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나와 다름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 변화가 필요할 때, 목적과 방향을 잃었을 때....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본문발췌]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 믿으며 길 위에서 '잃어가는 나'와 '잃어버린 너'를 되찾고 싶었다. 그 강렬한 그리움이 나를 살아남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소득은 전혀 알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새로 고쳐보는 데 있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과도 통한다. 과거에 대한 배려는 미래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나그넷길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도 자유인이다. 인생 그 자체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질영역에 있어서는 '물질의 법칙'에 지배되지만 정신영역에 있어서는 '마음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진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유浮遊하다가 생체의 '조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그렇게 죽음을 삶으로 바꾸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중에서 웃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했고, 앙리 베르그송은 그 논거를 뒷받침하는 예화를 들면서 "고유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을 생략하면 재미있는 것은 없다."면서, 웃음을 인간 고유의 고급스럽고 중요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고해苦海와도 같은 세상사에서 웃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역설했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 천국에는 지루함이나 괴로움이 없어 그 탈출구인 여행이나 웃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삶을 딛고 다시 웃음을 회복해야 한다.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면서, 명승고적뿐 아니라 오지도 마다 않고 넓은 세상을 만나면 문득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발끝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내 몸 곳곳에 말을 걸고 격려해주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나르시즘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르시즘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기 본위의 사랑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하되 자기 과신이 아닌 겸허와 겸손으로 끝나야 한다. 나 역시 나를 객관화해 바라볼 수 있게 되자 남에게도 부드럽고 열린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不言以無愁 - 말을 안 하면 근심이 없다. - 석주 대선사
베르테르는 '몸이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 여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나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임을 믿는다.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마음의 그릇'이다.
고독은 우리 마음의 고향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 없을 때, 또는 남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을 때 고독해진다."고 했다. "이럴 때면 익숙했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고독감이란 자기 사고방식이 주변 사람들과 다를 때, 남의 사고방식이 납득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며, 그런 때는 그런 주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좌절을 모르고 넉넉하게만 살아온 사람, 한곳에만 죽치고 앉아 자기 나름의 왕국을 마련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본위의 냉혈인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 이따금 훨훨 털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활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얻을 수 있다. ... 많이 괴로워하다가 길을 나선 나그네가 어느샌가 여느 사람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함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한다. ... 인생은 고통과 죽음의 바다이지만 사랑과 여행으로 이를 메울 수 있다. 그런 사랑, 그런 여행은 죽을 것만 같은 시련 끝에 온다. 그리고 혼자만의 외로움을 통과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어야만 여행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 사랑, 죽음, 여행, 이 세 가지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한 번뿐인 삶을 위해서.
여행이란 스스로를 안전한 일상생활에서 긴장감이 흐르는 이질적인 세계로,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호사스럽거나 넉넉한 생활에서 가난하고 모자라는 생활로 끌어내는, 끌어내리는 일이다. ... 여행이란 자유분방한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고독한 인간'의 멍에를 벗고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는 길이어야 한다. ... 혼자 긴 여행길에 나선다는 것은 '나 아닌 또 하나의 나를 찾는 길'이다. ... 그렇게 여행은 나를 향한 회귀, 또 다른 인생에게는 향수가 되리라.
여행이란, 정착사회의 번거로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보려는 욕구의 발로다. 여행이란, 안전한 일상생활과 다른 이질적인 세계로, 긴장을 내내 수반한다. 예컨대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넉넉한 생활에서 모자라는 삶으로 스스로를 옮겨보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이란, 안전할 수도 있고 호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늘 자유분방해야 하며, 고독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야만 한다.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누구나, 심지어 불규칙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이조차 일정한 생활 리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끔 여행을 통해 이 리듬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동물에게는 엉성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구석구석 철저히 계산된, 조금의 혼란도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인생도 그렇다. 살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불쑥 일어나곤 한다. 자연도 그렇다. 사계절의 변화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지만, 서늘한 여름도, 따뜻한 겨울도 있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흐트러짐'이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여행은 가르쳐준다.
우리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단순한 행위와 사실, 그것을 삶의 가장 필요하고 만족스러운 일로 즐기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여행 중에 느끼는 특별한 느낌들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는 것이 그렇듯이, 여행도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고 여행해야 한다. 그냥 예사롭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마음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새롭고 값진 것을 찾기 위해, 좀더 넉넉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 또는 예기치 못한 아이디어나 느낌을 떠올리고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여행을 하다보면 스스로도 놀랄 만한 새로운 발견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낯선 하나는 익숙한 여럿을 일깨워준다.
여행이란 자신을 되찾게 하고 오래되고 선천적인 고정관념을 바꾸게 하는, 깨어 있는 의식의 변종. - 토니 히스, <깊은 여행>
여행이 주는 색다른 느낌을 가까이하게 되면 예사로운 것에서도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기도 한다. ...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꿈을 통해 자신의 재능과 상상의 힘을 발견하고 놀라는 때가 많다. 꿈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가정들을 부풀려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새로이 뜨게 한다. 실제의 꿈이 아닌 자각몽일 경우에는 불현듯이, 그리고 아무런 위협이나 위험도 없이 그런 가정들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능숙한 여행자가 그러하듯이. 꿈과 여행은 닮아 있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진다는 것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도 비슷하다. 여행의 도정에서 얻은 예기치 않은 발견들을 하나둘 자기 것으로 만들다보면, 어쩌면 꿈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파랑새가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행복도, 모두 찾아 나서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감을 따야 하듯이 행복도 즐거움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여행은 '파랑새'를 찾기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수단이다. 여행은 여행지에서 돌아와 일상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 갔다 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느꼈던 새로움을 다시 감각해야 한다. 그런 순간에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존재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떨림, 전율, 절묘한 환희. 이것이 여행의 마음, 여심旅心이다.
이 세상은 한낱 관찰의 대상이 아니고, 새로운 것을 끌어들이는 과정. - 보들레르, <이국향기>
여행은 새로운 생각의 산파다. 새로운 생각은 색다르고, 새로운 장소에서 난다. 여행은 깨우침의 미학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이다. 굳이 해방을 꾀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유로워진다. ... 여행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 여행, 사랑, 죽음은 모두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죽음을 확실히 의식한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듯 무한한 수명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흥미로운 것이다. 이런 생각도 내가 여행에서 얻은 소득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평소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사물을 보아 넘기며 살아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배웠다.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고 하루가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여행 중에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음미할 때마다 그것을 실감하곤 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돌아온 후 이를 반추하면서, 나는 나의 남은 시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자연을 '따른다' 또는 자연에 '맡긴다'는 것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것도 노경老境에 접어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야 또 하루가 다가오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짐짓 알면서도 막상 결심하고 첫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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