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위주의 생각은 감각적 즐거움은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세상의 균형 속에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분지족(安分知足) 安貧樂道(안빈낙도)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자.

 

 

[본문발췌]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 우주의 한 시민이라고 생각하여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는 후대의 생명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이렇듯 생명의 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세상과 깊은 접촉을 해야 한다. 이 의미와 가치에서 불행도 생기고 참된 행복도 생긴다. 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유능한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글줄이나 끄적거려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숫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힘쓰라. 모름지기 실사회로 뛰어 들어가라. 해적도 되고, 보르네오의 임금도 되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 뼈가 휘도록 일해야만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어려운 생활을 한번 해 보라."

 

 

요즘의 생존 경쟁이란 실상 성공 경쟁이나 다름이 없다. 누구나 경쟁을 할 경우에 두려워하는 것은 내일 아침의 끼니 걱정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우세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다. .... 성공하기를 바라고 또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자는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사생활은 너무나 분주하고 걱정에 휩싸여 행복한 날을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돈에서 얻으려는 것은 생활의 안전과 한가한 시간이다. 현대인이 대부분 바라는 것은 돈을 더욱 많이 버는 것이요, 또한 돈을 버는 목적은 허영과 명성과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다.

 

 

인간의 행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커다른 슬픔 속에서도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것처럼 생각되는 고민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심각한 고통을 기억조차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그렇거니와, 그보다도 인간의 자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사상과 희망을 자기 이상의 존재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화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발견할 수 없는 일이다. 

 

 

정신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여 사소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는 첫걸음의 하나이다. 무엇이든지 도취해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며 따라서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행복이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행복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흥미의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게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눈을 내부에 돌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의 천태만상을 외면하고 내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내향적인 병폐에서 비롯되는 불행에, 마치 위대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만족감과, 사소하나마 야심을 발산하는 기쁨은 대개 사업을 성취하는 데서 온다. 설령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말하면 첫째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보다도 행복한 것이다. 사업에 재미가 있으면 권태가 따르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층 기쁜 만족을 느낄 수가 있다. 흥미 있는 일에 대해서는 순서적으로 이를 정리할 수 있다. 단지 재미를 붙일 수 있다는 정도의 일에서부터 위대한 사람들이 모든 정력을 바칠 만한 사업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요소가 일의 흥미를 자아낸다. 하나는 기술의 발휘이고, 또하나는 건설이다.

 

 

오늘날 지식계급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한 원인은 대다수가 - 특히 문학적인 소질이 있는 청년들은 독자적으로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속인들이 판을 치는 어느 부유한 주식회사에 고용되어 예술가에게 해롭고 무의미한 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는 점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인들에게, 자기가 종사하여 만들어 내고 있는 신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저마다 생활비 때문에 원치도 않는 일에 재주를 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에 참된 만족이 우러날 리가 만무하다. 한편 그 직업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하면 스스로 자기를 냉소하게 되어 진정한 만족을 느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직업을 택하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굶주림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굶주리지 않고 건설적인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수입은 많을지라도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올바로 충고해 주어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참된 행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존심을 가질 도리가 없다. 건설적인 사업에서 느끼는 만족은 소수가 누리는 특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 사업에 주인이 된다면 저마다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사업이 가치가 있어 보이고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이 특권을 누릴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을 행복하게 기르는 일은 우리에게 깊은 만족을 느끼게 하는 어려운 건설 사업이다. 어린아이를 훌륭히 기른 어머니라면 자기의 수고로 말미암아 -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이 갖지 못할 뻔한 -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나서 그것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두고두고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보다 일에 훨씬 능률을 올릴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잊어야 할 경우에, 그 일밖에 다른 여러가지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손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하루하루의 업무로 말미암아 피로해진 몸을, 이러한 흥미 때문에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흥미는 의지의 힘, 즉각적인 결단, 그리고 도박과 같은 경제적인 타산을 내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감정을 피로하게 하고 의식이나 무의식을 발동시킬 만큼 자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많은 오락이 이러한 조건을 해소시켜 준다. 즉 운동경기를 구경하거나 극장에 가거나, 골프를 치는 것 등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탓할 것이 몯 된다. 학자들은 자기 전문분야 이외의 독서를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한 것이다. 아무리 중대한 고민이라도 종일 끙끙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자기 일을 쉽사리 잊어버리지만, 여자들은 가사를 보살피는 관계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직장을 나서면 새로운 기분을 갖게 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점에 있어서는 밖에서 일하는 여자는 집에서 일하는 여자와는 다르다. 여성들은 실제적인 가치가 없는 일에 대하여는 흥미를 갖기가 어렵다. 목적 관념이 여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한다. 여자들은 책임이 따르지 않는 관심사에는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은 일반론이다. 따라서 예외도 있을 것이다.

 

 

모든 비개인적인 관심은 휴양을 한다는 입장을 떠나 생각해 보더라도,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우선 우리의 감정을 조화시킨다. 우리는 자기 목표, 자기의 사업, 그 밖에 자기의 세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체적인 행동에서 볼 때, 그것은 실로 보잘것없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교육이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격하된 결과, 세계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정신의 시야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고등교육이 지닌 하나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정당 싸움에서 오직 자기 당이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또 좋다고 치자.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세상에대한 증오심과 폭력과 의혹을 조장하는 방법도 사양치 않는다. 그리하여 외국 국민을 욕되게 하여서까지 승리를 얻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도를 찾는 경우도 있다. 보는 눈이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거나 무조건 능률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방법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만일에 당신이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고 인간이 부분적으로 서서히 야만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인류의 존재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헤아리는 긴 시대와 비교할 때 짧기가 한량없다는 것을 언제나 절실히 느끼며 그런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가담하고 있는 조그마한 싸움은 별로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가 헤어난 암흑시대로 후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당장 그 일에 패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게 한 흐뭇한 감정에 싸일 것이다.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상식의 토대 위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고 명랑하게 영위하도록 힘써 행복을 손에 넣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며, 자기 자신을 자기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므로, 죽음을 생각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생명의 물줄기와 깊이 본능적으로 결합될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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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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