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이 말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은 동일한 상황이 시간, 관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인생은 희극으로 끝마칠까? 비극으로 끝마칠까? 그 선택은 나에게 있다.

 

 

 

희극(喜劇) 

[명사] 1. 웃음을 주조로 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경쾌하고 흥미 있게 다룬 연극이나 극 형식. 인간 생활의 모순이나 사회의 불합리성을 골계적, 해학적,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코미디.

2. 남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나 사건.

 

(네이버 영어사전) comedy, farce

나는 비극보다 희극이 좋다 I prefer comedy to tragedy.

 

 

 

비극(悲劇) 

[명사] 1. 인생의 슬프고 애달픈 일을 당하여 불행한 경우를 이르는 말. 

2. 인생의 슬픔과 비참함을 제재로 하고 주인공의 파멸, 패배, 죽음 따위의 불행한 결말을 갖는 극 형식.

 

(네이버 영어사전) tragedy

그녀가 그렇게 일찍 죽은 것은 비극이었다 It was a tragedy that she died so young.

 

 

[네이버 지식백과] 희극 [喜劇]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희극(喜劇)은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 같은 약점을 묘사하여 골계미를 드러내도록 하는 극의 양식이다. 비극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인생의 고뇌를 그리는 반면에, 희극은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속에 인간의 결점이나 사회의 비리를 꼬집어 내어 웃음으로 분규를 해소한다. 희극을 뜻하는 코미디(comedy)라는 말은 그리스 희극인 코모이디아(komoidī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제연(祭宴)의 행렬을 뜻하는 코모스(komos)와 노래를 뜻하는 오이데(oide)의 합성어이다. 코모이디아가 디오니소스 축제 때 불러진 남근숭배 노래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은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코미디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 단테의 「신곡(神曲)」의 원제목인 「디비나 코메디아(Divina Commedia)」에서처럼 극 이외의 문학양식에서도 사용되기도 한다. 희극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경쾌하며 웃음이 위주가 된다는 점이다. 희극의 웃음은 인간성의 불합리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데에서 빚어지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희극에는 기지와 풍자와 해학 등의 요소가 작용하며, 동시에 비판 정신이 강조된다. 희극은 행복하고 즐겁게 결말을 맺는다. 주동인물이 처음에는 패배하고 고전하지만, 결국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에 이른 것이 희극이다. 희극의 인물은 서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비극의 인물이 고귀한 신분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점과 서로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지만, 희극에 관한 논의가 그리 많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비극과 대조하면서 희극은 일상적 인간보다 뒤처진 사람을 그리고 있지만 그 열등함이나 우스운 모양이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간단히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희극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을 묘사하되 그 결말이 웃음과 행복으로 끝나는 연극이라고 규정하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일반화된 희극의 정의로 발전한다. 중세기 이후까지 희극은 일반 사람들보다 모자라는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관객을 교화한다는 것이 일반화된 논리였다. 18세기 말부터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에서 희극의 웃음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지닌 부조화성에서 웃음이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희극에 담겨진 희극정신과 그 문학적 효과를 높이 평가한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높게 평가하는 아이러니,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조소, 삶의 부조리성의 적극적 표현 등에서 희극의 특징이 드러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극 [tragedy, 悲劇] (두산백과)

인간의 마음 속에 생기는, 자신의 동료나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갈등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취급한다. 비극의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디오니소스신을 찬양하는 열광적인 노래와 춤이 포함된 디시램브(dithyramb)라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인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아카데미의 축제기간에 열리는 연극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비극시인에게 양 한 마리를 주었기 때문에 트라고이디아(tragoīdīa)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 장식이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서술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을 취한다. 또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라고 정의하였다. 비극은 무자비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고귀하고 가장 용감한 인간을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낙관적인 견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운명에 의해 파멸될 때라도 그는 그것 때문에 고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독백이나 대화의 대사 이외에 고대 축제의 합창과 춤을 지녔다. 행동을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합창에 의하여 결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였다. 뚜렷한 행동이 없으며, 등장인물의 수가 적고, ‘서브플룻’이나 ‘코믹 릴리프’가 없었다. 전쟁이나 암살과 같은 실제의 사건들은 무대 위에서 상연되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서술되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그리스 비극시인 중 가장 위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 대한 분석의 기초로 삼은 것도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BC 240년 그리스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그리스극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공연함으로써 비로소 로마인에게 비극이 소개되었다.

 

그 이후 로마의 비극은 계속 그리스극의 형식을 따랐다. 로마의 비극은 완전하게 전하는 것은 없고 그 단편만이 남아 있지만, 그것들을 통해 살펴볼 때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더 멜로드라마틱하다. 로마 비극의 유일한 대가(大家)는 세네카로 그가 나타났을 때 이미 로마연극에는 분열이 생겨 대중적인 무대극과 공연용이 아닌 읽기 위한 문학적인 극으로 나뉘어 있었다. 세네카의 극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호라티우스가 그의 《시학:Poetica》에서 제시한 연극이론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호라티우스는 비극에서 그리스의 원형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까지도 믿었다.

 

세네카의 서재극(書齋劇:closet drama)에 의해 표현되고, 14세기와 15세기 인문주의 번역자들에 의해 전승된 바로 이러한 철학이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연극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질서 있는 세계에서의 비극은 운명의 장난으로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이 패배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영혼 위에서 작용하기 전까지는 그러한 비극의 개념이 유지되었다. 중세 세계관에서 볼 때,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오히려 인간이 운명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었으며, 그래서 인간의 조건은 그리스와 로마의 그것만큼 비극적이었다. 거기에다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자신에게 속죄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신의 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은 더 이상 영웅적인 것이 될 수 없었으며, 신의 자비를 받지 못하거나 역경에 굴복하는 것은 곧 비극이었다.

 

중세의 기적극(奇蹟劇:miracle play)이나 신비극(神秘劇:mystery play)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속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데 공헌하였다. 비극이나 연극의 교훈적 ·윤리적 기능에 대한 개념이 주장되는 한편에서는 유럽 문화가 전반적으로 종교에서 분리되는 것과 함께, 15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발견함으로써 비극의 고전적인 개념이 부활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대한 신고전주의자들의 해석은 바로 법이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해석자들은 연극이 자연의 완전한 모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대상의 시간과 실제의 시간이 일치해야 하며, 행동은 한 번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즉, 시간 ·장소 ·행동의 3일치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되었다. 이와 같이 엄격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조 속에서 17세기 프랑스의 코르네유나 라신 같은 신고전주의 극작가들은 비극을 새로운 위치에 올려 놓았다. 신고전주의의 영향은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었지만 영국과 에스파냐의 극작가들은 덜 독단적이었다.

 

말로나 셰익스피어 등은 고전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 비극과 희극, 높은 신분의 인물과 천한 계급의 인물을 혼합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베가, 세르반테스, 칼데론 데 라바르카 등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영향 때문에 영국과 에스파냐의 연극에서는 신고전주의의 도그마가 사실상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또한 볼테르와 알피에리가 18세기의 원숙한 신고전주의 연극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있다고 쓰기는 했지만, 그 곳에서도 이미 신고전주의의 요새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이르러 운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비극의 신뢰는 기반을 잃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초, 중산계급의 비극 또는 부르주아극(劇)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영국의 조지 릴로, 이어서 프랑스의 디드로, 보마르셰,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독일의 레싱 등에 의해 비극의 초점은 왕자나 초인간적인 영웅의 고통 또는 불행으로부터 서민들의 그것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극작가들은 그들의 영웅을 죽음이나 패배로 몰고 가는 것을 주저하기조차 하였다.

 

그것은 괴테나 실러의 낭만적인 비전에서 볼 때, 시련은 극복되는 것이며 마지막에 이르러 낭만적인 영웅은 고전비극의 영웅과 마찬가지로 역경(逆境)에 의해 고결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통과 인내에 대한 보답은 패배가 아니라 필연적인 승리였다. 반대로 처벌이 비겁과 악에 대한 보답으로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멜로드라마나 19세기의 고딕 로맨스와 별로 다르지 않다. 후에 뒤마 피스, 졸라, 그 밖의 다른 사실주의 극작가들은 현대인의 비극을 역사 ·경제 ·사회의 결정론적인 힘에 대항하여 희망없는 싸움을 하는 것에서 찾았다.

 

반면에 입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고독이나 정서적인 고립이라고 생각하였다. 20세기의 상호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이와 같은 비극적 소외는 사르트르, 카뮈, 피란델로, 베케트 등과 같은 극작가들에 의해 다루어졌으며, 실존주의 연극이나 부조리극(不條理劇)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이나 다른 극작가들에게 인간의 존재는 바로 비극적인 것이며 공포의 대상이 었다.

 

 

 

[글과 책 속에 쓰인 '희극/비극'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최인철, <굿 라이프>

삶이란 해석과 재해석의 연속이다. 과거의 즐거움이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하고, 과거의 고통이 지금 생각하니 축복이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순간의 경험들은 그 순간에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된다. 따라서 순간의 기분만을 가지고 좋은 삶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한편 성격은 행동자를 일정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며, 사상은 행동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또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조사와 노래)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장경)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플롯, 성격, 사상)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 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의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 행도 없는 비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이나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찰리 채플린

 

 

윌리엄 피네건, <바바리안 데이즈>

삶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

 

 

피천득, <인연>

가난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 치옹 윤오영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不信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 「우정」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자기 시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타자에 의한 세상의 이해와는 다르다. 물론 타자의 견해를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부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비극은 선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을 붇돋아주기도 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우리가 얼마나 사악하고 어리석고 육욕에 불타고 화를 잘 내며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려주기를 즐겼지만, 그러면서도 복잡한 연민을 가질 여지는 남겨놓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례들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고귀하지만 추악한 결점을 가진 종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잘 타이른다. 우리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거나 능숙하게 의술을 선보이는 사람이기도 하고, 오랜 기간 사랑으로 자녀를 돌보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딱 한 번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삶 전체를 돌려세워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

 

 

안드레아스 와이겐드, <Data for the poeple: 포스트 프라이버시 경제>

미디어와 마케팅 전문가들도 끊임없이 우리의 감정을 조종하며, 정보를 선별적으로 공개하여 우리의 마음을 좌지우지한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 정보 광고, 그리고 '꼭 봐야 할' TV 프로그램이 본질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비극은 어른들이 자신이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시간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가능성과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이런 부분을 간과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주어진 현실을 절대 뒤집을 수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건 스스로에 대한 약한 믿음일 뿐이다.

 

 

호프 자런. <랩걸>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티드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자신을 잘 안다는 것 (시드니 J. 해리스)

세상의 모든 비극 중 구십 퍼센트는 자기 자신, 능력, 약점, 심지어 실제 가치조차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주요한 미적 범주가 시대마다 달라진다. 가령 그리스 예술에선 '미'라는 범주가 우세했다. 반면 중세 예술은 철두철미하게 '숭고'의 예술이었다. 중세에는 희극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저 천상의 '미'와 지상의 '추'를 대비시켰다. 한편 고전주의 예술은 '미'를 추구했지만, 바로크 예술은 '극적인' 묘사를 추구했고, 로코코는 '우미'의 예술이었다. 고전주의자는 예술에 '추'를 그리는 걸 일절 허락하지 않았지만, 낭만주의자는 오히려 허울 좋은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추함'을 폭로하는 걸 즐겼다. 미적 범주의 가능성은 이렇게 시대마다, 유파마다 달라진다.

 

이렇게 세계 자체가 한 편의 거대한 비극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이 우주적 비극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비극에도 마야의 세계와 그걸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광포한 힘이 있다. 아폴론은 극 중 마야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가상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생에 취하듯이, 우리는 극에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가상에 매혹된다. 아폴론은 이렇게 덧없는 현세를 긍정함으로써 '개체화 원리의 장렬한 신상'이 된다. 하지만 아폴론적 가상은 디오니소스적 세계 위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일 뿐이다. 이 베일 뒤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비극의 주인공을 여지없이 파멸로 몰아간다.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안으로 되돌린다. 이때 무서운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개체화 자체가 고통이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난 것부터가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 그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 속에서 전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리스인들의 두 주신은 이렇게 한 몸이 된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어떤 광고도 의식적으로 주목하게 되면 희극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광고는 의식적인 소비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 최면술을 걸기 위해 잠재의식에 작용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상업적인 오락 전술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동일하게, 모든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의 속도와 힘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보장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보다는 영속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희극적 전술이 된다.

 

 

김영하,  <읽다>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가 쓰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걸맞은 덕성 혹은 모자람을 인물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극작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는데, 이는 플롯을 성격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그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는 극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보다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반전,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 주인공이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관찰은 판단에 앞서고 판단보다 위대합니다. 판단에는 기준이 미리 존재하고 그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죠. 타인을 지옥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은 과소평가합니다. 악은 인간의 나약함과 굴종, 묵인을 통해 제 길을 열어갑니다. 나약과 굴종, 묵인이 걷는 길은 악이 걷는 길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악이 자행하는 횡포는 물론 악의 진행방향과 인간 삶이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보다 근본적으로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관찰하는 존재는 깊고 넓고 관대한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속에서 길어 올리는 새로운 이해와 슬픔과 번민은 일체의 시비판단과 은원을 넘어섭니다. 희극을 쓰든 비극을 쓰든 작가는 객석에 앉아 관객을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다르는 정화와 탈피의 효과는 역사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작가는 철저히 인간 내면의 증언자여야 합니다. 진실을 관조할 때는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관조를 통한 진실추구야말로 작가 고유의 일이며 지고무상의 윤리입니다. 삶의 진실은 분명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진실을 바라볼 때 그 붓끝에서 빚어지는 문학은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작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대한 관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삶의 조건과 인간 사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관조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조의 글에는 판단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판단이 있다면 심미적 판단이 있을 뿐입니다. 문학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판단이 있다면, 그 또한 심미적 판단입니다. 희극, 비극, 서정, 황당무계, 골계, 숭고, 시의 등이 모두 심미적 판단에 속합니다. 문학도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심미라는 가치만을 인정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심미뿐이라는 뜻입니다. 심미 외에 정치, 사회, 윤리, 습속 등은 문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어떤 문명이든 인위에서 자연으로 진보하고 의식적으로 소박한 사색과 생활로 회귀할 때까지는 이것을 완벽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어떤 인간이든 현명한 자의 지혜에서 어리석은 자의 지혜로 진전하여 우선 인생의 비극부터 느끼고 다음에 인생의 희극을 느껴 웃는 철학자가 되기까지는 그를 현명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웃을 수 있기 전에 울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각성이 생기고 그 각성에서 온정과 관용을 겸비한 철학자의 홍소가 생긴다.

 

나는 조용히 인생이란 것에 생각해 보았네. 아마 인생은 비극이다 하는 비극감에 의하여 눈이 띄게 되었나봐. 언젠가 하늘을 바라보고는 무슨 까닭으로 일월성신이 바쁜 사람처럼 주야로 저렇게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일세. 오늘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내일이 오기는 하지만 벌써 그건 오늘은 아냐. 금년이 가버리면 두번 다시 오진 않아. 내년이 있지만 그건 벌써 금년은 아냐. 이리하여 대자연의 일월은 끝없이 전개되어 가지만 인생의 일월은 나날이 짧아질 뿐이거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3만 6천일밖에 안 돼. 그러므로 백 년만 넘으면 아무것도 없는 법일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신영복, <처음처럼>

[석과불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희망의 언어'입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 <텅빈충만>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사상의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다. 이성은 그와 같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해 어떤 견해가 이성의 성장을 도울 것인지 여부를 우리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지금 가진 어떤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강요하면 이성은 성장할 수 없다. 집단주의 사상은 이성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성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도시는 자꾸 비대해지고, 비대해지는 만큼 경쟁은 치열해지고, 경쟁은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고, 그 적대감은 서로를 경계하며 소통이 차단되는 개체화가 되고, 그 분열은 서로를 소외시키다가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그 자기 소외는 곧 정신 질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현대 도시인들이 갖는 가장 큰 비극이다. 그 치유책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소연할 수 있고,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대부부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 결혼을 했다. 신부의 토지가 신랑의 토지와 붙어 있거나, 신랑의 가족이 번성하는 농가이거나, 신부의 아버지가 읍의 치안판사이거나, 지켜야 할 성이 있거나, 양가 부모가 동일한 성서 해석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합리적인 결혼에서 외로움, 강간, 간통, 폭력, 가혹함, 육아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 생겨났다.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에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결혼을 절실히 바라고, 본능에 압도되어 서로에게 빠져들고, 결혼이 옳음을 가슴으로 아느냐다. 현대는 '합리성', 그 불행의 촉매이자 회계적 요구에 물린 듯하다. 더 나아가 결혼이 경솔해 보일수록(예를 들어 만난 지 6주 만에, 어느 한쪽이 직업이 없을 때, 또는 둘 다 10대를 갓 넘겼을 때), 사실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외관상의 '무모함'이 과거의 이른바 현명한 결합이 유발했던 그 모든 오류와 비극의 평형추로 간주되는 것이다. 본능의 명성은 수 세기에 걸친 비합리적인 '합리성'에 반하여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 반응의 유산이다.

 

 

심보선 시집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 심보선,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일리아스>를 서사시와 비극의 전범으로 평가했다.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의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시는 역사와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며 호메로스의 작업을 한껏 지켜세웠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자연의 수량화를 통해 우리가 잃은 것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오늘날 문제가 되는 온갖 비극적 난국과 파국의 불씨를 심었다는 것이다. 수로 계량된 자연은 양적 대상일 뿐 더 이상 아름답고 신성한 대상이 아니고, 수로 계량하는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양적으로 실현하는 존재일 뿐 더 이상 검소하고 신중함, 타인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생명과 자연보호 등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피타고라스가 교훈한 조화가 깨지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병들어가고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이 살아남은 모든 자연적 시스템 혹은 복잡계의 특징이라면, 이런 시스템에서 가변성, 무작위성, 스트레스를 제거하면 시스템에 피해를 줄 것이다. 시스템은 약해지거나 소멸하거나 붕괴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작위성과 가변성을 억누르면서 경제, 건강, 정치, 교육 등 거의 모든 것을 프래질하게 만들어왔다. 스트레스를 제거하면 복잡계는 약화되거나 소멸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근대의 구조화된 세계는 하향식 정책을 비롯한 각종 장치들을 통해 우리에게 피해를 입혀왔다. 이런 현상은 근대가 낳은 비극이다. 마치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부모처럼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야 했다. '나한테 난해한 주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둔한 주장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어쩌면 논리학자들을 밀어내는 지혜의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닌가?'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니체는 두 가지 힘을 보았다. 하나는 아폴로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힘이다. 아폴로의 힘은 이성과 극기를 바탕으로 질서, 균형, 합리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디오니소스의 힘은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이해하기 힘들고 본능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힘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는 소크라테스가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아폴로의 힘에 손을 들어주고 디오니소스의 힘을 붕괴시켜 합리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하게 되기 전까지 이들 두 가지 힘 간의 균형을 표현했다. 이처럼 합리주의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호르몬을 주입해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작용을 붕괴시키는 것과 똑같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조종석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이때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수동 조작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비행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정보 표시기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지시대로 하다가 경로를 이탈해본 사람은 누구나 컴퓨터 자동화가 갑자기 업무 부담을 어떻게 높여줄 수 있는지를 직접 깨닫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배운 사실은, 자동화는 근로자들이 이미 과중한 업무부담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최악의 순간에 가끔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오류에 빠질 확률을 낮춰주는 보조 수단으로서 세상에 등장한 컴퓨터는 결국 충격을 받았던 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가게 만들 확률을 더 높여준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 비극적이진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이건 아마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좋은 전략이 될 것입니다. 내일 혹은 한 달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선택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집니다. '내가 눈 감을 때 무슨 후회가 들까'를 생각해보면 절실함 혹은 진정성은 커질테고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 불길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빠르게 결정하지 못할 일어 없어집니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지배적 소수자는 철학을 낳고, 그 철학은 때로 세계 국가의 원동력이 된다.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 종교를 낳고, 그 종교는 세계 교회의 형태로 자기를 구현한다.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웅시대를 낳고, 그것은 야만족 전투 단체의 비극이 된다. 몇몇 세계 국가는 외래 제국 건설자가 만들었고, 몇몇 고등 종교는 외래 영감이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몇몇 야만적 전투 단체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 영웅시대는 동시대 문명뿐만 아니라 시간과 문명을 결합한다. 이 셋이 해체된 문명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더 큰 전체에 속한다는 것을 고찰해야 인류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을 수 있다. - <역사의 연구 II>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하나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에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신영복, <담론, 마지막 강의>

중요한 것은 삶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는 정서입니다. 더구나 혹독한 비극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정서는 단 한 줌의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삶을 직시하고 삶과 언어가 일체화되어 있는 정서는 한마디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의 본뜻이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본축적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즉 기계화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기계화가 노동 해고로 이어집니다. '자본축적은 노동을 소외(alienation)시킨다.' 이것이 자본축적에 대한 1차적인 인문학적 선업니다. ... 노동의 소외는 해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산과정 내에서 일어나는 소외 역시 심각합니다. 자본축적 - 기계화 -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은 자율성을 상실합니다. 기계의 보조자로 전락합니다. 지엽말단에 매달려 있는 한 개의 칩이 됩니다.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정체성이 소멸되는 예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만 소로우는 <월든>에서 노동자의 비극은 같은 것만을 반복적으로 지출하도록 강요받는 데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동작, 같은 기능을 반복적으로 강요당할 경우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 노동의 소외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을 자기가 소비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정재승, <과학 콘서트>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난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아놀드 토인비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고령화와 에너지 위기, 양극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변화를 이루려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국민의 공감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각자의 욕망과 신념과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 교감, 공감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협력을 이루어야만 이 과제를 해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시민들이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욕망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있는 '생리적 욕망'과 '안전에 대한 욕망' 충족에 지나치게 집착해 살면서 '자기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망'을 후순위로 밀어두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권력을 얻는 일에 매달려 자기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고 팽개쳤다. 협력보다 경쟁에, 원식과 상식보다 반칙과 편법에, 인간적 공감과 연대의식보다 자기중심적 이해타산에 끌리며 살았다. 세월호의 비극은 그렇게 달려온 욕망의 대한민국현대사가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아이들이 애석한 죽음 앞에서 기성세대가 느낀 '미안함'은 그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상중,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한편 과거는 사람의 발목을 잡습니다. 끝난 일을 아쉬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데 언제까지고 과거에 붙들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셨지요? 인간의 비극은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과거를 아쉬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기에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는 말이지요.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론, 철학,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보주의를 어떤 이론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감정 또는 정신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감정이나 정신적 태도는 상대적이다.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와 다른 감정을 품고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대하는 게 합리적이다. 태도의 차이를 옳고 그름 또는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악의 잣대로 모든 일을 판단하게 되면 자칫 삶을 이념에 종속시키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좌익 소아병과 극우 맹동주의, 좌익 전체주의, 우익 국가주의는 모두 동일한 원인에서 파생한 이념의 병이다 이 병의 원인은 '불관용'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도주의 혁명은 역사적 폭력 감소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였고 인류의 자랑스런 업적이었다. 미신적 살해, 잔인한 처벌, 변덕스런 처형, 소유 노예제는 지구에서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지언정 변두리로 밀려났다. 문명의 시초부터 인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전제 정치와 주요국 간의 전쟁이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발전들을 묶어 냈던 계몽주의적 인도주의 철학은 일단 서구 세계에 발을 붙인 뒤, 좀 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이 비극적으로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 아모스 오즈

 

 

원용찬 / 베블런, <유한계급론>

노동행위와 도구의 효율성을 칭찬하고 뭔가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제작본능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다. 유한계급의 비극은 바로 존재론에서 시작한다. 노동의 면제를 특권으로 부여받은 유한계급은 어디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노동의 부재는 곧 존재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유한계급은 사치와 쾌락, 과시적 낭비 속에서 결핍된 자아를 보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명품을 찾고 사치를 해 대는 소비행위를 '실체 없는 이미지 숭배와 주체성이 상실돼 가는 기호(code)의 난무'로 파악하여 허무주의를 보이기도 한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나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다룬 핵심 주제가 인간과 권력의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권력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의 이면에 인간의 참혹한 비극이 놓여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면 되도록 권력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은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함께 서 있을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행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아예 그것을 직업 삼아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나는 여행자로 살면서 '삶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 즉 아픔, 슬픔, 실패, 좌절, 불완전함 등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내 인생의 일부'로 끌어안고 공존해 살아가는 '체념의 미학'을 터득해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삶을 비관적으로 보고나 자포자기 하는 자세, 혹은 무책임한 태도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유한하다'는 비극적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여행은 가장 큰 힘과 지혜를 준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걱정을 해 보아도 별 수가 없을 경우에는, 어떤 사람은 장기를 두고, 어떤 사람은 소설을 읽고, 어떤 사람은 통속적인 천문학에 재미를 붙이고, 또 어떤 사람은 카르데아의 우르 발굴에 대한 이야기라도 읽으면서 자위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 네 사람의 경우는 참으로 총명하다. 그러나 다른 데 관심을 돌리지 않고 고민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행동할 기회가 닥쳐왔을 때 자기 고민과 싸워나갈 힘이 없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슬픔에 빠진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그 슬픔을 피할 방도는 없지만 최소한도로 감소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불행 속에서 비극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고 하는 것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인간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파멸되는 수가 있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그 불행한 운명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 한,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애써 찾아야 한다. 해롭고 나쁜 위안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맞는 따위이다. 술을 마시고 마약을 맞는 목적은 잠시 동안이나마 의식을 잊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의식을 잊어 버리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의식을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요컨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불행에서 방향을 멀리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활이 한두 가지의 방면에만 관심을 갖고 왔다면, 실제로 비극에 처한 경우에 의식의 방향전환이 어렵게 된다. 불행이 닥쳐왔을 때 꿋꿋이 견디어 나가려면, 행복할 때 관심을 갖는 세계를 넓혀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현대의 감정이나 연상을 잊어버리게 하는 안식처를 찾아낼 수 있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넓고 건전한 흥미로써 이를 능히 극복해 나간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아프리카가 최근 들어 성장 실패를 경험한 주된 이유는 정책, 즉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강요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에 있다. 특정 자연 조건이나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가 겪는 문제가 정책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진정한 비극은 만성적 성장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서양의 근대를 열고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로 니체가 거론된다. 질서와 합리의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와 쾌락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옹호한 그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부터가 그랬다.

 

 

김화영, <행복의 충격>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 카뮈, <사막>.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피에솔레 언덕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일반적인 세상 법칙과 경제의 객관적인 숫자, 그러니까 생산, 실업, 평가절하, 물가, 봉급 등의 숫자가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그것들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고대 비극의 폭군들처럼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실질적으로 협박한다.

 

 

박경철, <문명의 배꼽, 그리스>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종교 신앙의 위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종교적 주장들은 다른 모든 주장들이 거쳐야 하는 정당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배우기 때문에, 문명은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헌 때문에 자살하고 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했겠는가?' - 샘 해리스, <신앙의 끝>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시민사회를 발전시키고 사회적 자본을 창조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당연히 매혹적이므로 전 세계 선진국 곳곳에서 급속히 호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류의 40퍼센트가 하루에 2달러 이하를 벌고 있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돈이다. 이 비극적인 현실은 두 가지 요인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하나는 기본 식량과 건축자재에서 교통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이 무서울 정도로 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 섬뜩한 것으로, 2차 산업혁명이 긴 종반기에 들어서면서 기후변화가 세계 농경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모든 선전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선전은 의미작용을 전달할 뿐이다. 선전의 의미작용(그리고 그것이 일으키는 행동)은 결코 개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의미작용은 모두 시차적이며, 한계적이고 조합적이다. 즉, 선전의 의미작용은 차이의 산업적 생산에 속한다. ... 개인을 특정지었던 실제적인 차이는 그들을 서로 용납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개성화하는' 차이는 이제 개인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무한한 척도 위에서 서열화되며 또 모델들 속으로 수렴한다. 차이는 이 모델들에 입각해서 교묘하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타자와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어느 한 모델과 일체가 되는 것, 어느 한 추상적 모델 및 어느 한 양식의 결합형태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 것이며 따라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실제적인 모든 차이와 특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특이성은 타자 및 세계와의 구체적인 대립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차이화의 기적이며 비극이다. 따라서 소비과정 전체는 인위적으로 그 수가 감소된 모델의 생산에 의해 지배된다. 그곳에서는 다른 생산부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점화 경향이 보인다. 차이생산의 독점적 집중이 존재하는 것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정우 외,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가장 소박한 모습인 욕구는 인간의 삶을 추동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이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런데 욕망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할 때 쾌락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충족보다 더 큰 쾌락을 만들어냄으로써 금방 결핍의 상태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흔희 좋은 차나 좋은 배우자를 갖기를 꿈꾼다. 하지만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는 순간 성취감의 쾌락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욕망하게 하는 새로운 결핍이 나타난다.

 

 

김한민, <그림 여행을 권함>

모든 비극의 원인은 자만! - 그리스인의 전해오는 이야기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당신이 해변에서 친구와 함께 멋진 오후를 보냈다고 상상해 보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당신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쏟아 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당신은 그 소똥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둘째,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누가 소똥을 그곳에 잔뜩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목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은 그 것을 치우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도 없다.

셋째, 그 소똥은 불결하고 불쾌하며, 고약한 냄새가 당신의 집안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비유에서, 당신 집 앞의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은 삶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불쾌한 경험들을 상징한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알야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한다. "왜 하필 나인가?"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지 몰라도.

셋째,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며,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의 고통이 우리의 삶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소똥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소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 다시 말해 분노와 좌절 등에 빠지는 것의 은유다. 그것은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많은 친구들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심한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똥 더미는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발효가 될수록 더 나쁜 냄새가 난다.

다행히도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우리 앞에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쏟아 부어질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작업을 시작한다. 외바퀴손수레, 쇠스랑, 갈퀴 등이 동원된다. 소똥을 손수레에 퍼 담고, 그것을 집 뒤로 끌고 가 정원에 파묻는다. 이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때로는 아무리 힘들여 일해도 하루에 반 수레밖에 소똥을 옮기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하면서 절망속으로 걸어들어가기보다는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우리는 소똥을 퍼 나른다. 소똥 더미는 날마다 줄어든다. 때로는 여러 해가 걸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침이 오고야 만다. 우리 집 앞의 소똥이 모두 사라진 거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아침이. 나아가 우리 집의 다른 장소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꽃들이 풍성한 색채로 정원을 온통 뒤덮으면서 만발한다. 꽃들의 향기가 길 아래쪽까지 날아간다. 따라서 이웃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조차도 기쁨 속에 미소 짓는다. 그런가 하면 정원 구석에 있는 과실수들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 열매들은 달디달다. 그런 맛을 가진 열매들은 어디서도 살 수 없다. 수확한 열매가 너무 많기 때무에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기적의 맛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소똥을 퍼 나르는 것'은 그 비극들을 삶을 위한 거름으로 환영해 맞아들이는 것의 비유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 가슴의 정원으로 날마다 퍼 나름으로써 고통의 더미는 점점 줄어든다. 그것은 여러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침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발견할 수 없는 아침이.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절의 꽃들이 만발한다. 그리고 그 향기가 우리의 길 아래쪽으로, 이웃에게로, 친구와 심지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의 열매가 가득 매달린, 구석에 서 있는 지혜의 나무가 우리를 향해 구부러진다. 우리는 그 맛 좋은 열매들을 전혀 아무런 계획 없이도, 지나가는 행인과도 무료로 나눈다.

우리가 비극적인 고통을 겪고 그것이 가져다준 교훈을 배웠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원을 가꾸었을 때, 그때 우리는 깊은 비극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우리의 팔로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나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진심으로 이해한다는것을 깨닫는다. 자비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외바퀴손수레와 쇠스랑과 갈퀴를, 그리고 끝없는 격려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정원을 가꾸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교적 평단한 삶을 살아왔으며, 퍼 나를 소똥이 많지 않았던 그 수행승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이 된 사람들은 실로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그것들을 퍼 날랐으며,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수행승들은 지혜와 내적인 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소똥을 가졌던 이들은 세상과 나눌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만일 자비의 길을 따르고자 원한다면, 다음번에 당신 삶에 비극이 일어날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와! 내 정원에 뿌릴 거름이 더 많이 생겼군!"

 

 

류콴홍, <철학우화>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인생은 한 편의 비극이다."

인생이 어쩔 수 없는 고통과 불행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고난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했어요. 바로 자신의 생존의지를 내버려둔 채 실제로 어떤 사물과도 접촉하지 않으며, 마음속 모든 사물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지요.

쇼펜하우어는 다음 세 가지가 그 좋은 실천방법이라고 주장했어요.

    1. 철학연구에 몰두하라. 철학은 가장 이지적인 활동이며, 이성과 지혜는 의지를 완화시키고, 지식은 욕망을 가라앉힐 수 있답니다.

    2. 예술창작에 열중하라. 예술은 스스로 물질적인 이익을 잊게 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예술을 통해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몇 천재들에 불과합니다.

    3. 종교 특히 불교를 믿어라. 이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직감에 따라 사물을 융화하고 고통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어요.

 

 

마루야마 겐지,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자기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갖지 않으려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야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추종의 길을 택한 자는 인간이기보다 곤충에 가깝다. 설령 국가 체제를 바꿔 본들, 불특정 다수의 인식과 의식이 근본부터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비극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만일 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잃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내 행복에 관심을 갖는 친구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은 나를 염려하는 대신 내 불행을 즐거워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정 넘치고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는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비극을 겪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러 올 것이다." - 달라이 라마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진실이 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끝내는 스스로 생명을 해치고 쓰러져 갔던 젊은이들이 이 시기에는 참으로 많이 존재했따. 젊은 생명은 하나밖에 몰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생명에게 개화결실을 재촉하는 청년의 성급함, 장년기의 성숙함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노년기의 성숙을 찾는 장년기의 초조함, 망설임, 자기 과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결점을 비극적인 생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생명도 길잡이로 삼고 진인들을 거울로 삼아가며 결코 참이 아닌 곳으로 길을 잃거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강신주, <감정수업>

감정을 순간적이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누구나 살면서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때가 있다. 살고 있는 도시가 파괴되거나,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한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은 운명이 준비한 도전에 무방비상태로 맞서게 된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고통과 위기가 닥치면, 우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감정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되고, 매사 자책하던 것처럼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겨서도 안된다..

 

 

 

영화 <조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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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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