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속 톱니바퀴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안정을 위해 애써 모른체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린치핀의 삶을 동경하는 것 아니지만 어렵지만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예술가로서 변화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삶은 공감한다.

 

 

[본문발췌]

 

 

안타깝게도 학교, 직장, 정부, 가족을 비롯한 우리 사회가 우리의 천재다운 특성을 계속 깔아뭉개고 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안정을 주는 대신 우리의 천재성과 예술적 기교를 앗아간다.

 

 

시스템의 효율보다 개인의 차이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변화해야 하는 시기를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조직에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 많은 보수를 챙겨가는 고지식한 관료, 지시받은 일만 하는 사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 규율을 꼼꼼히 따지는 사람, 주말만 기대하는 사람, 안전한 선택만 추구하는 사람,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까 늘 걱정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무리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사람,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기획자,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판매자, 꼭 필요한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기끼어 감수해내는 열정적인 혁신가가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바로 린치핀이다. 물론 아직까지 린치핀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조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성공으로 한걸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천재성을 갖춘 '예술가'가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성이란 게임의 틀을 바꾸는 것, 상호작용 방식을 바꾸는 것, 더 나아가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시장이 보상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 통찰, 가치를 창조하는 용기다.

 

 

마음과 영혼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맞춤법만 틀리지 않도록 답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고리타분한 선생은 분명히 A를 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교육대학에서는 억지로라도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받침을 맞게 썼는지 띄어쓰기를 제대로 했는지 체크할 것이다. 짧은 글이 감동을 주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교는 통찰과 창조성을 획일적으로 찍어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 시스템은 '시키는 만큼만 하면 돈을 버는' 자본주의적 아이디어와 더불어 감동을 전하고 베푸는 '선물 경제(gift economy)'가 작동하는 하이브리드 경제다. 

 

 

예술가는 현 상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통찰, 창조성, 대담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

 

"예술이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물이다." 예술가란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사람을 바꿀수록, 사람들을 더 많이 바꿀수록, 더욱 훌륭한 예술가다. 예술은 기술과 무관하다. 물론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만 기술은 의미가 있다. 기술과 기교는 예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꾸밀 필요가 없다. 그것을 활용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유용하다. 그림, 조각, 작곡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예술이 아니다.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을 대변한다. 기계는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확률이 훨씬 높다. 

 

 

디지털 시대가 될수록 모든 일을 수량화하고 기계화하고 인터넷으로 즉각 공유한다. 모든 일을 스프레드시트 네모 칸에 집어넣을 수 있다. 문제는 경쟁자도 모두 똑같은 스프레드시트를 쓴다는 것이다. 결국 비슷비슷한 사업 모델을 만들어 경쟁자들과 함께 시장을 나눠먹을 수밖에 없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꿈도 꾸지 못한다. "수량화하기 쉬울수록 그 가치는 작다."

 

 

대량생산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순간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다. 손길이 닿는 대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발명한다.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여 놀랍고도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낸다. 예술가들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측정하기도 어렵다. ... 소비자들은 예술가를 좋아한다.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곧 현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 상태를 싸구려 만들지 않는다. 예술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는 모두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아일랜드의 록밴드 U2가 순회공연을 할 때 이들에게 순회공연은 매일 밤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돈을 벌기위해 진부한 틀에 맞춰 순회공연을 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면 즉석에서 앤디 워홀 스타일의 실크스크린 그림처럼 바꿔주는 서비스도 있다. 이것은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은 아니다. 'OOO 스타일'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포기하고 대량생산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호혜주의에서 벗어나라. ... 선물 시스템이 마술인 이유는 선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주는 것일 뿐 계약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며 둘을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준다. 계약은 개개인을 고립시킨다. 돈이라는 매개로 잠시 연결시켜줄 뿐이다. 하지만 선물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

 

 

거래가 만드는 가치는 한계가 있다. 돈거래를 할 때 우리는 '조건'에 집중한다. "그것을 주면 이것을 주겠다"라고 계산한다. 최초에 교환이 발생하려면 받는 사람이 그에 대한 값을 치르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약속 없이는 어떤 교환도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선물을 줄 때는 그러한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것을 주면 상대방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선물을 줄 때 기대하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바꾸는 것이다. 거래와 선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그 힘은 상당히 달라진다. 거래는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특별한 가치를 덧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은 퍼져나갈수록 더 많은 가치를 계속 만들어낸다.

 

 

메트칼프의 법칙, 네트워크의 가치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팩스기계를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팩스기계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혼자 팩스를 가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은 더 훌륭한 도구가 된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친구가 많을수록 트위터는 내게 훨씬 유용한 도구가 된다. 연결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낮추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는 곧 선물이다.

 

 

보고, 인식하고, 깨달아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을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적인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자신의 편견과 경험과 기대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물들인다. ... 관리자와 투자자는 통찰력 있는 직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지원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쁘라냐라고 한다. 집착과 억압이 없는 삶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유, 보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이러한 자질을 갖는다면 어느 조직에서든 스스로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을 폐기하고 다른 사람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첫 걸음이다.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우연하게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대응할 수 있다. 일은 이미 일어났다. 새가 울어대거나 천둥이 친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울린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화가 난다. 그렇게 화를 내면 그런 감정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전해진다고, 또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린치핀은 소리나지 않는 마이크에 화를 낸다고 해서 마이크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관리직원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도 않고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마다 내놓는 사람들의 독창성을 저주하기보다 포용함으로써 더 큰 축복과 생산적인 결과를 누리며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또한 훨씬 멋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반발로 바뀔 때, 또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 때 우리는 진다. 가르친다고 바뀔 사람은 없다. 또 가르치는 행동이 내 기분을 더 낫게 만들지도 못하고 내 일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남을 가르치려는 순간 우리는 진다.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미래를 억지로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미래를 억지로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열정과 집착의 축에 따른 네 종류의 사람

 

 

 

 

예술가는 자신이 다루는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세계관에 집착하는 순간, 현재 일어나는 상황과 예술가가 맺는 관계는 달라진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 상호작용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다룰 수 있고 변형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똑똑한 협상가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정직하게 이해함으로써 예술을 만들어낸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만 모든 사람에게 작동하는 협상전략을 빚어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조직, 투자한 회사,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 기억, 기대에 집착을 갖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한 집착과 그 집착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바라도록 만든다.

 

 

과학은 지도를 만드는 일이다. 실험 조수는 지시받은 일을 한다. 과학자들은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궁리한다. 과학자가 놀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해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탐험하고, 직감을 따르고, 풍경을 조망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는 일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스스로 놀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논증이 나타나고 미스터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 결국 지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 게놈을 처음으로 해석한 크레이그 벤터는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느 것이야말로 바로 린치핀이 필요한 이유다.

 

 

예술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가 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지도 없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가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무의식적인 최소한의 기억조차, 결코 실현되지 않는 꿈에 대한 부조리한 연상이라고...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떨쳐버린다. 나는 간신히 떠올린 처음 생각을 속삭인다(속삭이기 때문에 정령은 듣지 못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바로 그 순간, 그 높은 공간은 '내 공간'이 된다. 거리에 서서 올려다 보는 순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불가능해,, 그래. 그래서 도전하는 거지.' - 영화 <맨 온 와이어> 중에서

 

 

'오늘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다. 자신의 관점을 바꿀 것인가,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마음의 불을 켤 것인가, 불안과 의심에 주눅 들어 지낼 것인가. 자신의 일을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일에 끌려다닐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끄집어낼 것인가. 의욕에 불타는 레이저광선이 될 것인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분산광선이 될 것인가.' - 이시타 굽타(Ishta Gupta)

 

 

창조는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든 창조가 똑같을 수 없으며,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진정한 삶의 전환점이다. 일생에 단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정해진 길을 따라 내려가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늘 선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길은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우리 잠재성을 실현시켜준다. 바로 이것이 시장이 원하는 선택이다. 장기적으로 시스템에 순응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만들어내고 실제로 그것을 일궈내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새로운 성공의 길은 순응이 아니라 비전과 참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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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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