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변이가 발전과 진화로 이어진다. 시스템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이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본문발췌]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틈에 끼워 맞춰져 누구에게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완전히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르쿠제가 말했듯, "이 세계가 정한 조건 속에 위축되어 살아온" 그들은 의지를 결여한 실체없는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플랫랜드인들 같이 우리도 관점의 한계라는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채. 뿌리 깊은 패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구가 정사각형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야 한다.

 

 

쿠바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 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앞으로 우리가 떠날 여행의 목표와 완전히 부합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발견하고,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고, 생생하게 깨어 있기 위한 '신선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우리 두 눈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은 각각의 눈에 시각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하나의 '올바른'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에 한 쪽식, 눈을 가리고 번갈아 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 즉 시차 덕분에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를 인지할 수 있다. 두 관점의 통합이 곧 입체적 시각을 창조한다. 두발로 걷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보는 행위 역시 서로 다른 두 원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대화라 할 수 있다.

 

 

'입체화unflattening'란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다.

 

 

인류가 만들어온 다양한 렌즈 덕분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렌즈는 시야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우리는 렌즈를 통해 나타난 관점을 실재reality라고 착각한다. 단일한 관점에 의지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고정된 관점, 즉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찾고자 하는 것만 보는 함정.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존의 통념이 뒤집히고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각기 다른 시점을 유지한채 대화에 참여한다. 각각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고, 교류하고, 결합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두 눈이 결합해 입체적 시각을 완성하는 것처럼 서로의 궤도를 도는 다양한 관점은 연결되고 상호작용하고 중첩되다가 새로운 관점의 등장을 촉발한다. 수많은 생각이 날실과 씨실을 이루어 춤을 추듯 얽히고 설키면 공통 기반이 형성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풍성히 얽혀 있는 직물 그 위에서 문제와 대면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남겨 둔다. 현존하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경계는 서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경직되고 닫힌 사고방식은 상호 연결된 포괄적 관계망에서 재구상된다. 각각의 관점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관점과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서로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이처럼 새롭게 통합된 지평에서 더욱 포괄적인 이해의 가능성이 펼쳐진다.

 

 

제임스 카스는 "제한적인 것은 우리의 시야이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끊임없이 시야 너머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 바로 호기심이다.

 

 

다차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할 수 있고, 바로 놓을 수도,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 관점을 바꾸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미지는 '존재 자체'를, 텍스트는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 사유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텍스트에만 의존하게 되면 언어의 선형적 구조 바깥에 있는 것들은 무시된다. 그리고 그 위로 '비이성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위쪽'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랜드인처럼. 시각적인 것은 문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쳐왔을까? 대상에 '대한' 사유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보려고 할 때 무엇이 시각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가?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차원의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족쇄를 풀고 답답한 틀을, 상식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

 

 

사물들의 깊이는, 아른하임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현상)"과 "존재해야 할 것들(본질)"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넌지시 전해진다.

 

 

레이코프와 존슨, 라파엘 누네스에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는 근본 개념은 탈육체화된 순수한 이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보는 것에 뿌리를 둔다. 즉, 일상적 지각 활동 및 신체 활동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와 유사한 역동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을 체계화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의 구조는 우리의 지각적 의식 기저에서 작동하여 생각과 행동을 형성한다. 구체적 경험은 이미지 구조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이로부터 우리는 사고 능력을 신장시키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진다. 우리는 기존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본래 아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유사하지 않는 것들끼리 엮으며 새로운 지식을 구축한다. 이를 두고 바버라 스태퍼드는 "그럴듯한 인어를 만드는 상상력의 노동"이라 비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본래 시각적인 과정이라 주장했는데 관계 안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는 분리된 대상을 연결해 그리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관점이란 없다. 우리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각을 한다. 고정된 시각은 관계 속 역동적인 관찰을 방해한다. 지각은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다. 장식이나 잡생각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지각은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사유와 관찰을 재통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와 그 정의에 관한 개념을 확장한다. 루트번스타인에 따르면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에 있어 분명 유리하다. 그들은 탁월한 예술 감각으로 사물과 현상에 다른 측면에서 관찰하고 놀이를 즐기며 관련성을 파악한다. 이로써 그들은 문제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를 탄생시키려면 뛰어난 관찰자를 먼저 육성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으로 무장하면 다차원적 시야을 확보할 수 있다. 플랫랜드의 구처럼 기존 장벽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창의적인 가능성이 흘러넘친다.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제한된 기존의 관점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시각이나 접근 불가능한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타인의 이해 방식을 경험하려면 기꺼이 상상력을 통한 도약이 있어야 한다. 

 

 

에티엔 펠러프랫과 마이클 콜이 설명했듯 상상력은 시각 정보의 빈틈을 메우고 파편화된 장면들을 연결해 안정적인 단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 덕분에 우리는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이미지는 곧 상상하는 행위이며 우리는 늘 그 행위에 참여한다.

 

 

경계를 나누는 장애물이자 동시에 가교 역할을 하는 문의 이중성을 생각해보자. 문은 출입인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가 경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보면 문은 평면이면서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첩이 있기 때문에 열릴 가능성이 있고 그를 통해 준거들을 통과시키거나 내친다. 이야기 또한 일종의 문과 같아서 그 문이 열리면 우리는 그것을 탈것 삼아 이동한다.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 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야기는 우리를 붙잡아 자유로운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타인의 관점으로 보고 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경험을 내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서 이야기란 단지 신비로운 설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틀을 만들어 그 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부분의 활동을 뜻한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견고한 형식을 부여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천체와 지구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도구가 거꾸로 루이스 멈퍼드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일치시키는 메커니즘"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제대로 이해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개념을 돌에 새기면, 우리는 반성없이 그것을 그대로 따를 위험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망각한 적 없는 영웅 페르세우스와 달리, 인간은 질문을 멈추는 순간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얼어붙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 방전 상태가 된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 일에 능숙해진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지면 같은 동작을 매번 학습할 필요가 없어진다. 처음 익힐 때는 고생스럽지만 금세 제2의 본성, 즉 습관이 된다. 그러나 존 듀이가 경고했듯 이 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른바 '가소성'이 오히려 우리를 습관의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 되면서, 우리는 점차 유연성을 잃어 간다.

 

 

늘 같은 경로를 오가는 통근길은 한 사람의 세계를 축소시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아내가 매번 다른 길로 출퇴근한다고 해보자. 이는 그녀의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에서 그녀는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경험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갈 것이다. 국제상황주의 예술운동이 제안한 '데리브(derive, 표류)' 개념과 흡사하게 걷기는 목표 지향의 여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즐기듯 표류하는 여행으로 간주된다. 즉 통근길이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가는 여정이 아닌 놀이하듯 이동하는 여행이 된다. 일상적인 것 너머의 낯선 차원으로 몸을 던지려면 우리의 시야는 열려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상상력으로 가득한 춤사위는 활발하고 생생하게 유지해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걸어보는 매우 단순한 시도만으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했을 다른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별개의 개념들을 머릿속으로 한데 엮어 개념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 지평을 넓혀 나간다.

 

 

꼭두각시의 일상은 시계태엽처럼 정확히 흐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다. 꼭두각시는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충직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일상은 변함없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했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대본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뭔가가 꼭두각시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엄청난 허기를 몰고 왔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했던 것이 점차 그 경계를 허물며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꼭두각시의 모든 의식 영역에 침투한다. 아무 말도 하진 않지만 호기심을 끄는 이 방문객(애벌레)은 꼭두각시가 익숙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생명이 말을 걸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너는 누구니? 이 말을 끝으로 그 생명은 몸을 반으로 접어 거꾸로 매달렸다(번데기로..). 그러자 꼭두각시가 보는 세상 또한 뒤집혔고 마음에 잔상으로 남은 질문만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지금껏 자신을 옭아맸던 줄의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철학은 놀라움과 함께 시작된다"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사자死者와 같은 무리가 연이어 행진한다. 숨 막히는 대기를 가르는 한 줄기 불꽃, 타성을 향한 이 벼락은 매끄럽고 획일적인 '외관'들의 그럴듯한 허울을 부수고 우리가 평면적 존재가 아님을 폭로한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성찰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실재하는 동시에 사라질 수 있고 분리된 동시에 서로 연결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계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렌즈를 통해 시야를 확장해왔다. 덕분에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차원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플랫랜드>의 구는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그 덕분에 우리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 및 상호작용. 우리를 씨줄과 날줄로 엮고 있는 사회적 직조물.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사회적 유대를 끊을 수는 있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로는 그저 부유하게 되고,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로부터 분리될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에 따르면 진정한 해방은 '유대로부터의 탈피'가 아닌 '진정한 결속'이다. 연결망의 끈은 계속 이어진다. 보다 많은 연대의 끈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결속을 제약이 아닌 동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항해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유럽의 탐험가들은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분리 방법을 선택했다. 길을 안내할 항해 도구에 의지해 울렁이는 3차원 세상을 평평한 격자판에 축소해 그려 넣은 것이다. 태평양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막대 지도는 위의 지도와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상 이 막대 지도는 위치 정보가 아닌 해류와 조류의 흐름을 묘사한다. 이 지도에는 바다와 하늘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은 대개 집단적 서사로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들의 복잡한 자연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과 새들 풍랑의 패턴 기단과 조류 바다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해정 생명체들,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신호를 보낸다. 그들은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궤도, 벡터를 통해 길을 찾는다.

 

 

이제 다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자. 존 듀이는 이 본질을 외부로부터 채워질 수밖에 없는 공허한 무엇이 아닌 "분명히 지니고 있는 힘"으로 정의했다. 즉 '발전될 잠재력'이다. 그런 힘은 안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밖으로 뻗어나가므로 시작과 끝 지저을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고정된 존재도, 종료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즉 벡터들의 수많은 조합으로 탄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변하기 쉬운 특성을 지닌다.

 

 

자녀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망으로 태어난 아들이며 딸입니다. ... 당신은 활이요, 당신의 자녀는 이미 당신을 떠난, 살아 있는 화살입니다. - 칼릴 지브란

 

 

우리는 평면적이고 협소한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무쌍한, 다양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다차원 지각 능력과 역동적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물론 표준화도 쓸모가 있다. 그러나 타인의 기대에 따르는 태도는 좋지 않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듯이. 서로의 차이와 고유한 우리 존재의 구성 방식을 무시하면 우리는 민첩성을 잃게 된다. 

 

 

각기 모양이 다른 우리 두 발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때 어떤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지는지 살펴보자. 신는 이에 따라 신발 사이즈가 달라지듯이.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저것'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관점들을 취하고 서로 엮는다 해도 그 사이의 공간은 붕괴되지 않는다.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의 종결도 아니며 관점을 종결시키는 과정도 아니다. 각각의 관점이 관계 안에 새롭게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관점이 탄생한다. 관점 간의 거리는 항상 남아 있다. 미지의 공간, 상상력이 흘러나올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새로 발견할 것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다. 

 

 

우리는 축적된 경험을 나침반 삼아 방향을 찾지만 때로는 이 경험의 무게가 여정을 짓누르기도 한다. 우리 눈의 시선의 끊임없는 움직을 통해 관점을 새롭게 하듯 사유를 촉발하고 전복하는 수단 역시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언플래트닝unflattening'을 통해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교육 공장의 상자 안 학생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체의 안구 같은 말간 흰 벽이 응시하는 가운데 송장처럼 색을 잃고 우주의 맥락에서 분리된다. 우리는 본래 세상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만, 그런 유쾌한 행위는 이른바 훈육이라는 미명 하에 속박당하고 묵살당한다. 훈육은 기민하고 쉴 새없으며 대자연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얻기를 갈망하는 아이들의 감수성을 죽인다.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시체 표본과 같이 무기력하게 책상에 앉아 있고, 꽃잎에 떨어진 우박처럼 누군가의 일방적 가르침이 떨어진다.

 

 

한 팀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는 다양성과 차이가 중요하다. - 스콧 페이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03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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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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