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삶을 유지시키는 정신적 에너지원입니다.

 

 

희망(希望) [명사] 1.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2.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

[비슷한 말] 기망 기원 소원 희행 희기 희원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hope, wish, [동사] hope, wish, desire, be hopeful; (기대하다) expect

hope, 미래에 대한 단순한 소망을 나타낸다.

I hope you'll pass your exams. 당신이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랄게요

wish, 대개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소망을 나타내며, 주로 '~이면 좋겠다'로 해석된다.

I wish I were you. 내가 너라면 좋겠다

 

 

 

[글과 책 속에 쓰인 '희망'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헬렌&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 있고 지금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가능성을 예견하기에 오늘의 고통과 힘겨움과 갈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풀어 말하면 '행복'이란 낱말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살 만한 것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자기 인생만 바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세상을 바꾸며,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일곱 가지 방법

희망은 정말 공짜입니다.

태양이 찬란해 보이는 것은 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둠이 없고 찬란한 태양만 있다면 사람들은 진저리를 낼 것입니다.

희망은 좌절, 실패, 슬픔, 불행, 고통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태양과 같은 것이고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희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법륜 스님이 사람들에게 일러준 행복하게 사는 삶의 자세 일곱가지

  • 첫째, 웃으며 즐겁게 살자.
  • 둘째, 소박하게 살자. (내가 먼저 절약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하고, 소박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편케 해야 합니다.)
  • 셋째, 나누며 살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덕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 나와 이웃과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 넷째, 감사할 줄 알자.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 다섯째, 희망을 갖자.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느냐고 물으면 '물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봄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사람이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 여섯째,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자.
  • 일곱째, 보람 있게 살자. (웃고 즐기고 건강하게 살며 남을 기쁘게 하면 절로 보람 있게 살게 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류콴홍, <철학우화>

사람이 행복을 얻으려면 이성과 지혜를 통해 자연계의 질서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자연계의 규율에 따라 행동해야 해요. 이성과 지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생성됐다는 것을 말해주니까요.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성과 지혜를 갖고 대처해야만 합니다. 재물과 명예, 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큰 행복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기관의 쾌락을 얻었을 때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점점 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을 얻은 뒤에는 종종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한 명예나 재물은 많이 얻을수록 욕망도 강렬해져 더 많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느끼게되는 절망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근심도 잇따라 따라오게 되지요. 이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끝도 없는 고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감각기관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답니다.

 

사람은 늘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하고, 희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믿으려 해요. 그리고 희망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져다주지요. 희망을 가진 사람은 늘 믿음이 있고, 이 믿음에 미래를 걸지요. ... 신념이 있기에 당신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쉽게 말해 신앙은 바로 당신의 꿈이랍니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망각 할 수 있어서다. 아이들이 늘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쁜 일을 오랫동안 곱씹지도,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잘 잊을 수 있는 망각 능력 즉, '쾌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할 때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우리의 기억 기능과 망각 기능이 동시에 활성화된다. 즉, 여행 중에는 나쁜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다. 반면 잊고 있던 추억이나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말이다. 낯선 공간에서의 새로운 자극이 우리 안에 감쳐둔 기억과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강판권, <나무 철학>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람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 만남과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우린 가슴 설레는 상황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정한 상대를 능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지옥문 입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독사가 우글거리고 불길이 치솟는 곳만 지옥일 리 없다. 희망이 없는 곳, 아무런 희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하는 곳, 그곳이 진짜 지옥이다.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우리들은 희망을 걸어 약속을 하고, 근심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은 돈이나 명예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다. 희망이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과 목표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품고 살아갈 때, 자기 삶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을 찾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인간은 예로부터 여행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했다. 험한 산을 오르고, 깊은 바다를 탐험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넓혀 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크고 작은 잠재력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이런 능력들이 여행을 할 때만 발현되는 것이라 해도 그때 느낀 성취감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러넣어 주고 세상사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두려움은 너를 포로로 붙잡아 두지만,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 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희망은 행복을 안겨주며,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과 공존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는 아직도 내 인생이 오래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아직 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생 최고의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Hope,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권력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며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자살한다. 권위자는 자신의 예측이 실현되지 않을 때 자살한다.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때 자살한다. 친절한 사람은 친절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직업에 종사할 때 자살한다. 가장 흔한 형태의 자살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가장 우울한 자살은 고마워하는 마음의 자살이다. 시기와 탐욕과 오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만성질환이지만 그나마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억제되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한때 사회를 융화시키거나 적어도 혐오감을 줄여주는 끈이었다. 이를테면 신, 조상, 부모, 스승, 이웃, 자연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평등을 염원할수록 권리가 기반을 이루고, 상업화될수록 고마워하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독립에 대한 모독이자 자존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 도스토엡스키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전쟁 특유의 흉흉한 분위기도 얼마간 느껴졌다. 도시는 을씨년스럽고 깔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로와 건물은 보수가 안 돼 있었다. 공습을 염려하여 밤거리의 가로등은 침침했다. 상점들은 대부분 초라하고 진열대의 반은 비었다. 고기는 귀했다. 우유는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석탄, 설탕, 석유는 부족했다. 그 가운데 빵 부족은 정말 심각했다. 이 시기에도 빵을 구하려는 줄은 종종 수백 미터씩 늘어서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람들은 만족해했고 희망이 넘쳤다. 실업은 없었다. 생활비는 여전히 매우 낮았다. 눈에 띄게 곤궁해 보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시를 제외하면 거지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갑자기 평등과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박종훈, <2020 부의 지각변동>

보다 큰 문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마저 꺾이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의 소득격차가 자녀의 성적이나 성공의 결정적 원인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값비싼 사교육에 의존하면서 부모의 소득 수준이 자녀의 성적까지 결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윌리엄 피네건, <바바리안 데이즈>

커다란 파도 속으로 나아가는 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공포와 황홀이 사물의 가장자리 주위를 돌면서 밀려갔다 밀려오며 각기 꿈꾸는 사람을 덮치겠다고 위협했다.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움직이는 물과 잠재된 폭력, 지나치게 진짜 같은 폭발, 그리고 하늘이 들어선 거대한 경기장으로 스며들었다. 장면은 펼쳐질 때도 신화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늘 광포한 양가성을 느꼈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든 있고 싶었다. 나는 떠돌며 바라보고 한껏 들이마시고 싶었지만, 대양이 하는 일에 최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과도하게 조심했다. 거대한 파도는(그 말은 물론 상대적이다. 내가 목숨을 위협할 만하다 생각하는 것도 옆 사람은 그럭저거럭 처리할 만하다 할 수 있었다) 나를 위축시키는 힘의 장場이었고, 오로지 이 힘을 주의 깊게 읽어야만 거기서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커다란 파도를 타는 것에 황홀감이 있다면 그 바로 옆에 거기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한 두어야 했다. 두 상태를 갈라놓는 선은 아주 가늘어졌다. 멍청한 행운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거웠다. 상황이 악화되면 - 그리고 무척 큰 파도 안에 갇히거나 파도타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므로 - 모든 기술과 힘, 판단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누구도 우르르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위엄을 유지할 순 없었다. 그 순간 유일하게 통제할 희망이 있는 건 오로지 공포뿐이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절망'이라는 병에서 '살아가는 힘'을 발견한다.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것을 위해 살 수도 또 죽을 수도 있는 진실을 찾아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희망은 없어'라고 생각하며 그 이상 희망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절망이다. '절망'의 병에 걸리는 것은 동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장점이지만 최대의 불행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정신=자기.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 인간이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신영복, <처음처럼>

[더불어 한길]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석과불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희망의 언어'입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 사랑하는 사람이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 부는 날이 좋다 /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 한 장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만물은 우주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산재해 있으며, 시간 속에 분산되어 있고, 인간의 주변과 그 내부에서 끝도 없고, 희망도 없는 춤을 추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단편이다. 만물이 얼마나 크든 간에, 존재는 그것을 크게 벗어난다. 존재는 어느 것으로부터도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만물 속에 한정되지 않는다. 존재는 거대한 미궁과도 같이, 비밀 암호로 된 메시지 같은 만물을 인간에게 넘겨준다.

 

우리는 과거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가까스로 현재에 산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속에서 산다. 더 이상 미래가 없다거나,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 거기에는 이미 죽음이 문턱을 넘어와 있다.

 

젊음, 조바심, 욕망과, 희망은 만물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저녁 속에는 가슴을 에이는 처연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있다. 실제로, 만물 속에 아름답지 않은 거은 아무것도 없다. 거미, 살무사, 해파리, 배신, 거짓말, 부정의와 범죄 또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루시퍼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죽음도 매우 아름답다. 그런 어느 것도 삶에 대한 욕망과 그들의 자리를 물려 줄 것이고, 그들 또한 그들의 차례가 되어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 줄 터이지만, 어린 아이들의 삶에 대한 욕구와 희망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희망에는 영원의 반영 같은 것이 있다. 아이러니칼한 반영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반영이 들어 있다. 미래가 희망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지옥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것으로 파국을 맞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잔인하고, 부조리하고, 종종 절망스럽고, 거의 언제나 실망스럽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희망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이어져 나간다.

 

인간은 나를 이기고 정복할 만한 놀라운 도구를 발명해냈다. 바로 과학과 지식이다. 그러나 이 도구는 나의 만물의 한정되고 제한된 분야에만 적용된다. 만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일은 그들에게는 허락된 일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 인간은 여전히 만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야무진 환상을 키울 수 있다. 그들은 만물에 대해 조금 알아내자, 곧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는 희망 자체가 그들에게는 영원히 금지되어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짓을 깨닫는다. 그들의 너무도 탐욕스런 손길이 뻗쳐오면, 나는 사방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나에 대해서 조금씩조금씩 더 알아간다는 것은 나에 대해 조금씩조금씩 덜 알아 가는 것이다.

 

당신과 나, 우리는 눈이 가리운 채 어둠 속을 나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에 관해선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결코 나의 끝에는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조금씩 조금씩 광막한 나에 대해 승리를 거둘 것이다. 나는 당신의 근원이자, 당신의 먹이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가지고 무엇을 할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자신을 가지고도 무엇을 할는지 알지 못한다. 신은 그것이 선한 것이기를 바라고, 태양 아래 혹은 다른 곳에서,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여전히 거대한 모험과 위대한 희망을 양식으로 삼기를 바란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식목제(植木祭) /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生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니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사람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듣기 위해 살바도르 달리가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는 서랍장이나 그랜드 피아노를 사하라 사막이나 알프스를 배경으로 하여 그 앞에 놓아두는 것이었다. 단지 대상을 인쇄 문화와 획일적, 연속적 공간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으로도, 현대 예술과 현대 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해방 때문에 생기는 떠들썩함의 정도를 가지고 있는 인쇄 문화가 우리의 정신에 가하는 압력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자아 이미지가 인쇄 문화에 의하여 형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전체 포괄적인 경험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전기 시대가 자신들의 자아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파편화된 사람들인데, 그들을 위해 전문가적으로 파편화된 일은 여가 시간에 대한 단순한 희망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일이 없는 상태를 악몽으로 만든다. 전기의 동시성은 전문가적 학습과 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들 사이의 깊은 상호 관련을, 그리고 심지어 성격에 있어서도 깊은 상호 관련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밀은 자유의 기본 영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을 펼칠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는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에 맞는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결사의 자유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로 또는 속아서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소유 혁명은 인간의 가슴에서 시작한다. 다른 종류의 경제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도록 스스로 허락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생성적 구조가 언젠가는 곁들이 쇼가 아니라 간판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하도록 스스로 허락할 때 소유 혁명은 힘을 얻는다. 바로 그 상상이 공동의 이상이 될 때다. ... 공정성과 공동체, 지속 가능성과 같은 이상을 중심에 둔 경제,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 공정한 결과를 창출해내는 경제, 소수보다는 다수에게 유익한 경제, 번성하는 지구에서 인류가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하는 경제를 꿈꿔야 한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조에는 그늘이 있다. 어떤 신조를 따르든지 불가피한 그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는 일어날 리 없다"라는 안일한 확신을 피해야 한다. 세속주의 과학은 전통 종교 대다수와 비교하면 한 가지 큰 이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그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원리상 기꺼이 자신의 실수와 맹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힘이 계시한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실수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이 믿는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류를 범하기 마련인 인간의 진리 추구를 믿는다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겸손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작고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길 희망한다. 최저임금을 몇 달러라도 올리고 아동 사망률을 몇 퍼센트라도 낮추려는 식이다. 반면,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는 자기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습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특징이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아무런 정보도 없이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지만 가슴은 희망으로 벅차다. 추측은 대부분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추측! 인간의 존재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단어인 듯하다. - 폴 서로우, <상쾌한 맑은 공기>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초월성: 더 큰 우주와 관계들로 점차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의미를 제공하는 힘. 이의 사례들로는 감사, 희망, 영성 등이 있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사랑의 초기 단계에는 반드시 감추는 게 적절해 보였던 많은 비밀을 마침내 드러낼 수 있다는 순전한 안도감이 어느 정도 생긴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할만하거나 정신이 온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상'이거나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유치하고, 공상적이고, 거칠고, 희망에 들뜨고, 냉소적이고, 허약하고, 다중적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연인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눈감아줄 수 있다.

 

 

외국인들 - 심보선

...(중략)....

이곳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몰래 희망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원래 속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은

페이도. 와타나베도. 토마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지금은

좀 전의 과거가 제 바로 앞에 내팽개쳐버린

무국적의 고아라는 사실을.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중략)....

 

 

사랑은 나의 약점  /  심보선

....(중략)....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픈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달라.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문들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안고, 또 어떤 문들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 이상은 안돼!" 하며, 어떤 문들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 하며 후회 속에서 조용히 닫힌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정철, <한 글자>

흠, 이 책의 가장 큰 흠. 사랑, 감사, 배려, 믿음, 희망, 위로. 이런 따뜻한 두 글자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것.

 

 

정철, <불법사전>

'청춘', 한 글자로는 꿈. 두 글자로는 희망. 세 글자로는 가능성. 네 글자로는 할수있어.

 

 

김영하, <말하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느낀 변화라면, 에전보다 사회가 가진 희망의 총량이 많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희망을 품는 것은 고사하고 다들 자기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도 지키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문명보다는 야만을 향해 조금 더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자를 존중하고 사회적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그 반대쪽으로 많이 움직인 것 같다는 거죠.

 

 

김영하, <여행의 이유>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송을 오래하는 전문적인 방송인들도 두 유형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한 부류는 어떻게든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이다. 자신의 노력과 결과 사이에서 작은 인과관계라도 찾아내면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더 잘 통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류가 선택해온 길이다. 합리성을 믿고, 과학적 진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바로 근대성이다. 또다른 부류는 바로 무조건적 믿음에 의탁하는 이들이다. 유능하고 신망이 있는 프로듀서와 그 팀을 믿는 것이다. '아무개 피디라면 믿을 수 있어'라는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인간들을 지배하던 태도, 다시 말해 절대적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행운에 속지마라>

막 패배하고 버림받은 안토니우승게 알렉산드리아에 담담하게 작별을 고하라고 권한다.

불운에 슬퍼하지도 말고, 현실을 부인하지도 말며, 자신의 눈과 귀를 소이려 하지도 말라고 조언한다.

안토니우스, 공허한 희망으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마라.

감정에 휘둘린다면 잠자코 듣기만 하라. 비겁한 자의 탄원과 불평은 삼가라. - 카바피 <신계서 안토니우스를 버리시네>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산이 울렸다>

세상은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살과 뼈에 가려진 희망과 꿈과 슬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불합리하고 잔인했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사람들은 무언가를 믿고 싶은 압도적인 열망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대상을 제시하여 그러한 열망의 지향점이 되어라. 말은 모호하게 하되 희망과 기대는 넘치게 하라. 이성이나 명료한 사고보다 열정을 강조하라. 새로운 신봉자들에게 의식을 거행하게 하고, 당신을 위해 희생할 것을요구하라. 특히 조직화된 종교나 장엄한 대의가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이 창시한 새로운 신앙 체계가 막강한 권력을 창출해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당신은 그들에 대한 모든 지배력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 한 상대방은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 그러면 상대방의 관심과 욕망의 좌절에서 파생되는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처녀왕의 역할을 수행하라. 즉 상대방에게 계속 희망을 품게 하면서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예술을 가장 실용적으로 정의한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개념들을 강력하게 심는 방법을 터득하려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널리즘과 뚜렷이 구분되는 문학 분야에서, 재능 있는 작가 중 이야기의 앙상한 뼈대만으로 독자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침략이나 홍수, 절도 같은 사건이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적절한 감동이나 분노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의 흥미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어떤 사건이 아무리 충격적일지라도 독자들이 무조건 거기에 빠져드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이야기에 대한 몰입이라는 귀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작가 특유의 기술, 다시 말해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고, 생기 넘치는 세부 사항을 조명하고, 이야기 속도와 구조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기술을 갈고 닦으며 더 열정적으로 작업해야 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창의적인 작가들은 (사실을 각색하고, 세부 사항을 생략하고, 인용문을 압축하거나 날짜를 바꿈으로써) 엄격한 정확성을 희생시키는 쪽을 택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범죄적이라고 느끼기보다는 (이는 언론기관이 자기네가 그런 짓을 직접 저질렀을 때 상습적으로 묵과하는 것이다),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고자 정확성 대신 이따금 허구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성급하고 산만한 대중에게 중요한 생각과 장면을 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외국에 나가는 것도 그저 색다른 경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풍경이 내면의 풍경을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가는 것이다. 비슷한 논리로 우리는 그저 실용적인 이유로 스마트폰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제품의 특징을 취하고 싶어한다. 조금이나마 더 '합리적이고' '우하하고' '유능하고' '정확해지고' 싶은 것이다.

 

예술(여기서는 문학, 음악, 영화, 연극과 시각예술을 포함한다)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다. 예술은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처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수많은 심리적 취약점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지혜롭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한 고통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희망을 품은 채 꾹 참고 견뎌낼 뚝심도 없으며, 일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죽음을 적절히 예비할 수도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실뱅 다르니, 마튜 르 루,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무엇보다 사슬의 첫 번째 고리를 푸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죠. 사람에게 희망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 무하마드 유누스

 

 

김형경, <좋은 이별>

1969년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제안한 애도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의 애도 과정에는 슬픔이나 통곡하기가 들어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애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이론이지만 그보다 앞선 1962년, 그랜저 E. 웨스트라는 심리학자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사로잡히게 되는 감정의 10단계에 대해 먼저 발표했다. 그의 10단계는 충격, 감정의 표현, 절망과 외로움, 육체적 불쾌감, 공포, 죄책감, 분노와 적개심, 저항, 희망, 현실 긍정이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희망 오류miswanting’라는 다분히 시적인 이름을 붙여놓은, 보다 일반적인 고통 증세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바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지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와 티모시 윌슨Timothy Wilson은 “일어나길 바라는 일들이 우리의 행복감을 높여주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우리의 행복감을 높여줄 때를 희망 오류에 빠졌다고 말하는 게 옳은 듯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수의 우울한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영원히 희망 오류에 빠져 있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인간은 나이를 먹고, 자신의 내면에서 노화를 촉진시키는 나약함과 무기력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냥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이런 좌절스러운 상태가 어떤 특별한 원인 때문이며, 질병을 고치듯 이 원인으로부터 회복할 희망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달랜다. 헛된 꿈이로다! 그것은 노쇠함이라는 질병이다. 노쇠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들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종교로 귀의하게 되는 이유가 죽음과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하게 터득한 바로는, 종교적인 감정은 그런 상상이나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격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상상력과 감수성이 덜 자극을 받고, 자극을 받는 가능성 또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성에 침투해서 방해를 하던 관념들과 욕구, 잡념들로 인해 간섭을 덜 받아 사고력이 명석해지면, 그제야 구름 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난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빛의 원천을 향하고 그 빛을 보고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현상이 내면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상들에 의해서 더 이상 속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존속하는 무엇에 - 그러니까 절대적이고도 영구한 진실처럼 절대로 우리에게 거짓된 장난을 치지 않는 어떤 현실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감각들의 세계에 생명과 매력들을 부여하는 모든 힘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흘러나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 종교적인 감정이 본질상 너무나 순수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영혼을 매우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모든 다른 상실을 보상해준다.'"

 

 

사이먼 사이넥,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안락한 집을 버리고 외딴 곳에 가서 생고생을 하며 캠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을지도 모를 위협을 무릅쓰고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한 일념으로 대양을 횡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돈 한 푼 없이 지하실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이유는 논리나 사실 때문이 아니다. 희망, 꿈, 가슴, 직감 때문이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무엇이 희망인가?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답은 멀리 있지 않다. 한 때 우리를 울렸던 시인이 말했듯이 오직 "사람만이 희망이다." 주식회사는 사물의 꿈, 자본이 꾸며낸 매트릭스이다. 그것은 자본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불러모아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 고안해 낸 조직이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꿈조차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욕망하지 않는다. 자본은 운동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자도, 운동하는 자도, 꿈꾸는 자도 우리들 인간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 내고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갇혀버린 매트릭스이다. 그 욕망은 홀로 주체가 되겠다는 욕망, 자기는 상처받지 않는 자기동일성 속에 머무르고 다른 모든 타자들은 자기의 속성으로 만들어 자기 자신의 거울 속으로 집어 넣어버리겠다는 욕망이 만들어 낸 괴물이다. 진보신당 강령 전문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나의 자유를 너와의 만남에서 찾지 못할 때, 자유의 주체는 고립된 개인이 되고 객체는 사물이 되며, 둘의 관계는 강제와 폭력이 된다. 사람이 그렇게 홀로 자유의 주체가 되려 할 때, 다른 이를 평등한 주체가 아니라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사물의 욕망에 눈멀어 남을 도구화하는 자는 결국 자기도 사물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의 자유를 위해 남을 사물화하고 도구화하려다, 마지막에는 너와 내가 모두 사물화되어버린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그리고 주식회사는 그런 세계의 불행한 진실의 현실태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바로 우리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도 사람 속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심리적 회개가 세상을 다 바꾸어준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식회사는 욕망의 현실태이다. 홀로주체의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지 못하듯이 그것이 현실화된 주식회사 역시 지속 가능한 조직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타인에게 손 내밀지 않고 다만 타인을 도구로 만들어 자기의 무능력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을 사들여 거대한 기계로 만든다. 그 기계는 주인의 의지에 완벽하게 따라주는 기계 곧 자동기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계는 없다. 유기체의 활동은 상호의존성에 있고 인간의 활동은 서로주체성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회사에서 정작 노동하는 인간은 기계의 부품이 되어버린 인간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세계의 끝 여자친구> 펴내면서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

조선 인민의 정신에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함이라. 천여 년 조선은 형식만 조선일 뿐, 정신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구나. 처음 배우는 교과서가 이러하니 어릴 때부터 노예 정신이 뇌수에 박혀 평생 학문이 모두 노예 학문이요, 평생 사상이 노예사상이다. 이처럼 비열한 사회에 소위 영웅은 누구이며 유학의 현자는 누구인가. 소위 충신은 누구이며 공신은 누구인가. 모두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열한 근성을 뿌리 뽑지 않고는 조선 민족이 자강자립 정신을 품을 수 없다. 이것을 빨리 바꾸어 인민의 뇌수에 조선 역사가 들어서게 하면 민족이 어떤 곳에 표류할지라도 조선은 망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의 희망도 여기서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을 것이니 명심하고 분발하여라. - <몽배금태조>, 박은식 지음, 이동보 옮김

 

 

해피엔딩이란 바로... 앞만 보고 가는 것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남자보다 내 자신을 찾는 거에요.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He's Just Not That Into You, 2009>

 

 

야마시타 히데코,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입구에만 정신을 빼앗기기 쉽죠. 무언가를 넣어 '들이는' 것에만 열심이고, 그것을 '내보내는' 것에는 게으르죠. 그 결과, 출구가 막히게 됩니다. 출구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출구 없는 터널만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아무리 괴로운 인생의 터널이라도 출구라는 희망이 있기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어둠 없이는 빛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인생이라고 다를 리 없다. 행복은 여간해서는 그 실태를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불행을 배우는 순간, 불행과 다른 행복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행은 생각만큼 손해는 아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오직 불행한 가운데 키워지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운명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한, 희망의 본질에서 빛나고 있는 삶의 비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인생은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 한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살아온 의미에 대한 해답은 정해지지 않는다.

 

 

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모든 것은 돌고 돈다. 가장 앞서갔다고 생각되는 게 가장 처진 게 될 수도 있다. 지금 가장 낙후된 고장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앞선 희망의 땅이 될 수도 있다. 발전이란 이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토에 마지막 남은 보석 같은 땅이여, 영원하라.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그래서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 볼 때,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조지 오웰, <동물 농장>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들이 아는 한에 있어서는 삶이 예전에 항상 그랬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굶주렸고, 짚을 깔고 잤으며, 웅덩이 물을 마셨고, 들에서 일했다. 겨울에는 추위, 여름에는 더위와 파리 때문에 시달렸다. 가끔 나이 많은 동물은 희미한 기억을 쥐어짜서 존스가 추방된 지 얼마 안 되던 혁명 초기가 지금보다 살기가 나았는지 모했는지 판단해 보려고 애썼다. 그들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현재 생활과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기준으로 삶을 수 있는 것이라고 스퀼러의 통계표밖에 없었는데, 그 표는 한결같이 모든 상태가 자꾸만 나아진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든 간에 그들은 이제 그런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늙은 벤자민만은 그의 오랜 생애의 모든 상세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다고 공언하면서, 삶이란 그렇게 나아지거나 그렇게 못해진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배고픔과 고생과 실망이 변함없는 삶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물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동물 농장의 구성원이라는 명예심과 특권 의식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어린애 같은 공상도 좋은 의도로 사용되었을 때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 계획들이 찾아옵니다. 그 결과가 전과 다름없이 헛될 수도 있습니다. 헛수고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생의 쓴맛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쓴맛에서 고유의 향취를 찾아내는 것도 시도해볼 만한 노력입니다. 시간의 필요성, 시간의 절약에 무심했던 자신을 탓하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무엇인가 내 안에 남겨진 성과가 있을 것이다, 나만의 개성과 인간적인 장점 등이 그 시간들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라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낸 나만의 성과 위에 다가올 시간들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둡니다. 어리석음에는 어리석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과 뭔가를 찾아내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미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기억입니다. 젊은 날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대가로 오늘은 비참해졌고, 내일을 두렵게 만든 잘못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기에 우리는 희망을 찾고 싶다는 열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기억해야 될 현명한 꿈이 아닐는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사람은 눈앞에 닥친 시련과 고통과 외로움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겪은 고난은 그를 병들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세계'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눈물짓습니다. 그에겐 눈앞의 세계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만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계에서 마음껏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해야 될 점은 그 세계엔 나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희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 중 하나가 지적인 생활에의 동경이라고 생각하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국기행>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론이고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자식과 손자들이 살게 될 후대 역시 고난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고난은 생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커다란 자극을 주면서, 선하고 악한 모든 충동을 자극하여 각종 장애물들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에 극복의 노력이 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계속 잠들어 있거나 꾸물대거나 제멋대로였을 힘들을 모두 동원하게되고, 이때 우리가 동원하는 그 힘들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나 더 나아가 인류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도약하기 위해 용수철처럼 몸을 긴장시킬 때 인류의 몸속으로 우주 전체의 생명 에너지가 흘러든다. 우리가 결실 없는 안락한 순간에 망각해 버리는 저 분명한 진실이 이럴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류는 비록 불멸의 존재는 못 되지만, 이런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영원불멸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더글러스 호프스태더,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우리는 무엇이 타당한지 또는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하나의 예술이며, 그 과정이 객관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 철석 같은 논리적 원칙이나 추론 따위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움과 단순성의 감각에 깊이 의존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1) '참은 실현될 것 같지 않은 희망이다'라거나, 2) '인간의 지능은 원칙적으로 프로그래밍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1) 참이란 너무나도 포착하기 어려워한 인간이나 인간 집단이 완전히 획득할 수 없고, 2)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의 수준에 이르거나 심지어 능가한다고 해도, 예술, 아름다움, 단순성이라는 문제에 여전히 시달릴 것이며, 인공지능이 지식과 이해를 탐구하는 경우에도 끊임없이 이런 문제들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키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법의 일차 목표다. 즉 좋은 인격 형성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입법자들은 시민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어 시민을 선량하게 만드는데, 이는 모든 입법자의 희망이며, 그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은 헌법과 나쁜 헌법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 교육은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을 기르고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떤 습관을 키우느냐에 따라 ... 많은 차이가 생긴다. 사실 그 차이는 상당하며, 어쩌면 '모든' 차이가 이때 형성되는지도 모른다." 미덕이 깃든 행동을 하다 보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몸에 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희망을 가져라. 욱하는 성질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모든 욱하는 성질은 바로 자신의 머릿속, 즉 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머리, 자기 뇌니까 자신이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이 바꿀 수 있다. 항상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완벽하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삶을 훨씬 나아지게 만들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호프 자런, <랩걸>

씨앗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대부분의 씨앗은 자라기 시작하기 전 적어도 1년은 기다린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없이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각각의 씨앗이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 씨앗만이 안다. 씨앗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그 기회를 타고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듯 싹을 틔우려면 그 씨앗이 기다리고 있던 온도와 수분, 빛의 적절한 조합과 다른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씨앗은 살아 있다. 300년 동안 우뚝 선 떡갈나무가 살아 있듯 그 아래 떨어져 있는 도토리도 모두 살아 있다. 씨앗도, 나이 든 떡갈나무도 자라지 않고 있다. 둘 다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의 기다림은 다르다. 씨앗은 번성하기를 기다리지만 나무는 죽기를 기다린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그다지 가망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기다린다.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 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 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의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는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이 성공하면 수확도 엄청나게 크다. 뿌리가 필요한 것을 찾게 되면 부피가 커져서 주근이라고 부르는 곧은 뿌리로 자란다. 커지면서 기반암을 쪼개는 힘까지도 발휘하는 주근은 식물 전체의 닻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내내 하루에 몇 갤런(1갤런은 약 3.79리터)의 물을 빨아들인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해낸 어떤 기계적 펌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주근은 곁뿌리를 내보내 옆에 서 있는 다른 식물들의 뿌리와 얽혀서 위험 신호를 주고받는다. 시냅스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뉴런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뿌리 시스템 즉 근계의 표면적을 모두 합하면 이파리 면적을 모두 합한 것의 100배가 넘는 경우가 많다. 땅 위의 모든 것, 정말이지 모든 것을 제고해도 멀쩡한 뿌리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비웃듯 다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희생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된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던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를 자연적 과정 - 계절의 순환이라든가 사람의 일생과 같은 - 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연루되고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란 '의식의 각성에서 비롯된 자연과의 결별'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이성의 발휘를 통해서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작용을 가해온 인간의 오랜 투쟁이다. 그러나 근대는 그 투쟁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제 인간은 환경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이해하고 그 자신에게까지 작용을 가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이성에 새로운 차원이, 그리고 역사에도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진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역사의식이 강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자기를 의식하며, 따라서 역사를 의식한다. 그는 자기가 지나온 희미한 어둠 속의 가냘픈 빛이 그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어두컴컴한 곳까지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그 희미한 어둠 속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앞에 놓인 길에 대한 그의 갈망 또는 불안은 뒤에 놓인 것에 대한 그의 성찰을 재촉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끝없는 역사의 사슬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출생과 소유의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모든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면, .... 사람들은 마음 놓고 무한히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대한 것을 이루라는 소명을 타고났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경험을 통해 수정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인 경우에 극심한 불평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평등한 경우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민들이 풍요 한가운데서 기이하게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나는 부자들이 누리는 것을 희망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가난한 시민을 미국에서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 이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 덕분에 특히 처음에 젊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행운아 들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절망한다. 그들의 영혼은 비통함에 숨이 막힌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삶을 보람 있게 해주는 것들은 수중의 돈이 감소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내적인 자주성은 지금까지 결코 수입의 문제가 아니다. 박식함이나 예의범절도 마찬가지다. ... 정중함, 친절함, 다정함, 도와주려는 마음, 삶을 쾌적하게 해주는 이런 모든 것은 참으로 무한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여건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게다가 다행히도 인간의 모든 미덕도 이와 마찬가지다. 도덕률의 경우에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는 명령이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을 단념하고 저것을 회피하는 것으로써 그 명령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에 그치는 데 비해, 미덕은 무한하다는 불굴의 장점을 가진다. 사랑하거나 신뢰하거나 희망하는 데는 원래 한이 없는 법이다. 또한 누군가가 도를 넘어서 현명하거나 용감하거나 정의롭거나 신중했다는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결핍의 시대에 우리는 미덕만큼은 자책하지 않고 마음껏 활용해야 할 것이다. 넘치는 풍요의 시대에 조금 유행에 뒤떨어졌던 많은 미덕들이 이제 결핍의 시대에 다시 르네상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자원 고갈, 복지의 후퇴가 꼭 분배으 싸움으로 끝나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재탄생, 우리가 이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추상적인 사회제도에 위임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경제 위기가 무척 불편하긴 하지만, 이런 즐거운 면도 있다. 우리가 서로 도우을 주고받은 경우에 오래전에 잊은 우리의 여러가지 능력을 다시 개발할 수 있다. 인간이 심각한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이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위기는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E. F. 슈마허, <굿워크>

이런 상황에서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른 훌륭한 문명세계와 마찬가지로 한때 서구 문명의 목표도 무의미하게 아무 목적 없이 떠돌며 탐닉하는 인간을 존재의 어두운 숲에서 구출하여 해방의 진리를 얻을 수 있는 높은 산으로 이끄는 데 있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모든 민족의 전통적인 지혜입니다.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지혜를 거부하고, 인간 영혼에 신과 이어주는 수직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현재의 삶에서 그저 한 발 더 올라가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삶보다 한 발 나아진다는 희망은 다름 아닌 부자가 되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하며 달나라나 우주로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어떻게 보면 도브 사이드먼이 '지속적 가치sustainable values'라고 표현한 솔직함과 겸손함, 정직성, 상호존중의 정신을 고취할 수 있을지 더욱 진지하고 절실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이는 모든 학부모와 학교장, 대학 총장, 정신적인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 이러한 가치는 신뢰와 사회적 결속,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을 낳는다. 이는 사이드먼이 '상황적 가치situational values'라고 말한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상황적 가치란 지상에서든 사이버공간에서든 그저 '상황이 허락하는 건 무엇이든 하는 것'을 말한다.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로 어떻게 윤리적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는지 조언해주는 LRN을 경영하는 사이드먼은 지속적 가치는 '이중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가치는 건강한 상호의존성과 신뢰를 낳는 행동을 하는 이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기주, <말의 품격>

형식적인 위로나 격려보다는 마음의 장막을 먼저 풀어헤치고 다가와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라고 덤덤하게 말해주는 이들의 위로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내 내게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그런 적당히 따뜻한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하나의 상처와 다른 상처가 포개지거나 맞닿을 때 우리가 지닌 상처의 모서리는 조금씩 닳아서 마모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상처의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지면 그 위에서 위로와 희망이라는 세순이 돋아나는 건지도 몰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실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 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로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 네루다의 노벨상 연설

 

 

김영하, <오직 두 사람>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내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 중에서 이성을 마지막으로 소개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사회에 일정 수준의 문명이 자리 잡으면, 폭력을 그보다 더 줄이는 데 가장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바로 이성이다. 다른 천사들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 기간 내내 우리와 함께 했지만, 그럼에도 기나긴 세월 동안 전쟁, 노예제, 독재, 제도적 가학성, 여성 억압을 방지하는 데 별반 성공하지 못했다.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유도가 너무 낮고 적용이 너무 제한적이라서, 최근 수십, 수백 년의 발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성 친화적 가치들은 왜 폭력을 줄일까? 남녀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차이가 우리의 심리에 남긴 유산이 한 원인이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성적 접근성을 놓고 서로 경쟁하려는 동기가 크지만, 여자는 자식을 고아로 만들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에서 물러나 있으려는 동기가 크다. 제로섬 경쟁에 집착하는 것은 늘 여자보다는 남자이다. ... 여성화는 다른 이유로도 평화적 발전이다. 여성의 이해를 선호하는사회적, 성적 구조는 남성 간 폭력적 경쟁이 증식하는 늪에서 물을 빼버린다. 결혼이 그런 구조의 한 예다. 결혼한 남자는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고, 범죄자로 살 가능성도 낮다.  ... 사회가 여성의 이해를 존중하는 수준과 그 사회의 폭력률 사이에는 연관 관계가 하나 더 있다. 폭력은 그냥 남자가 많아서 생기는 문제라기보다 젊은 남자가 많아서 생기는 문제이다. 적어도 두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젊은 남성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전쟁과 내전을 많이 치른다. ... 여성화의 다양한 형태들은 - 직접적인 정치 권한 부여, 남성적인 명예의 허세를 꺾기, 여성이 원하는 형태의 결혼, 여자아이가 태어날 권리, 여성이 자신의 생식력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 등등 - 폭력을 줄인 요인이었다. 이 역사적 행진에서 뒤처진 지역들은 폭력 감소에서도 뒤처졌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무지몽매한 나라들에서도 여성의 권한을 요구하는 억눌린 목소리가 있다. 그리고 많은 국제 조직이 서둘러 그런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당장은 아니라도 장기적으로 세계에서 폭력적 충돌이 좀 더 감소할 것임을 암시하는 희망적인 신호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계획은 실행하면서 다듬어라.  계획을 세우는 일은 즐거움과 쾌감을 동반한다. 장기여행의 계획을 세우거나 마음에 드는 집을 상상하거나, 혹은 성공할 업무 계획을 면밀하게 세우거나 인생 전반의 계획을 세우거나. 이 모든 것이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만드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작업이다. 그러나 즐거운 계획 세우기만으로 인생을 끝마칠 수는 없다. 살아가는 이상 그 계획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도우미 역할만이 맡겨질 뿐이다. 또한 계획을 실행하는 단계가 되면 갖가지 장애, 차질, 울분, 환멸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든가, 도중에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경에 맞부딪치는 순간순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렵게 생각지 말고 상황에 맞추어 계획을 다시 다듬어 나가면 된다. 이것으로 즐겁게 계획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 - 여려가지 의견과 잠언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구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나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방법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믿지만 잘못된 실천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우유를 좋아하면서 쇠뿔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과 같다." "신념을 갖고 그렇게 하든 신념 없이 그렇게 하든, 그는 우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를 얻는 올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젖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도 우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방법이 구원으로 이끌어주며, 이때 믿음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원용찬 (베블런>, <유한계급론>

문학작품은 쇼핑카트처럼 시대의 소재를 담아 내는 수레이기도 하다. 우리도 개발연대의 성장과정에서 드리워진 사회적 모순들이 많은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수업시간에 가끔 소개해 주는 황석영의 <객지>와 <삼포 가는 길>이나 한수산의 <부초>는 산업화에 밀려 고향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소외계층을 그린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은 폭력, 억압, 빈곤, 물질만능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쏘아 올린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풍요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날마다 10만 명이 기아니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식은,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북반구 국민들의 의식은 이런 상태를 오래 참지 못할 것이다. 변화된 의식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마따나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 우리는 인류의 6분의 1을 파멸로 몰아넣는 세계질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지구에서 속히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누가 인간성, 인정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인류로부터 배제되고 남모르게 파멸해가고 있는 이런 "고통스런 분파"(파블로 네루다)는 다시 인류 속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행복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기에 내 삶은 이미 완벽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완벽한 것은 그 삶에 고통과 좌절과 상처와 아픔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와 내 안을 비추기에 완벽한 것이다. 만약 고통도 좌절도 상처도 아픔도 없는 삶을 완벽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신이 만들어놓은 기계에 불과하다. 완벽한 우주는 우리에게 부족이라는 틈을 통해 고통을 환희로, 좌절을 희망으로, 상처를 치유로, 아픔을 즐거움으로 바꾸어내는 방식으로 그 완벽함을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비하인드, <제주, 소요>

환경의 변화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나는 그 기회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형태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변화 앞에선 모든 일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인간의 행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른 슬픔 속에서도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생각되는 고민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심각한 고통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도 인간의 자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과 희망을 자기 이상의 존재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화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발견할 수 없는 일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삶에서 겪는 고통의 시기는 어두운 동굴에 갇혀 지내는 것과 같다. 희망의 빛이 차단되고 외부 세계가 주는 즐거움도 사라진다. 이 경험은 우리를 깊어지게 한다. 시력이 좋아지게 하기 위해 갓난아기때 일정 기간 캄캄한 방에서 키우듯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은 삶을 깊고 넓게 보는 통찰을 준다. 밝음 속에서만 머물면 시력은 깊이감을 얻기 어렵다. 고통은 우리를 동굴 안에 가두며, 영원히 외부의 빛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삶이 이대로 끝나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을 통과하면 어느 날 봄 햇살이 느껴지고, 터질 듯한 꽃망울들이 보이고, 바람을 이겨 내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가온다.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싶은 돌틈의 풀꽃에서 힘을 얻는다. 그 눈뜸,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 하나만으로도 어둠의 시기는 가치가 있다. 삶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이 어둠 명상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고, 정화하고, 자기를 전체적으로 보는 기회이다. 그 영적 어둠의 시기를 통해 자기 안의 신성과도 연결된다.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 주는 신비이다. ... 어두울 때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때 빛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도 썼다. '어둠 속에서 눈은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김용택 엮음,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미라보 다리 ㆍ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 사랑도 흐르는데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네

 

서로의 손잡고 얼굴을 마주하고

우리들의 팔로 엮은

다리 아래로

영원한 눈길에 지친 물결들 저리 흘러가는데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네

 

사랑이 가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이 떠나가네

삶처럼 저리 느리게

희망처럼 저리 격렬하게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네

 

하루하루가 지나고 또 한 주일이 지나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네

 

 

질투는 나의 힘 ㆍ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어쩌면 ㆍ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가보지 못한 골목길을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하면서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시인이 된다는 것은 /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행동의 끝까지 / 희망의 끝까지 / 열정의 끝까지 / 절망의 끝까지 //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 시인이 된다는 것은 /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

 

 

구길본 외 16명, <길에게 길을 묻다>

내마음으로 섭취되는 것은 독초도 있고, 약초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탐욕, 시기, 질투, 애증, 분노, 경멸, 무시, 사기, 배반, 억압, 지배, 비난, 비판, 근심, 걱정, 슬픔, 비탄 등 부정적 생각과 행동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초와 다름없을 것이다. 반면 사랑, 자비, 연민, 희생, 봉사, 인내, 신뢰, 자유, 평등, 조화, 칭찬, 공경, 존중, 희망, 기쁨, 희열 등 긍정적 생각과 행동은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약초에 해당된다. ... 걷는 것은 세심洗心하는 것이다. 걷기는 일상의 탈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재탄생시킨다. 몸과 마음을 자연과 생명 본원의 청명한 기운으로 환원한다. - 구길본, <걷기와 세심>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 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 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 가자미, 여덟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인간에게 파랑새가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행복도, 모두 찾아 나서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감을 따야 하듯이 행복도 즐거움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여행은 '파랑새'를 찾기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수단이다. 여행은 여행지에서 돌아와 일상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 갔다 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느꼈던 새로움을 다시 감각해야 한다. 그런 순간에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존재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떨림, 전율, 절묘한 환희. 이것이 여행의 마음, 여심旅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내가 뿌린 말의 씨앗들은 어디서 어떻게 열매 맺었을까.... 향기롭고 지혜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해 /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쳐야 합니다. // 거짓된 말 한마디가 삶을 헛되게 하고 / 진실한 말 한마디가 삶을 알차게 합니다. // 허영에 찬 말 한마디가 근심과 두려움을 주고 / 신념에 찬 말 한마디가 희망과 광명을 줍니다. //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 칭찬의 말 한마디가 삶의 길을 평탄케 합니다. //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하고 / 사랑 담긴 자비의 말 한마디가 삶을 복되게 합니다. // 겸허한 말 한마디가 우정을 두텁게 하고 / 덕스러운 말 한마디가 편안함과 넉넉함을 줍니다. // 차분한 말 한마디가 고요함을 자아내고 / 깊이 있는 말 한마디가 잔잔한 기쁨을 줍니다. // 때에 맞는 위트 있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 조리에 맞는 말 한마디가 지혜를 자아냅니다.

 

성자들도 우리와 같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도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았고,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비난과 모함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괴로워했고 더없이 슬픈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은 요즘 우리들과 비교해 한 치도 다름이 없다. 성자들은 이기적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웠다. 분노와 절망보다는 자에와 희망의 등불을 밝혔다. 나와 너, 민족과 계급, 피부와 남녀의 금 긋기를 부정하고 평등과 상생의 세계를 꿈꾸고 가꾸었다. 우리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삶이다.

 

중국 작가 루쉰의 말대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그러므로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 길은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가꾸는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의 길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신앙한다는 것, 수행한다는 것,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 해탈과 하나님 나라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 우리'의 길이다. ... 예수와 붓다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상식과 보편의 세계를 떠나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연민, 지혜, 자애, 겸손, 청빈, 순결, 평등, 정의, 평화를 저버릴 때 그 자리를 강건하게 지킨 그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특별함이다. 삶의 기적은 현실에서 지극히 합당한 진리의 실천으로만 이루어진다.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희망을 극복한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이 완벽해야 한다. 부족함 없어야 하고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모든 희망의 극복이 필요하다.

  • 그 오랜 세월의 몸부림과 분투 끝에 세익스피어는 마침내 모든 희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그렇게 그는 자유로워졌다. - 영국 기행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3인류>

결혼은 경험에 대한 희망의 승리이다.

 

 

장 그르니에, <섬>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 -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 - 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혁명에대한 희망은 물론 별도로 쳐야겠지만)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리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것들이 그리도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 내고자 할 때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밖에는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값을 지닌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왕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우리가 오만한 무지의 결과를 깨닫고 겸손해진다면,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다. 우리는 세계를 파괴로 몰아가는 기업의 무지와 오만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우리의 무지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를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확실한 지식과 경험과 전통, 그리고 애정과 양심과 품위와 공감, 나아가 영감과 같은 내적인 자극에 의지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마음의 변화, 부활, 회개, 계몽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 있고 어떤 종교와도 통하지만, 개인적으로 유교의 <대학>에 나오는 실용적인 방법을 좋아한다. 다음은 에즈라 파운드의 번역이다. "자기 내면을 직시하고 행동하는 데서 나오는 빛을 온 왕국에 널리 퍼뜨리기를 원했던 노인들은 우선 자신의 나라에 훌륭한 정부를 세웠다. 자신의 나라에 훌륭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우선 자신의 가정에서 질서를 확립했다. 가정에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우선 자기 자신을 단련시켰다. 자기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우선 자신의 마음을 정화했다.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우선 어지러운 생각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했다. 생각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오늘날의 인류는 완전한 삶에 대한 생각 자체를 잃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삶의 바람직한 마무리라든가, 고통과 슬픔과 피로로부터의 반가운 해방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형벌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연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평균수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더 있으리라는 유일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더'를 끝없이 욕망하는 것은 불완전을 인식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며, 불완전은 '더'를 향한 끝없는 욕망의 결과다. 이것은 죽음의 바퀴다. 이 바퀴의 회전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피상적이고 불행할수록 우리는 더 빠른 진보를 원한다. 얇은 얼음판 위에 있을 때 더 속도를 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에 대한 무제한의 욕망에 굴복하는 행위는 귀중한 것을 모조리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을 전체에 포함시킬 때만 누릴 수 있는 형태적 완전성과 품위와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모두 포기해야 하며, 영원히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며 탐욕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이 상상에 의해 완전해질 수 있는 하나의 인공물이라는 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부도덕하다면 인간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은 무익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우리는 생물학 분야의 다윈주의만큼이나 강력한 기중기가 물리학에서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령 다윈주의와 맞먹는 아주 흡족한 기중기가 물리학 분야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비교적 약한 기중기들도 인본 원리로 뒷받침되면 지적 설계자라는 자멸하는 스카이훅 가설보다 더 낫다.

 

 

제러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3차 산업혁명은 적어도 1차, 2차 산업혁명에서 사실상 소외되었던 지구상 극빈국들도 다음 50년 동안에는 분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의 막대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시장과 비공식 경제 부문에서 단순 노역과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인류의 40퍼센트에게 그 고역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안위 수준을 확보해 주는 것, 나아가 그들이 자유롭게 사회적 자본을 추구하면서 심오한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위압을 느낄 정도로 벅찬 과제다. 산업이 유발한 기후변화를 완화할 수 있도록 경제생활을 재조직해야 할 필요성까지 감안하면 더욱더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최소한 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희망을 갖는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공동체는 어떤 장소를 발판으로 삼기 때문에 그곳의 성공은 그 장소의 성공, 그리고 토양, 삼림, 초지, 동식물, 물, 햇빛, 대기 등의 자연적 환경의 성공과 무관할 수 없다. 자연과 인간, 이 두 경제는 서로를 부양한다. 각자가 영구적이고 살기 좋은 삶을 추구하는 서로의 희망인 것이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그는 바뀐다. 산전, 수전 두루 겪는 여행을 하며 "낙관, 희망, 미소, 흥미로운 인상, 인간적으로 깊은 만남"의 기회를 잡는다. 다른 사람의 친절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 것도 큰 변화다. 그는 처음에는 물병을 채워주거나 먹을거리를 주거나 잘 곳을 마련해주면 거절하거나 돈으로 갚으려 했다. "누가 나에게 뭔가를 주면 나도 반드시 뭔가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 해서다. 하지만 친절과 배려는 다른 무엇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의를 거절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쁨을 앗는 일이었다. 여행은 녹인다, 우리의 아집과 자존심을.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훨씬 향상된다는 사실도 경험한다.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 흥미를 보이며 마음을 열고, 긍정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다. -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 쿠르트 파이페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데 종교가 믿음과 희망과 자비의 원리이듯이, 충성심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와 고향땅을 향해서 갖고 있는 자비의 원리이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 - 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셰익스피어, <오델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슬픔도 끝나는 법, 섣불리 희망을 걸면 슬픔만 커질 뿐이오. 지나간 불행을 슬퍼하는 것은 새 불행을 초래하는 것, 화를 만나 항거할 길이 없을 때는 참으면 그 항행도 조소거리로 변하오. 도둑을 맞아도 미소를 짓는 자는 오히려 도둑한테서 무엇인가를 빼앗는 셈이고, 무익한 슬픔에 잠기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셈이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무엇이 나의 진정한 희망이고 꿈인가?' 이것을 계속해서 묻고 대답해야 내공이 단단한 고수로 거듭날 수 있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가정생활, 우정, 성, 출산 , 건강, 교육, 자연, 예술, 시민정신, 스포츠 등 시장이 침입해온 많은 영역에 어떤 규범이 합당한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러나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의미와 목적, 재화를 지배해야 하는 가치를 놓고 깊이 사고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좋은 삶에 상충되는 개념에 관해 깊이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가끔은 발을 들여놓기를 두려워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반대에 부딪힐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도덕적, 정신적 확신을 공공의 장에 내보이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맞서지 않고 뒷걸음질 친다고 해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으롯써 우리는 시장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허용하게 되는 셈이다. 시장지상주의 시대는 공공 담론에 도덕적, 정신적 실체가 상당히 부족했던 시대와 일치한다. 시장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다.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소비지향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의 확산이 중단되지 않는 한 빈곤과 사회분열과 생태계 붕괴를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 기술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것과 함께 지역 자원과 지식, 기술의 최대한 활용을 장려함으로써 생태와 문화적 다양성 유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출발점이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이라면 그 필연적 결과물은 다양성의 복원이라 할 수 있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거꾸로 배열된 비늘)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이정우 외,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모든 것은 선택이야. 그러나 선택은 예정되어 있지." 표면에서의 선택은 사실상 심층에서의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희망은 소용없다. "인간은 늘 희망에 기만당하지. 희망은 인간의 강점이자 약점이야."... 기계는 법칙성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은 희망에 따라 움직인다.

 

 

정지훈, <무엇으로 세상을 바꿀 것인가>

열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열정만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에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찾아낸 문제점을 의사결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나를 '중심'에 두어서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열정과 희망'만으로 부족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서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가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일단 문제를 찾아내고 사회적인 가치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받는다. 보상의 크기와 그 시기에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다.

 

목적을 향해 움직일 때,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역량을 통해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때 비로서 진정한 '열정과 희망'이 피어오를 것이다. 이때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각의 역량이 다른 열정적인 동료를 최대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태양이 내리비치는 인도의 시장에 앉아 칠리를 먹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녁 무렵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며 칠리를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근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칠리를 먹어도 단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계속해서 먹고 있는 거요?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오?" 남자는 이제는 고통에 익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참고 먹어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 않소? 지금 포기한다면 여기에 바친 내 시간들이 얼마나 아깝고 무의미하겠소? 이제 이것은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문제가 되었소."

당신과 나의 삶이 그러하다. 이제 그것은 단맛 나는 칠리에 대한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코끼리를 갖게 될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갈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포기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린다. 당신은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된 활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김선현, <그림의, 힘>

피터르 브뤼헐,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이 그림은 멀고 불확실한 바다와 가깝고 확실한 땅을 대비시키며, 내가 발 딛은 현실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 부릅니다. <하버드 대학교 건강저널>은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혹하기보다 현재에 몰두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수면의 질이 높아지며 혈압이 내려간다고 밝혔습니다. 요는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추는 해는 언젠가 지게 될 것이고, 우리에겐 원하든 원치 않든 편히 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게 허락된 매 순간을 소중히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변화나 희망도 생기지 않을까요.

 

 

마루야마 겐지,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

복잡한 탓에 거짓이 많은 사회라는 조직, 거기서 생겨난 문명과 지위와 재산의 격차로 인해 생물로서 누려야 마땅한 '멋대로사는' 지상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끝내는 편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이야말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허황된 희망조차 실현되지 않고, 실제로는 조촐한 휴식의 장을 확보하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실망하면서 행복이 멀어짐을 절감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강한 자를 우러르며 우습기 짝이 없는 영웅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현재란 확실하지도 않고 일정하지 않으며, 미래는 현재의 희망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실체가 없고, 과거는 실체가 없는 현재의 기억과 같은 것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돈을 주고 샀지만 결국 쓸모없다고 결론이 난 온갖 것의 길고 긴 목록을 작성해 보았다. 내 희망이자 목표는 이 목록에 더해지는 내용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고 시간이 흘러 그것이 가능해지면서 삶은 훨씬 더 정돈되었다.

 

 

박노해, <다른길>

씨알을 심는 농부는 기다림을 산다.

기다림은 씨앗이 땅에 심기었다는 믿음,

지금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

어둠 속 대지에서 하루하루 커나간다는 믿음.

나에게 진정 간절한 기다림이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종자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 매달아진다.

수백 수천의 옥수수 알들은 단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 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유쾌함은 멋진 성과이고, 희망은 축하할 일이다. 낙천주의가 중요하다면, 이는 우리가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이 진실은 재능을 좋은 인생의 기본 조건으로  보는 엘리트적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많은 경우에 성공과 실패는 다름아닌,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 그리고 자신의 정당한 몫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쑫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로 가름된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슬픔을 느낄 때 당신은 존경할 만한 경험에 참여하고 있으며, 나, 즉 이 기념비는 그 경험을 위해 헌정되었다. 당신의 상실감과 실망, 날개 꺽인 희망과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비탄은 당신을 진지한 회합의 일원으로 고양시킨다. 그러니 당신의 슬픔을 외면하거나 내버리지 말라.

 

예술은 기념하고, 희망을 주고, 고통에 존엄하게 공감하도록 하고, 균형 회복과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자기 이해와 소통을 돕고, 감상을 고취하고 그 지평을 넓히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훌륭한 예술로 간주하는가?

우리가 그 작품을 좋게 보는 이유는 그 작품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그 예술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탐구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응해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망각, 희망의 소실, 존엄 추구, 자기 이해의 어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같은 우리의 약점을 얼마나 보완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거나 나쁘게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다가가기에 앞서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위안하고 되찾으려 하는지 안다면 유용할 것이다.

 

 

강신주, <감정수업>

회한 (CONSCIENTIOE) : 무력감을 반추도록 만드는 때늦은 후회, <전락> 알베르 카뮈

"회한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회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과거와 달리 더 이상 무기력하고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과역 그럴까?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지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절망 (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환희 (GAUDIUM) : 원하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의 기적, <판결> 프란츠 카프카

"환희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희망 (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

 

 

<작가란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는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박웅현, <여덟단어>

집 앞 화단에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대추나무는 꽤 크게 자라기 때문에 평평한 땅에서 커야 좋아요. 그런데 그만 씨앗이 좁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쩔까요? 좁은 땅에 떨어져버렸다고 대추나무가 자살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올라옵니다. 삐뚤어지고 꺽이겠지만 거기에서 최선을 다해 살 겁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을 필요 없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직조되는 게 인생이니까요. 꿈과 희망의 여지를 남겨둘 줄 알아야 합니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인간이 자연을 능멸하고 기술권력에 도취함으로써, 문명 그 자체의 파산에 이르고 있다. ... 이 파산한 인간이 사랑, 희생, 희망으로 정신의 경건성을 회복해야 한다' - 영화 "희생"

 

인간의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들 큰일의 첫번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성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고, 두번째 것은 '지옥의 조건에 대한 거부'이며 세번째 것은 '야만에 대한 저항'이다. 의미, 희망, 정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지주와도 같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요 중에 75%는 환상과 이상, 희망과 애착에서 비롯된 낭만적인 것들이다. 즉, 돈지갑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을 단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가격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한다는 것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조건은 어떤 물건의 가격은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들인 노동의 양이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기술>

희망은 내 곁에 있다 (자크 쿠스토)

우리가 논리적일 때 미래는 사실 암담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인 것 이상이다. 우리는 인간이며, 신념이 있으며, 희망이 있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우리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강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둘 다 드는 힘은 똑같다.

 

건강이 전부다 (아랍 격언)

건강을 가진 사람은 희망을 가졌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

He who has health, has hope; and he who has hope, has everything.

 

속도를 늦출 때 (스웨덴 격언)

겁은 적게, 희망은 많게, 먹는 것은 적게, 씹는 것은 많이, 투정은 적게, 호흡은 많이, 수다는 적게, 대화는 많이, 사랑은 더 많이. 이렇게 살면 모든 선한 것들이 네 것이 될 것이다.

 

잠재의식에 말 걸기 (그렌빌 클레이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그리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성격이나 성품에 새겼으면 하는 구체적인 희망을 자신에게 제안하라. 자신에게 타이르고 고함치듯 이런 제안을 하되, 마음에 깊이 새겨질 때까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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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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