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는 지혜, 진리는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단순화시키며, 치우침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본문발췌]
몽상가는,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주의자는, "옮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대답한다.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계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경계하라." - 공자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이니,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노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무서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에 최대의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맑은 양심의 소유자는 망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만사는 다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널려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일이 별로 없다. 세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들이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어간 것이다.
초식동물적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남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유리피데스는 노예를 정의하기를,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도달한다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석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상이 명석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전문에서 단순으로 이르는 과정, 전문가에서 상식가로 가는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으로, 단연 신체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키기 전에는 그 전문적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부딪치는 문제는 앞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60년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생을 만들어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다. ...제 2의 문제에 관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의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는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이 문제를 갖고 우리들이 늘 논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목적이나 의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월트 휘트먼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 외에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인간 최고의 품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생활함으로써 마침내 천지와 동등한 최고점에 도달하였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공포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런 것들은 자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책을 읽는 것은 벌어진 틈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에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노경에 이르러 책을 읽는 것은 창공 아래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하였다. 10년을 독서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바칠 것까지는 없고 2,3년으로 족하다고. 독서와 여행이 내 욕심을 만족시키려면 두 배나 다섯배라도 아직 부족하다. 욕심대로 하자면, 황구언이 말한 것처럼 인간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이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 (시는 슬픔을 통해서만 참으로 깊은 맛이 난다고 하는 생각이다.)고 옛 사람들은 말하였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영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운에 대한 불평도 없이 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의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하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런 사람들에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 산이나 들이나 풍속이나 사람 사는 꼴,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자기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하여 남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뱅이가 되고 불항하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도에 이르면 물에 들어가도 젖는 일이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는 일이 없으며, 허(虛)한 것처럼 실(實) 위를 걷고 실한 것처럼 허 위를 걷는다. 그 거하는 곳을 집으로 할 수 있고, 어느 곳에 거하더라도 그 홀로임을 잃지 않는다. 도를 깨달은 선비라고 하면 모두가 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다만 도를 사랑하는 사람일뿐이다. 도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지배자가 되며, 우주는 그의 앞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소란함과 더러움 속에 던져저도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몸에 진흙이 묻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좇아야 할 도를 택할 필요가 없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 바람이 잠잠하면 나도 잠잠하고, 바람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 나는 물속의 모래 - 물이 맑으면 나도 맑고, 물이 탁하면 나도 탁하다.
공자 가로되, "도는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떠나야 할 것은 도가 아니라 그 도를 지키는 사람이니라" ...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다."
논리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기보다 정리(情理)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정리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 이상이며, 정리를 아는 사람은 최고의 문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정리를 알고 있는 부부는 행복스럽게 살 수 있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알맞게 싸우고 또 알맞게 화해를 할 수 있는 정리를 깨닫고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리가 있는 인간세계에서만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서양에 있어서는 한 가지 명제가 논리적으로 완전하면 대개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중국인에 있어서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정확하다는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동시에 인간성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에 있어 이 '인간성에 일치한다'는 것, 즉 진정(盡情, 인간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보다 중요한 문제다. 영어의 reasonableness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정리인데, 이것은 정(人情, 인간성), 즉 인간성과 이(天理, 변함없는 도리)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성립된 것이다. 정이 신축성 있는 인간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우주불변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함은 인간의 심정과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심정과 대자연의 운행에 조화된 생활을 영위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주로 그 평명한 상식과 그 자연스러운 인간성, 즉 인간미 때문에 경모를 받고 있는 공자처럼 정리를 깨닫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깨닫는 사고 방법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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