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본문발췌]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수직으로 생각하면 나이가 한 해마다 한 살씩 축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 해 한 해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무 역시 한 해가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지만 결코 나이를 수직으로 축적하지 않는다. 나무의 나이는 수평이다. 나무의 이런 삶이 바로 사람보다 오래 사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나이바퀴를 의미하는 '연륜'을 이해하면 나무가 사는 법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을까. 인간 스스로 나이를 바퀴에 비유했다면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바퀴는 둥글고, 둥근 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나무는 수평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몸을 둥글게 만든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테는 진정한 연륜이다. 나무가 어떻게 해서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아는 순간 비로소 인간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갈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나무는 겉에서 보면 앞뒤의 구분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나지 않고 둥글게 살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수직과 수평, 종과횡을 막힘없이 살았기 때문에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나무는 매일 평등하고 공평한 하늘의 기운을 먹고 성장한다. 나무가 둥근 것은 막힘도 없고 평등하며 공평한 하늘을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의 줄기는 위로 향하지만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 나이테는 수평으로 뻗는다. 한쪽은 위로 향하면서 다른 한쪽은 아래로 향하는 절묘한 조화가 바로 나무의 삶이다. 수평으로 늘어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알고자 한다면 가지를 보라. 줄기가 위를 향할 때 가지는 옆으로 뻗는다. 나무는 햇볕을 먹기 위해 수직 상승하는 힘만큼 '수평 살이'에도 같은 힘을 쏟는다. 그래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간직하면서 나이테를 만들어간다. 나무의 나이테는 시간이 온전히 축적된 결과다. 그러므로 나이테를 많이 만들수록 삶의 지혜는 깊어진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촘촘한 나이테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지혜롭다. 얼굴의 주름을 보면서 한숨짓기보다는 주름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 오래사는 나무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듯, 나이든 사람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나무가 나이를 먹어가며 다른 존재들에게 베풀면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매일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나이를 먹는 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지향은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가을에 잎이 물든 모습을 보면서 나무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도 나무마다 각각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형형색색, 각양각색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야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내 정체성만큼 중요한 것이 다른 존재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 남의 입장을 고려해서 도와주더라도 상대가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배려라는 말이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진정한 배려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다.
생명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이 결코 축복일 수는 없어도 치열한 삶 속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 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살길 바라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살기보다는 흔들리면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외물에 유혹되지 않는 '불혹'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이 마흔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자는 도덕군자를 꿈꿨지만, 인간은 공자의 꿈처럼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큰 바람에 쓰러질 수도 있다. 큰 바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조금씩 흔들리면서 사는 것도 삶의 지혜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랄 수 있는 것도 바람에 수없이 흔들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흔들리기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 바람에 꽃과 열매를 잃어버릴 때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뿌리는 한층 더 튼튼해진다.
나는 늘 푸른 소나무의 자태를 보면서 '무심無心'을 생각한다. 소나무의 위대함이 무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늘 푸른 잎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노력하는 소나무는 겨울에도 추위와 눈과 바람과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추위를 피하지 않아야 소나무의 푸른 잎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불평한다. 소나무는 추우면 추운 대로 받아들이며 어떤 고난도 피하는 법이 없다. '기꺼이' 추위를 받아들이는 소나무의 자세는 추위를 의식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다.
즐거움은 바로 좋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쉽사리 감동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감동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감동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에 감동해야 할지 무지하기 때문이다. 감동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습관만 들인다면 감동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감동의 횟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는 감동지수와 행복지수HPI가 비례하기 때문이다. ... 행복한 사람은 감동에 익숙하다. 감동이란 느낀 것을 과감하게 밖으로 표출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느끼는 것을 즐기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목표지향의 삶이 아닌 목적지향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스스로 왜 사는지를 매일매일 고민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목적지향적인 사람은 다양한 것에 가치를 두고, 하지 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행복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의 몫이다. 사람들 무척 부지런히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를 비롯해 어떤 생명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큰 관심이 필요하다. 큰 관심은 자세히 보는데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한 존재를 단면만으로 이해하면서 전체를 안다고 생각한다. ... 한 존재를 전체로서 보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한층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상대방의 장점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전부가 좋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무의 전체를 사랑하지 꽃이나 열매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꽃이나 열매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다. 사람들은 비교하는 데 익숙하지만, 사랑은 결코 비교하지 않는다. 어떤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을 주변에 있는 여자와 남자, 부인과 남편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가 갖는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본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자연을 본받아야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비워야만 한다.
'듣기'는 지도자의 주요한 덕목이지만, 우리 주변의 지도자 대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지도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 듣기에서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공경하면서 듣는 것이다. 경청을 위해서는 상대를 진정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대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지 않고 깔보거나 낮게 본다면 경청은 성립하지 않는다. ... 현대인은 상대방과 마주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마주하면서도 마주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나무의 모든 순간은 치열하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처럼 치열함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어떤 분야든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는 아름답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불꽃은 꺼져버리고, 불꽃이 없는 인생의 앞날은 어둡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치는 이유는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치열함이 없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는 언제나 당당하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지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은 대부분 절대적인 기다림에서 나온다.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
대나무가 늘 푸르다고 생각하면 대나무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아니다. 대나무는 언제나 푸르지 않다. 항상 변하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대나무는 막혀 있으면서도 트여 있고, 트여 있으면서도 막혀 있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와 중용의 실천자다. 중도와 중용은 석가와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경지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중간에 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일마다 가장 적합한 상태를 판단해서 처신하는 것이 중도와 중용이다. 사람은 대개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쉽다.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크고 적은 이해관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중도와 중용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삶은 어떤 흔적이든 남길 수밖에 없다. 어떤 모양이든 그 흔적은 아름답다. 남긴 흔적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역사책에는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인류의 역사는 역사책에 기록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오히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흔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흔적을 기록하지는 않듯이, 모든 나무가 모과나무처럼 산고의 흔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흔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고통의 흔적을 통해 살아간다. 흔적이 요란하지 않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게 아니듯이. 겉으로 보이는 흔적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기록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마다 그만한 가치의 흔적을 반드시 남긴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아름다운 흔적이거늘 무엇을 보태고 덜겠는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아름다운 과정인 것을.
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힘들지 않다. 삶 자체가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자체를 힘들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변하지 않으면 편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변하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나무처럼 매일매일 변해야 몸속에 무한으로 저장되어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이유도 변화가 적어지면서 자신의 몸속에 내장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진 창의성은 몸을 자극하지 않으면 그 샘이 금방 닫혀버린다. 그러므로 창의성은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젊어도 창의성이 풍부하지 않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창의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변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마음의 창의성을 쟁기질하는 것은 곧 생태적인 삶이다. 생태적인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살아 숨 쉬게 한다. 생태적인 삶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생태eco'는 '더불어 삶'이다. 더불어 삶은 생명체 간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사람들은 다른 생명체를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나무와 풀인 식물만 하더라도 사람과 같은 생명체로 여기지 않고, 단순히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다른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 지배하는 순간, 그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더불어 살지 않고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생명을 죽인다면 결국 그 자신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동안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하면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를 죽인 결과, 개체 수가 줄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개체 수 감소로 밀림의 사자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생태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땅 밖으로 나온 뒤부터는 몸을 유지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래서 나무는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넘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이는 밖으로 나온 뿌리를 횡으로 감싸는 또 다른 뿌리를 만드는 것이다. 동식물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자기수용성 감각'이라 부른다. ... 자기수용성 감각은 한마디로 사람을 비롯한 동물이 쓰러지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균형 감각이다. 그러니 이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가. 뿌리를 고정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는 나무를 상상해보라. 나는 산에서 나무가 자기수용성 감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느라 거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나무의 그런 모습을 보고 또 보면서 감탄을 넘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산비탈에 서 있는 나무들이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자기수용성 감각 덕분이다. 나무의 뿌리를 보면 삶에서 자기를 수용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느다. 특히 균형은 지도자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균형 잡힌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조직을 이끌 수 있다. 공자가 평생 화두로 삼은 것은 인仁이지만, 삶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중용中庸이었다. 중용은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다. 가운데를 의미하는 한자 '중中'에는 '적중的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용의 '중'은 바로 적중이다. 어떤 일이든 핵심에 적중시키는 능력이 바로 중요의 정신이다. 중용은 불교의 중도中道와 같은 의미다. 이처럼 자기수용성 감각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와 닮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내가 나무를 스승으로 삼고 있는 이유도 바로 자기수용성 감각을 가장 잘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수용성 감각을 죽을 때까지 발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심과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무는 뿌리가 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수용성 감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나 사람은 위기를 만나면 그 당시에는 자기수용성 감각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이를 잃어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오만과 나태가 뿌리를 내린다. 나무의 근본이나 사람의 근본은 같은 의미지만, 나무는 평생 근본을 잊지 않는 데 반해 인간은 위험에 놓였을 때만 근본을 생각한다는 사실이 다르다. 자기수용성 감각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때 한 존재는 온전히 생존할 수 있다. 특히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수용성 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기수용성 감각은 반드시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자기수용성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주 많다. 자기수용성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생활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근본을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의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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