 덕분에 고상한 방향으로 나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희망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진보는 사상에 의해 추진되었다. 제도적 폭력을 최소화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구체적인 논증에 의거해서, 또 어떤 진보는 감수성의 변화에 의해 추진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좀 더 공감하기 시작했고, 남들의 괴로움에 더 이상 무감각하지 않았다. 이런 힘이 융합되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생겨났다. 생명과 행복을 모든 가치의 중시에 두는 이데올로기, 이성과 증거를 사용하여 제도를 설계하는 이데올로기. 이런 이데올로기를 휴머니즘(humanism)이나 인권(human rights)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고, 이데올로기가 18세기 후반 서구인의 삶에 갑작스럽게 미친 충격을 인도주의 혁명(Human Revolution)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도 아니고 이분법적 견해의 그 중간도 아니다. '너와 나', '선과 악', '옳고 그름',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견해에 얽매이거나, 그 두 개의 견해를 알맞게 절충하거나, 아니면 두 개의 견해 사이의 그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 중도는 단순히 극단적인 길을 피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오구리 히로시,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진보란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다 정확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을 때 이제까지의 판단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유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원용찬 , <유한계급론>

다윈주의에서 출발한 베불런의 제도 개념과 진화 경제학은 당연히 뉴턴이 가졌던 직선상의 시간관념, 목적론, 필연성을 비판하게 된다. 진화경제학은 사물의 운동변화에 부여되는 애니미즘적인 정령숭배를 부정하고 오직 사실 내용(a matter of fact)에 기초하는 비인격화(impersonal) 과정을 중시한다. 또한 인과 관계가 누적되어 전개되더라도 최종지점이나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 무목적성을 띤다. 모든 변화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 역사는 끊임잆어 최종의 목적을 향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가기도 하고 후퇴할 수도 있으며, 어떤 우연 또는 변이의 발생에 의해 예측 불허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미래 변화의 방향은 불확실하며, 이것은 베블런이 즐겨 쓰는 표현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맹목적(blind) 성향을 지닌다.

 

진보로 가는 길은 느리고 더디지만 퇴행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쉽고 빠르다고 베블런은 지적한다. 새로워서 낯설기만한 생각으로 가는 진보의 길은 힘들지만, 오래 익숙했던 습관을 갖고 과거 출발점으로 역행하는 퇴보는 쉽다. 유한계층의 본성은 보수적이고 역행적일 수밖에 없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주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다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는 확실히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자체가 아니라 보수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경쟁과 적자생존을 예찬하고 정당화하는 그 이론을 싫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로 보았다. 그의 세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진행 중이며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혁명이 필연적이며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소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사람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다른 종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생활도 생존경쟁이며, 따라서 도태적 적응(selective adaptation)의 과정이다. 사회구조의 진화는 제도적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과정이었다. 인간의 제도나 특성과 관련하여 이미 이루어졌거나 진행 중인 진보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 최적의 사고방식(the fittest habits of thought)의 자연선택에 기인하며, 공동체가 성장하고 제도가 변화함에 따라 누진적으로 변천하는 환경에 대한 개인의 강요된 적응 과정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유한계급론>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두뇌 활동이 활발하고 많이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주일 넘게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내 인생은 행복했던 옛날이야기 같았다. 갑자기 나는 돈이 얼마나 중요한 발명품인가를 깨달았다. 인간의 진보와 더불어 자유와 평등의 등장에 필수불가결한 단계였던 것이다. 돈이 없는 사회에서는 절대 권력이 지배하게 될 것이므로 선택의 자유가 없고, 무자비한 힘이 분산될 수 없으므로 평등도 없다. 돈의 힘은 강압이 없이도 조절될 수 있다. 약한 소수 민족인 유대인과 아직 봉건 영주의 발굽 아래 있었던 상인 계급이 은행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던 일을 생각해 보면 돈은 약자들이 고안해 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언제나 돈을 증오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상한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를 기대하고, 공포를 이용해서 권력을 지탱하려다 죽는다. 돈이 지배적인 역할을 멈추는 순간에 자동적인 진보는 그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몰락은 통화의 붕괴로 나타날 것이다. 돈과 이윤의 추구는 사소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동기에 의해서만 활기를 띠게 된다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분투하는 곳에서 영위되는 일상생활은 빈약하고 궁색해지기 십상이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진보는 항상 번영과 함께 빈곤을 낳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지 않던 시대가 언제였는가? 일부 사람들이 전보다 덜 가난해졌다고 해도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돈이 발명된 이래로 모두가 만족할 만큼 풍족한 적은 없었다. 돈이 충분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해도 해마다 수천억 달러가 빈곤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5분의 4가 여전히 부의 15퍼센트만 소유한 반면에 1퍼센트의 부자가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정치적으로 보수든, 진보든 인간 존중과 공생의 의미를 실천하는 쪽에 서겠다는 기준이 중용이다. 그렇게 시대에 따라 사안에 따라 보수도 진보도 될 수 있는 게 중용이다. 모든 일마다 언제나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라면 옳지 않은 일도 지지하게 된다. ... 중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도 마음에 걸릴게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이러한 중용적 태도를 깊게 이해해야 한다. 중용을 지킨다는 건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이해하며 안다는 말과 동일하다. 중용을 이해하면 칭찬이나 비난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니 기뻐하고 들뜨거나 해치려 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때가 아님을 안다. ... 결국 중용이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선택이다. 즉 상식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같다. 이때야 비로소 모든 일에 무리수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거나 주는 일 없이 순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순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 일이야말로 경영자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

 

물질적 진보가 뚜렷이 성취된 곳, 즉 인구가 조밀하고 부가 풍족하며 생산과 교환의 장치가 발달된 곳에는, 빈곤이 가장 심각하고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비자발적 실업이 팽배하고 있다.

 

진보가 갓 시작한 곳, 생산과 교환의 방식이 아직 거칠고 비능률적인 곳, 가장 좋은 집이라 해도 오두막 수준이고 옷감이나 종이의 질이 보잘 것 없고 부자도 매일 열심히 일해야 사는 곳에 한번 가보라. 거기에는 큰 부자도 없지만 동시에 거지도 없다. 사치도 없지만 동시에 절대 빈곤도 없다. 놀면서 편안하게 살거나 매우 잘 사는 사람도 없집만 동시에 누구든지 생계는 꾸릴 수 있고 또 일할 능력과 의사만 있다면 궁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현대의 진보가 이룩하는 모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사치를 조장하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없고 또 이러한 진보는 오래 가지도 못한다.

 

축적된 부가 많기 때문에 부의 소비가 많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축적된 부가 줄어다는 경우뿐이며, 축적된 부의 양이 변하지 않거나 증가하는 곳에서 부를 더 소비하려면 반드시 부의 생산이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여러 사회를 비교해 보거나 한 사회의 여러 시점을 비교해 보면 진보라는 상태는 인구가 증가한다는 특징을 가지며, 동시에 총소비 및 일인당 소비가 증가하고 부의 축적이 증가한다는 특징을 가짐이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느곳에서나 인구 증가는 부의 평균적 생산량의 감소가 아니라 증가를 의미하였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민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진보를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의욕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의 욕구, 지적 본성의 욕구, 정서적 본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의욕이다. 이는 생존하고, 알고, 행동하려는 의욕으로서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의욕이며, 충족할수록 더 커지는 의욕이다.

 

정신은 인간이 전진하는 수단이다. 모든 전진은 정신을 통해 이룩되고 또 새로운 전진을 위한 유리한 기초가 된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 채구를 키울 수는 없지만, 생각을 통해 우주에 대한 지식과 힘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다. 각 세대는 조금밖에 이루지 못하지만 앞 세대의 업적을 계승함으로써 인류의 수준을 점차 높일 수 있다. 마치 산호가 해저에서 다른 세대의 층 위에 자기 세대의 층을 형성하면서 높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정신력은 진보의 동력이며, 인간은 진보에 투입하는 정신력에-지식의 확대, 방법의 개량, 사회 상태의 개선에 투입하는 정신에-비례하여 전진한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대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of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이제 모든 다양성, 모든 전진, 모든 정체, 모든 퇴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보의 법칙이 나왔다. 인간은 같이 모임으로써 진보하며, 서로 협조함으로써 개선에 바칠 수 있는 정신력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하거나 어울림이 조건과 힘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진보 경향은 약화되고 결국에는 반전된다.

 

 

레이 커즈와일, <마음의 탄생>

어떤 기술이 정보기술의 형태로 바뀌는 순간, 가격대비 성능과 용량의 기본적인 지표는 (시간당, 비용당, 또는 그 밖의 자원당) 기하급수적인 궤도를 따라 성장한다. 이러한 궤도는 자신의 토대가 되는 (무어의 법칙과 같은) 구체적인 패러다임조차 넘어선다. 한 시대를 이끌던 패러다임이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때 (예컨대 1950년대, 진공관의 크기와 제조비용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을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고, 이로써 또 다른 진보의 S곡선이 시작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른 다음 S곡선은 정보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속도를 따라 진행된다. 그리하여 컴퓨팅을 지탱하던 1950년대 진공관은, 1960년대 트랜지스터에게 길을 내주었고, 트랜지서터는 집적회로에 길을 내주었다. 1960년대 말 무어의 법칙이 등장하면서 집적회로는 한계를 넘어섰고, 무어의 법칙은 다시 3차원 컴퓨팅에 길을 내주었다.

 

 

가오싱 젠, <창작에 대하여>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현대의 지식은 평균적 건강 수준을 엄청나게 진보시켰지만 동시에, 대도시를 독가스로 전멸시키는 방법도 찾아 냈으니....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어떤 문명이든 인위에서 자연으로 진보하고 의식적으로 소박한 사색과 생활로 회귀할 때까지는 이것을 완벽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어떤 인간이든 현명한 자의 지혜에서 어리석은 자의 지혜로 진전하여 우선 인생의 비극부터 느끼고 다음에 인생의 희극을 느껴 웃는 철학자가 되기까지는 그를 현명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웃을 수 있기 전에 울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각성이 생기고 그 각성에서 온정과 관용을 겸비한 철학자의 홍소가 생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자신의 감수성과 안목, 취향을 좋게 평가하고 상대방의 그것은 좋지 않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편향성을 직시하고 서로의 취향을 좀더 존중하는 데 이르면 우리의 취향은 더욱 발달하고 서로의 관계는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이명옥의 <인생, 그림 앞에 서다>에서 읽은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취향에 관한 철학이다. '자신의 취향은 동일한 취향과 접촉하기 때문에 함양하는 것이고, 또한 이질적인 취향과 만나서 계발되는 것이며, 높은 취향에 매료되기 때문에 향상심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 운명의 7할 이상은 이 취향의 발달로 인한 것이므로, 취향이 고립돼 말라죽게 된다면 세계의 진보는 멈추게 될 것이다.'

 

 

임웅, <새롭지 않은 새로움에게 새로움의 길을 묻다>

우리는 언제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이 두 가지로부터 최고의 장점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진보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지만, 동시에 직관적이고, 사용하기 쉽고, 사용하는 데 즐거운 그러한 제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사용자에게 진정으로 적합한 제품이 되는 것이니까요. 사용자가 제품으로 다가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품이 사용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 2010년 1월,  iPad 제품설명회에서, 스티브 잡스

 

 

자넷 로우,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강의>

모든 기구와 기술이 진보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아주 빨리 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여전히 시장과 좋은 관계에 있고 싶어 한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것은 월스트리트에 투입한 작업의 가치보다 월스트리트에서 더 많이 얻고자 하는 점이다.

 

 

사토 카츠아키, <내가 미래를 앞서가는 이유>

진화가 '필요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가장 강력한 '필요성'은 생존본능입니다. 생사가 걸려 있는 전쟁에서는 가장 강력한 '필요성'이 발생되기 마련이고 그 결과 기술은 비약적으로 진보하게 됩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과학혁명은 되먹임 고리다. 과학이 진보하려면 연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상호 강화에 의존한다. 자원을 제공하는 정치 경제적 제도가 없으면 과학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과학연구는 새로운 힘을 제공하는데, 이 힘은 새로운 자원을 획득하는 데도 쓰인다. 새 자원의 일부는 연구에 재투자된다.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과학의 역사는 진보의 특성을 지닌다. ... 역사의 개념이 예술에 적용되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완성, 개선, 향상을 함축하지 않으며,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그것을 지도에 넣으려고 시도하는 어떤 여행에 가깝다. - 커튼

 

 

임병희, <목수의 인문학>

공자가 말했다. "학문은 비유하자면 산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부으면 완성할 수 있는데도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그만둔 것이다. 학문은 또한 평지를 메우는 것과 같아서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퍼넣었을 뿐이더라도 진전했다면 그만큼 내가 진보한 것이다. - <논어>, 자한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 우리는 타인의 죄는 그 얼굴에 묻은 검댕처럼 잘 찾지만 자기 자신은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 이 거울을 좀 더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면 타인의 죄를 비난하는 일이 줄어들고 더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한 대 얻어맞아도 되 때리지 않을 때, 누군가로부터 험한 소리를 들어도 대응하지 않을 때 선을 향해 진보할 수 있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오늘날의 인류는 완전한 삶에 대한 생각 자체를 잃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삶의 바람직한 마무리라든가, 고통과 슬픔과 피로로부터의 반가운 해방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형벌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연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평균수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더 있으리라는 유일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더'를 끝없이 욕망하는 것은 불완전을 인식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며, 불완전은 '더'를 향한 끝없는 욕망의 결과다. 이것은 죽음의 바퀴다. 이 바퀴의 회전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피상적이고 불행할수록 우리는 더 빠른 진보를 원한다. 얇은 얼음판 위에 있을 때 더 속도를 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

진리란 무엇이며, 우리가 진리에 이르렀을 때 그것이 진리임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언가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무언가를 아는 주체로서의 "나" 또는 하나의 "영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영혼이라는 것은 감각 작용을 통합하는 세포 조직에 불과한 것인까.... 현실이란 기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정되어 있는 영구불변의 것일까.... 무언가가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사 이래로 이 고산 지대의 산과 산에는 수많은 오솔길들이 만들어지고 또 잊히기를 되풀이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오솔길에서 사람들이지 찾아낸 위의 물음에 대한 답변들은 스스로 영원성과 보편성을 공언했지만, 문명마다 선택한 오솔길은 계속 다른 것으로 바뀌어왔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동일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수도 없이 다양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 답변은 나름의 맥락 안에서 보면 진리로서 손색이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의 문명 안에서조차 옛날의 오솔길은 끊임없이 폐쇄되고 새로운 오솔길이 다시 열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때때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전쟁을 통해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문명이, 갈수록 양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쓰레기로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문명이, 강요된 기계적 삶으로 개개인을 몰아감으로써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문명이, 바로 그런 문명이 어찌 수렵 채취와 농경을 통해 이어져왔던 선사 시대의 소박한 삶에 비해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비록 낭만적으로 보면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나 타당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원시 종족 사회는 현대 사회보다 한결 더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데 인색했다. 고대의 전쟁은 현대의 전쟁보다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이유를 빌미 삼아 치러졌다. 쓰레기 발생의 주범인 공학 기술은 환경에 피해가 가지 않게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찾아내고 있다. 원시인의 생활을 묘사한 학교 교과서의 그림들에는 때때로 이 원시인의 삶을 고달프게 했던 요인들이 빠져 있다. 고통, 질병, 기아, 단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했던 고달픈 노역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존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현대적 삶으로의 이행은 냉정하게 판단할 때 진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진보를 가능케 한 유일한 요인이 바로 이성 그 자체임은 상당히 명백해 보인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여 결론을 내리는 절차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가운데, 그것도 자료를 바꿔 수없이 되풀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사유의 계층 체계를 쌓아나갈 수 있었고, 또 이를 통해 원시인들에게 적에 해당했던 것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또 이를 통해 원시인들에게 적에 해당했던 것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어떤 경로로 진행되었는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다. 낭만파들이 합리성을 향해 비난을 퍼부을 때 이 같은 비난은 합리성이 인간을 원시의 상태에서 끌어올리는 데 대단히 효과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기인하는 것이다. 합리성이란 그처럼 강력하고도 모든 것을 제압하는 문명인의 도구여서, 다른 어떤 것도 살아남을 여지를 거의 주지 않고 이제 인간 자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불평이 시작된다.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자연선택은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변이에만 작용할 수 있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말은 단지 돌연변이가 진보를 향해 체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이들 가운데 고도로 작위적인 것의 부분 집합이다. 돌연변이는 기존의 배 발생 과정을 변화시킴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문어의 배 발생 과정에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도 코끼리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수많은 저자들이 인간은 선천적으로 잔인하며 따라서 이를 교정하려면 상시적 경찰 제도가 필요하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의 우둔함과 문명인의 유해한 양식으로부터 똑같이 먼 곳에 놓인다면, 원시 상태의 그보다 더 온화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 우리는 그 상태에 대해 깊이 숙고할수록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 원시 상태야말로 어떤 혁명도 필요치 않았던 상태, 즉 인간에게 가장 좋은 상태였다는 사실과, 만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어떤 치명적 사건이 아니었다면 어떤 것도 인간을 그 상태에서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런 상태로 발견된 야만인들의 예는 인간이 영원히 그런 상태로 남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그 상태가 세계의 진정한 유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진보가 겉으로는 개인의 완성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류의 노쇠를 향한 걸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 루소

 

 

A. L. 바라바시, <버스트>

컴퓨터에서 휴대 전화, 우주여행에서 신약까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 진보의 대부분은 지난 수백 년 동안의 과학적 탐구 덕분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정량화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결국 통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몽적인 혁명은 자연과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오늘날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여러 사건들이 여전히 불가사의하고 혼란스럽게만 보인다.

 

 

김성오, <몬드라곤의 기적>

'인간에 의해 채택된 사상과 개념에 대한 교육은 대중의 발전과 진보의 열쇠가 된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세상의 현상(아기가 태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개구리가 알을 낳고, 화산이 분출하고, 정치가들이 거짓말하고)이 만드는 이질적인 거품과 직면해서, 철학자들은 실재하는 물질이냐 정신이냐 선택하도록 끝없이, 물론 매번 독특하게, 권유했다. 탈레스이 경우, 실재는 만물의 근원이며 물질의 기본 원소인 물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의 본질이 불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든 이성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에, 홉스는 운동에, 헤겔은 정신의 진보에,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보바리 부인은 사랑에, 마르크스는 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에..... 이 사상가들은 당연히 세상에 다른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들의 개념이 인간사의 복잡한 작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풍부함, 즉 항상 증가하는 개인적 집단적 설비의 발전은 그 대가로서 항상 더욱더 심각한 '공해'를 초래한다. 공해, 그것은 한편에서는 산업발전과 기술진보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의 구조 자체의 결과이다.

 

자본주의 체계로의 진보라는 것은 모든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가치가 점차 생산형태로, 다시 말하면 (1) 경제적 이윤의 원천, (2)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헤겔은 개인과 공동체가 가진 특수성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의 철학을 통해 다소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설명한다. 발전과 진보를 숭상했던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통해 진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는데, 그 진보의 출발점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고 최종점은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진정한 진보 지수The Genuine Progress Indicator

의료 제도, 안전, 깨끗한 환경, 다른 행복 측정 요소 등을 통해 정책입안자들이 사람들에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을 정확히 살필 수 있또록 만든 것으로, 리디파이닝 프로그래스에서 진행한다.

 

 

박노해, <다른길>

길을 잃어 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았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험난한 곳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온 전통마을 토박이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가는 개척자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적정기술미래포럼(김정태, 김주헌, 정인애, 하재웅, 한재윤, 홍성욱), <인간 중심의 기술 적정기술과의 만남>

적정기술은 기술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고 체계'를 의미하며, 이 사고 체계는 실로 하나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다. 적정기술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향, 개인의 '자유로서의 개발'을 위한 이해를 포괄한다. 즉 적정기술의 개념은 기술을 적정한 수준으로 한계 짓는 데 있지 않고, 기술 사용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태도를 고양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듄(Peter Dunn)이 언급한 바와 같이 적정기술은 '스스로 진화하고, 역동적이며, 발전에 관한 완벽한 시스템적 접근'이며, '지식, 기술,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발전에 관한 한 가지 접근방식'이다. 결론적으로 적정기술은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로서 적정기술의 가장 정확한 기준은 '인간'이며, 적정기술은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를 우선시'하는 사고체계 또는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적정기술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줌으로써 인간의 실현을 강화하는 일련의 목표와 과정, 사상, 실천으로 정의될 수 있다.

 

 

폴 폴락, <적정기술 그리고 하루 1달러 생활에서 벗어나는 법>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디자인으로 진보를 이루어라.

저렴한 가격에 최적화된 디자인은 오늘날의 기술을 낳은 역사를 거꾸로 돌릴 때 쉽게 찾을 수 있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도전에 직면했다면 (토머스 F. 우드록)

스트레스와 고난의 시간은 진보의 씨앗을 뿌리는 기회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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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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