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등에 올라온 여행기, 여행 안내서를 통해 새로운 여행지에 대해 이해하듯, 책을 통해 새로운 책을 읽게 되는 경험은 즐겁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그랬고, 이 책 <여행의 문장들>을 통해서도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과 독서를 통해 만나는 설레임!
[본문발췌]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山水,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 린위탕, <생활의 발견>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행자는 그래서 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어떤 책이 전혀 다른 책과 한 봉우리에서 만나고, 언어가 다른 어떤 저자의 생각이 다른 저자와 통하는 길목에 서는 일도 황홀합니다. 한 권의 훌륭한 책은 열 갈래 다른 독서의 시작이라 했던 말처럼, 책과 책 사이에도 길이 있고 산맥이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바다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사람은 진지한 여행자이기도 합니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얘야, 사랑을 네 유일한 벗으로 삼거라. 이 우주를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니 말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랑이 다르게 구현된 것이니, 불은 사랑의 열기, 흙은 사랑의 토대, 바람은 사랑의 덧없음, 밤은 사랑이 꿈꾸는 상태, 낮은 사랑이 깨어 있는 상태이니라. - 쿠쉬완트 싱, <델리>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인도는 너무 많이 찍으면 안 됩니다. 인도란 나라는 어디를 찍어도 사진이 되니까요. 360도로 빙그르르 돌면서 서른여섯 번 셔터를 누르면 바로 포토스토리 한 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인도에 간 사람들의 사진은 모두 똑같아요. 너무 많이 찍는다는 건 전부 찍어선 안 되는 거지요. 인도는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마이너스 작업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시점이 드러납니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침묵은 물체를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솜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 침묵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있는 하나의 기관과도 같다. 얼굴 속에는 눈과 입과 이마만 있지 않고 침묵도 있다. 침묵은 얼굴 속 어디에나 있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도처에 침묵이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숲>,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이 울린다. ...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ㄱ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술>,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 고종석, <말들의 풍경>
조금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어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내게 여행은 숲에 가서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 동네에 가서 그 동네 공기와 물을 마시며 그 동네서 난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것. 그 동네가 빚어낸 책을 읽는 것. 내가 하려는 여행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러하다. 숲에 가 술을 마시고 싶다. 그 글자들을 그렇게 명명한 옛 사람들의 위대한 마음을 떠올리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그난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르치스는 이 문제 관해 곰곰이 따져보았다.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름이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 향기는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니 로미오는 로미오라고 안 불러도 그 이름이 갖는 고상함은 그대로 남는 거예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와 줄리엣>
괴테에 의해 독일어가 비로소 언어로 만들어졌다면, 셰익스피어는 영어를 세계 최고의 언어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2만 8,829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에서 그전까지는 한 번도 영어에 등장하지 않던 새 단어를 1,700여 개나 소개했다. 햄릿 한 작품에만도 600여 개의 단어를 새로 선보였다. 그가 도임한 단어 중에는 오늘날 매일 사용하는 'critical(비판적인), extract(추출하다), excellent(훌륭한), assassination(암살), lonely(외로운), accommodation(숙소), amazement(경악), bloody(유혈의), hurry(서둘러), eyeball(눈알), road(길)' 등이 있다. - 빌 브라이슨, <셰익스피어 순례>
용감한 시골 귀족, 이곳에 잠들다. 탁월한 그대의 용기 죽음의 신도 그대 목숨 죽음으로써 빼앗지 못했다고 세상 사람들 전하도다. ... 광인으로 세상을 살다가 본 정신으로 세상 떠났으니.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아베드라, <돈키호테>
유명한 묘비명, '우물쭈말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헤밍웨이), '벗이여, 바라건대 여기 묻힌 것을 파헤치지 마라. 내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셰익스피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서구 문학사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두 인간형으로 흔히 셰익스피어의 대표 캐릭터인 '햄릿형 인간'과 세르반테스의 대표 캐릭터인 '돈키호테형 인간'을 꼽는다. 전자는 생각과 고민이 많아 행동으로 곧바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인간이지만, 후자의 인간은 생각이고 자시고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행동형 인간의 표상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거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비록 절대 특권을 누리던 왕일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단두대에 목이 싹둑! 잘릴 수 있다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유럽 혹은 서구는 이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정신을 꽃 피워나갔다 여전히 대통령과 정치인, 자본가를 봉건시대의 왕이나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추앙하는 우리네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낡은 인식의 대대적인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데서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되새길 만하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두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 카턴의 유언은 아직도 완벽한 자유, 평등, 박애를 이뤄내지 못한 절망의 세상을 살아가는 후대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다 서로 비슷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어느 경우나 그 불행의 상태가 다른 법이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몇 십만이나 되는 인간들이 지상의 한 작은 지역에 모여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그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땅바닥을 돌멩이로 덮고, 그 틈 사이로 자라는 모든 잡초의 싹을 뽑아내고, 그 대기를 석탄과 가스의 연무로 채우고, 나무들을 잘라내고, 또모든 짐승과 모든 새들을 내쫓는 등, 제 아무리 노력을 다하였다고 해도, 그러나 봄은 역시 봄이었다. - 톨스토이, <부활>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근대를 열고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로 니체가 거론된다. 질서와 합리의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와 쾌락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옹호한 그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부터가 그랬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는 모든 가치를 전도시킬 수 없는가? 악은 선이 아닐까? 신은 악마의 발명품이며 세공품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잘못이 아닐까? 그리고 만일 우리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만자가 아닐까?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 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나는 그런 '텅 빈 여행'을 사랑한다.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버스터미널 시간표의 낯선 지명 앞에 서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 일부러 세상을 떠돌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쓸쓸함이 거기(꼬창) 가득했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이렇듯 과감히 책을 버릴 것을, 그리고는 책 대신에 자연과 삶, 거리와 사람들 속에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을 충고하는 책들을 사랑한다. 서평가 이현우가 "책은 전부다. 그런데 이 전부인 책들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라며 얘기한 '책의 패러독스'가 혹시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놓아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사이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논의되어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체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 닐스 보어의 말,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이나 완전한 정각형은 들어 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 현대 물리학이 말해주듯이 막막한 우주 공간까지도 휘어져 있는 것이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 보게 한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신비가들이 세계를 체험했던 방법으로서, 그들 중의 몇몇은 그 체험을 원자 물리학자들이 쓴 것과 거의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 레이첼 칼슨, <침묵의 봄>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일까? 그저 좋은 시절에서 조금 덜 좋은 시절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무엇일까? 몸이 편안하고 걱정 없는 것이 행복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지어지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지금, 세상에는 진실을 은폐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더는 '속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교회나 법당에 찾아가 값싼 기도로 자신의 거짓과 악행이 사함 받을 수 있다 믿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더욱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그들이야말로 죄를 심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심판의 내세가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극악무도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속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속죄'가 사라진 이 절망의 시대에 소설을 읽는 맛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이제 뭘 하죠?" "찾아야지." "뭘요?" "뭘 찾을지는 생각하지마." "왜요?" "뭔가를 찾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중요한 걸 놓치기 쉬우니까. 마음을 비워. 발견하고 나면, 자기가 뭘 찾고 있었는지 알게 될 거야."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오로라는 그런 것이었다. 애써 쫓는다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심한 상태일 땡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런. .... 노르웨이 트롬쇠
해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결론에 도달하거나, 해결되거나, 종결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건을 수사중인 한 그에게는 목표가 있지만, 일단 그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이곳이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혹은 그가 상상했던 끝이 아니라는 생각, 혹은 끝이 바뀌었거나, 그가 변했거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그는 공허했고, 성공은 약속했던 맛이 아니었으며, 범인을 잡으면 늘 '그래서 뭐 어쩔 건데?'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눈은 참 깨끗하지, 오빠?" "응...." "그렇지만 향기가 없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에 향기가 있다면 큰일이야, 요코." 도오루가 웃었다. 요코도 덩달아 웃었다. - 미우라 아야코, <빙점>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름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따뜻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손과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시인 혹은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자연을 쫓는 사람이라는 것. 자연의 미세한 떨림과 여린 빛에도 아파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여행자라는 것. 헤세의 책에서 여행자와 시인은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당신은 시인이군요. ... 당신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살랑거리고, 산이 햇빛에 빛난다고 해서 달느 사람들에게 그것이 뭐겠어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 가운데 생명이 있고, 그것과 당신은 같이 살아고 있으니까요.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반짝이는 호수나 쓸쓸한 적송나무나 햇빛을 받는 바위보다도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구름이었다.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혹은 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구름은 흘러가며 눈에 위안을 준다. 구름은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요, 노여움이요,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아이처럼 정답고 부드럽고 평화스럽다. 구름은 착한 천사처럼 예쁘고 부유하고 은혜로우며, 죽음의 천사처럼 어둡고, 피할 수 없고 사정을 모른다.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많은 시인과 여행자들이 모두 저 변함없이 흐르는 구름을 꿈꾸지 않았던가? 만일 구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여행자들이 그토록 많이 생겨났을까? 바람 같은 것이 있지만, 역시 여행자의 스승은 저기저 지향도 없이 형체도 없이 떠다니는 구름, 구름이 아니었을까?
시인이 된다는 것은 /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행동의 끝까지 / 희망의 끝까지 / 열정의 끝까지 / 절망의 끝까지 //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 시인이 된다는 것은 /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
고뇌에 찬 영혼이 자신의 추억과 고통을 말하기에는 어느 겨울 저녁, 집 주위로 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때, 밝은 불 하나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 불은 '낙원'에서 빛난다. 불은 '지옥'에서도 타오른다. 불은 온화함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불은 부엌이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불은 불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너무 불꽃 가까이에서 놀려고 들면 그 어떤 불복종도 처벌한다. 불은 안락이자 존중이다. 불은 수호신이자 무서운 공포의 신이요, 선한 신이자 악한 신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가령 / 이것이 시다, /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 설령 /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 그곳에 있다. //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박제영, <가령과 설령>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 김수영, <김수영 산문집>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 윤동주, <별 헤는 밤> (1941.11.5)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941.4. 문장 26호)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까요? 어르신이 시를 읊으니까 단어들이 여기저기 사방으로 뒤어다니는 것 같았어요." "바다처럼? 그게 바로 리듬이라는 거야" "너무 많이 움직이다 보니 멀미가 날 정도였어요. 어르신 말씀을 타고 흔들거리는 배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마리오, 자네가 지금 뭘 했는지 아나?" "뭘 했는데요?" "메타포."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다 / 내가 거쳐 온 수많은 여행은 /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발견했을 때 / 나는 알게 되었다 / 당신 역시 /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 잘랄 알 딘 알 루미
우리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회전이 / 우주를 돌게 한다 // 머리는 발에 대하여, 발은 머리에 / 대하여, 서로 모른다 // 상관없다. 그들은 / 계속 돌고 있다 - 잘랄 알 딘 알 루미, <회전>
늙은이들은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의 성립에는 몇 단계의 어려움이 따른다. 첫번째로 일차적인 증언자 대다수가 문자 그대로 학살당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생존자 대부부은 차라리 입을 닫고 기억을 억압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세번째, 설령 증언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메시지가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어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네번째로 아우슈비츠처럼, 사실을 표상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지, 그것을 표상하고자 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실제 일어난 사실을 왜소화하거나 진부화 혹은 상품화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의문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치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선언 이후, 거듭 표명되었다. - 서경식, <시의 힘>
저지 캠벨,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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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조셉 캠벨)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창세, 처녀 수태, 신자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이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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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로부터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무리 앞에서 설법을 하기 위해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마악 입을 열려는 찰나 새가 한 마리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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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 베르나르 포콩, <사랑의 방>
나는 사물이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알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 게리 위노그랜드의 말, 수잔 손탁, <사진에 관하여>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 카프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진은 침묵해야 한다. (매우 시끄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그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그에겐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대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어린 시절로, 낭만적 사랑으로, 영광과 명예에 대한 청년 시절의 꿈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는 방랑 생활, 다른 나라로의 도피, 그리고 '예술과 미',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이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 한때는 영원한 것으로 보였지만 언제나 변화하는 사물의 낡은 형태와 조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으며, 다시는 시간과 기억의 도피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나에겐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면 언제나 편안할 것처럼 생각된다. ... 마침내 내 넋은 폭발한다. 그리고 현명하게 나에게 외치는 것이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이라 읊었던 보들레르의 시에서 비로소 근대적인 '여행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에 관한 철학 서적인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보들레르를 평생에 걸쳐 항구, 부도, 역, 기차, 호텔방과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를 사랑한 시인으로 그리고 있다. 목적지보다는 떠남 자체를 동경한 보들레르의 생각을 통해 여행이 '생각의 산파'임을, 내적인 사유를 끄집어내고 자신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임을 얘기한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 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 나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 친구들은? //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 조국은? //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 미인은? //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해겠소만. // 돈은 어떤가? //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 보들레르,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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