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재단한 삶의 기준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면 '이방인'으로 취급당하고, 부적격자로 낙인 찍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내 삶은 내 것이다.
[본문발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 전체가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해 몇 걸음 나섰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 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도 분명히 일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것이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면서도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지내려면 물론 길게 느껴지지만 날들이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 나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도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양쪽의 변론은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변호사는 두 팔을 쳐들어 올리고 유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다. 검사는 양손을 앞으로 뻗치며 유죄를 고발하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나에게는 곧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장광설,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의사표시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분명하게 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내 변호사의 변론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계속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할 적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간수는 잠자코 있으라고 말하고 조금 있더니, "변호사들은 모두 그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변호사도 내겐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드리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작품해설> 중에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가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 - 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과잉 장식과 수다스러운 문학이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저 그 풍부함이 짐작만 될 뿐인 온갖 경험의 암시로 인하여 풍요로운 작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수첩 I>, 147~148 쪽
묘사하는 작품과 설명하는 작품을 서로 조화시킨다. 묘사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계가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임을 느끼게 해 주면 된다. 이렇게 되면 한계는 사라지고 작품은 '울림'을 갖게 된다. <작가수첩> 195~196쪽
3월. 이 어두운 방에서 - 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 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 낯익은 존재 하나 없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해 줄 곳 하나 없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몸짓, 이 미소는 무엇과 어울리는 것인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 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이방인, 그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이방인, 내게 모듯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기다릴 것, 그리고 아무것도 빠뜨리지 말 것. 적어도 침묵과 창조를 동시에 완전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할 것. 그 밖의 것은 모두, 그 밖의 것은 모두, 어떤 일이 생기건 상관없다. <작가수첩 I>, 232쪽
"끔찍한 고독. 사회생활에 대한 약으로서: 대도시. 이제 이것은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막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육체는 보기 흉한 살갗에 뒤덮여 숨겨져 있다. 오직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 그러나 영혼은 또한 그의 유일한 위대함, 즉 침묵 속의 고독도 가지고 있다." <작가수첩 I>, 236쪽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 - 카뮈의 샤르트르 <구토>에 관한 서명 중에서
"그렇다. 모든 것이 단순하다.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에게 헛된 수작은 하지 말라. 사형수에 대해 '그는 사회에 대한 빚을 갚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말고 '이제 그의 목이 잘릴 것이다'라고 하라.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의 운명을 두 눈으로 직시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사형수에 대한 언급
이처럼 텍스트의 암시적 지표들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 <이방인>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지탱하는 창조적 충동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사형은 소설의 양쪽 끝, 즉 소설이 시작되기 전과 소설이 마감된 뒤에 어느 지점으로부터 '숨결' 혹은 '바람'의 모습으로 불어와서 소설의 한복판, 살인이라는 '구심점'에서 서로 만난다. 또한 그와 반대로 법정은 오직 소설의 시작에 위치한 어머니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보이며 뫼르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뫼르소 자신은 오직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일종의 '원심력' 운동을 나타낸다. 즉 재판부와 피고는 소설의 중심인 살인사건에서 소설의 시작과 끝 쪽으로만 향하는 힘의 방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서로 상반된 힘의 운동은 서로 대칭,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소설의의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기반을 둔 1부와 2부 사이의 평행 관계로부터 산출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삶의 긑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작가연보> 중에서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단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 <인류에게 쏟아지는 공포의 전망>,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 1953년 동베를린에서 노동자 봉기 후 뮈튀알리테 회관에서 가진 연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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