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고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질문이 적절한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본문발췌]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할경우, 자유는 성가신 부담이 된다. ...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젊은 나치의 말 그대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대중운동에 가담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위에 대해 나치의 말단 병사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명령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을 그들은 자신들은 속았고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나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게 된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

 

 

도서관 출입과 저녁 식사를 위해 거리를 걸을 때 나의 감각은 시야에 있는 것은 무엇이건 건드려 보고 냄새를 맡아 보는 즐거운 강아지와 같았다. 나의 귀는 거대한 도시가 뿜어내는 생명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의 모든 체모에는 번잡한 보도의 긴장감이 감지되었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Hope,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Language,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Happi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지상은 인간들로 넘쳐 난다. 마을에서도, 들판에서도, 길에서도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당신은 그들을 주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당신의 눈이 한 얼굴과 마주치고 경탄하게 된다. 갑자기 당신은 지상의 어떤 거소가도 다른 인간의 숭고한 유일무이성을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만든다. 그런 만남에는 쓸쓸함이 있고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떤 것이 있다.

 

 

Religion. 종교는 신이나 교회, 성스러운 동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몰입의 근원은 자아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앞면이다. 종교적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지적했듯이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에 국한된 병'이기 때문이다.

 

 

양들은 주변에 익숙하지 못하다. 양에게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기괴하고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양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양들의 그러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양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느낌 때문에 종족이나 민족으로 무리를 짓는 것이리라. 

 

 

Hatred. 증오가 정당한 불평보다는 자기 경멸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증오와 죄의식의 밀접한 관계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40대의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완성품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배척해야 한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인생의 절반을 필수적으로 소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제 남은 나머지 절반은 상부 구조의 건설에 바쳐져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100만 명 가운데 한 명도 없다. 우리에게 은퇴란 희화이고 잔인한 농담이다. 우리의 쇠락하는 여생이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 생활 양식은 단죄되어야 한다. 노년은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

 

 

유사성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을 알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은 묘비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무덤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이 역사에 해결의 빛을 비춰 준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몹시 기뻤다. 아마 우리의 기록된 역사와 관련한 문제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한 통찰을 현재에 대한 연구에서가 아니라 고대 유물과 기록에 대한 연구에서 끌어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역사가도 다른 우회로가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해명해 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Money.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상투어를 만들어 낸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친숙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이다. ...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은 날을 무디게 한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도가 될 수 있다. 내가 불만 품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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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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