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이, 성급하게 내뱉은 말에 후회한 적이 많다. '두二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저자의 풀이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줄이고 말이 필요할 때는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조심하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본문발췌]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나만의 채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은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말의 총량이 듣는 총량보다 적으면 다들 불안해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타인에게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말을 적게 하면 공연히 손해 보는 것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휴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바캉스vacance는 '텅 비어 있다'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쉼이 필요한 것은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게 대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때에 말을 거두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게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역力 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지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역지사지를 실천하려면 내가 서 있는 곳에 잠시 벗어나 상대방이 처한 공간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기존의 관점을 내던져 '관점 전환perspective taking'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삶은 그러한 것 투성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관점을 다른 방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건 쉽지 않으므로 관점의 중심을 이동해 비스듬히 기울여봄직하다. 그애야 육안肉眼이 아니라 심안心眼을 부릅뜰 수 있다.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시선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관점을 기울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아니, 그때 비로소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에는 묘한 뜻이 숨어 있다. 두二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는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바로 언품이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대중이 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잡기>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內不足者 其辭煩 心無主者 其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
인생은 작은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강은 단번에 건너뛸 수 없다. 사귐도 그렇다. 크고 작은 돌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씩 밟아가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근차근 건너가야 한다. 삶과 사람 앞에서 디딜 곳이 없다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인생과 관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이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쌓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본인의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것만을 유일한 정답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오답으로 치부하는 경우다.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과 진실을 본인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대의 입장과 감정은 편견의 감옥 바깥쪽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적 과잉의 시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불평과 지적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듯하다. 쓴소리와 하나가 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허물을 콕 집어서 가리키는 지적의 말은 자칫 독설로 변질할 수도 있다. 독설은 글자 그대로 혀舌에서 나오는 독毒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도 있지만, 대개 몸과 마음을 망치고 독을 흩뿌린 사람의 혀마저 망친다. 착한 독설, 건설적인 지적을 하려면 나름의 내공이 필요하다. 사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통찰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말 속에 배어 있어야 한다. 말 자체는 차갑더라도, 말하는 순간 가슴의 온도만큼은 따뜻해야 한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비판의 한자를 들여다보며느 미약하나마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비평할 비批는 손 수手 변에 견줄 비比가 합쳐진 글자다. 사물이나 사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제대로 된 비판이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세 손가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지를 들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떳떳한지 족히 세 번은 따져봐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 현재를 살면서 틈틈이 과거라는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고, 때로는 과거라는 사슬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도 돌아봐야 한다. 과거는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와의 공통점을 찾는 게 그리 특별한 기술은 아닐 것이다. 필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지과학에서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굳은 사고hard thingking'와 '부드러운 사고soft thinking'로 분류한다. 전자는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하는 사고 체계이며, 후자는 상대를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가령 "고양이와 냉장고의 공통점은 뭘까요?" 하는 질문에 굳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가전제품과 살아 있는 동물한테 공통점이 있어?"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둘 다 색깔이 다양하고, 부엌을 좋아하고, 꼬리 비슷한게 달렸지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유연한 덕분이다.
중국 송나라 때 고서 <통감절요>에 "해납백천 유용내대海納百川 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대문에 (바다는)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바다의 본질이 그러하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넓고 깊어서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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