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벗어나 삶에 변화가 필요할 때, 둔감해진 감각을 깨우고 싶을 때, 새로운 경험과 만남을 원할 때, 홀로 고독의 시간을 원할 때, 일상의 책임/삶의 방식/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라. 가능하면 좀 긴 여행을.... '여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본문발췌]
'매너리즘'은 기존의 틀에 갖혀 독창성과 신선미, 창조력을 잃어가는 것을 말한다. 매너리즘의 악순환에 빠지면 깊은 고민이나 새로운 시도 없이 현상 유지에만 치중하게 된다. ... 인간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뇌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뇌는 정보처리 속도와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늘 세상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각 방식과 반응의 패턴을 만들어낸다. 공장의 공정 자동화 시스템처럼 '의식과 반응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자동화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니는 편해진다. 익숙한 자극과 상황은 자동적으로 처리해 버리고 새로운 자극과 상황에만 반응하면 된다. ... 외부 환경 변화와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뇌를 깨우고 삶에 새로움을 불어 넣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매너리즘에 대한 좋은 처방이다.
삶의 이동성은 커졌고 변화는 일상이 됐다. 지금은 안정적이고 질서 잡힌 삶을 소망한다고 해도 그렇게 살기 어려운 시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특정 환경을 고집하고 기존의 질서에 고착하며 안전지대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모두 네오필리아가 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모든 일탈이 창조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반복이 안정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새로움은 좋은 익숙함은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와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려는 열망 사이의 조율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반복과 일탈의 적절한 리듬을 찾아야 한다. 여행은 우리 안에 있는 일탈과 새로움의 본능을 흔들어 삶의 역동성을 자극한다.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을 진정시키고 새로움에 대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여행은 이 시대의 빠른 변화 속도를 견뎌내게 해주는 예방접종인 셈이다.
긴 여행은 삶 전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기록의 과잉은 여행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더 이상 타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갈수록 할 일이 없다. 기억의 저장고가 점점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사진 등 촬영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뇌는 덜 느끼고 덜 기억한다. 가뜩이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여행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데, 과도한 기록 작업은 여행을 더욱 메마르게 만든다.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러한 세태를 꼬집었다. 그녀는 노동 윤리가 냉혹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일수록 사진 찍기에 더욱 집착한다고 본다.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은 휵를 가거나 일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데, 사진 촬영을 열심히 함으로써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걷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내가 시간을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히말라야에서 늘 시간에 쫓기는 것 같은 그 고질적인 느낌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시간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시간과 나란히 걷고 있다고 느꼈다. 그 느낌이 나를 무척 편안하게 만들고 힘을 줬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통해 진정한 휴식은 여유 시간이 많을 때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을 때 찾아오는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능동적인 몰입임을 깨달았다.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남는 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시간부자란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시간부자란 자신에 맞게 삶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알고, 그 순간에 빠져들어 오염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느린 속도로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린 속도의 삶은 여유롭고 빠른 속도의 삶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속도로 인해 과도한 긴장감과 적대감 그리고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오히려 시간 압박이 없으면 삶의 활력이 사라져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결국 적절한 시간 압박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나와 시간의 관계'와 '일과 휴식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바라보고, 필요에 따라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진정한 휴식의 시간은 삶에 연쇄적인 변화를 가져옴을 느겼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이 시간과 관계가 만나 삶을 이룬다. 삶을 이루는 두 개의 중요한 원자 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삶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시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쫓아다니거나 쫓겨 다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안나푸르나에서처럼 지금 이 사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때처럼 시간을 음미하며 다양한 속도를 즐기고 싶다.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딱 언제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생각해 보자. 여행 계획을 세울 때일까? 비행기 표를 끊은 날일까? 비행기를 타는 날일까? 아니면 여행지에 도착해서부터일까? 언제를 여행의 시작점으로 잡아야 할까? 그것은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일까? 처음으로 고백한 날일까? 첫 데이트를 한 날일까? 아니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처음으로 설렜던 때일까? 설렘이 시작됐을 때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의 시작도 그렇다. 여행으로 인해 마음이 설렐 때, 그 순간이 바로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달리 보인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다소 가벼워진 느낌이 들고 삶의 생기가 느껴진다. ... 여행은 잠시 동안이라도 일상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일상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소는 여행을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완전히 해방된 틈'이라고 불렀다. 나는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의 <걷기예찬>에서 그 표현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내 일생 동안 그 여행에 바친 칠팔 일간만큼 일체의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 추억은 그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산들과 도보여행에 대한 가장 생생한 맛을 내게 남겨놓았다. 나는 오직 행복한 날에만 늘 감미로운 느낌을 만끽하며 걸어서 여행했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은 일상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또다른 자유로움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관계의 그물을 피해 갈 수 없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의 꼬리표를 떼어놓는다. 내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무명인'이 된다. 익명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행지에서 평소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일 뿐만 아니라 익숙한 자기로부터의 일탈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행은 일상의 책임, 삶의 방식, 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으로부터 우릴 자유롭게 해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에서도 벗어나게 해준다. 즉, 자의식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최고의 놀이란 바로 자의식과 시간 감각이 사라질 때 가능하다. 온전히 그 경험에 빠지는 것이다. 여행은 '어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의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는 여행 중에 종종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 내가 나를 의식하는 마음이 줄어들자 내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고요함과 잔잔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여행에 느끼는 최고의 자유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상대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유유상종이라지만 두 사람 이상이 만나면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 나와 다른 성격을 나쁘게 여기거나 안 좋게 느끼는 순간, 성격 차이는 갈등과 싸움으로 이어진다. 취향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취향 차이가 갈등을 빚는 게 아니라 취향의 차이를 통해 서로를 구분 짓고 우위의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갈등이 생긴다. 반대로 취향 차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될까? 취향의 심화나 확대로 이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닮는 법이다. 그 사람이 즐겨 듣는 음악을 함께 듣고, 그 사람이 좋아한느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운동을 같이 즐긴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가까이 지내면, 취향이 달라지거나 취향이 확대되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사람들 간의 우정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세계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혼자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또 다른 세계를 상대를 통해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커지고 풍성해진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 등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질적인 대상들이 만나 서로 섞이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자신의 감수성과 안목, 취향을 좋게 평가하고 상대방의 그것은 좋지 않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편향성을 직시하고 서로의 취향을 좀더 존중하는 데 이르면 우리의 취향은 더욱 발달하고 서로의 관계는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이명옥의 <인생, 그림 앞에 서다>에서 읽은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취향에 관한 철학이다. '자신의 취향은 동일한 취향과 접촉하기 때문에 함양하는 것이고, 또한 이질적인 취향과 만나서 계발되는 것이며, 높은 취향에 매료되기 때문에 향상심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 운명의 7할 이상은 이 취향의 발달로 인한 것이므로, 취향이 고립돼 말라죽게 된다면 세계의 진보는 멈추게 될 것이다.'
"사진 촬영 계획을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가 너무 많은 사진거리에 현혹되어 방황만 하다가 마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놀라운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고,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열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진작가 브라이언 피터슨이 쓴 <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 비단 사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하는 자극과 정보가 너무 많다.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제한된 시간 내에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어떤 것을 넣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감이 잘 서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이 불분명하면 타인의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결국 무색무취의 여행을 하기 쉽다. 그러나 테마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면 여행의 느낌은 보다 달라진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특정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정 주제에 심취해 가는 기쁨과 자신만의 여행 노하우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나만의 여행 테마가 있을 때 여행이 더욱 깊어진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망각 할 수 있어서다. 아이들이 늘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쁜 일을 오랫동안 곱씹지도,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잘 잊을 수 있는 망각 능력 즉, '쾌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할 때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우리의 기억 기능과 망각 기능이 동시에 활성화된다. 즉, 여행 중에는 나쁜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다. 반면 잊고 있던 추억이나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말이다. 낯선 공간에서의 새로운 자극이 우리 안에 감쳐둔 기억과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여행은 본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귀환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떠나는 길과 돌아오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방랑자는 돌아갈 곳이 없거나 돌아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여행이 아니라 정처 없는 방랑을 한다. 여행자들은 홀로 떠난 여행 중에도 별로 외로워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심리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언제라도 여행을 끝내고 자신을 환영해 주는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반면 방랑자들은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없으며, 여행이 끝나도 자신을 진심으로 환영해 줄 그 누군가 혹은 그 어딘가가 없다. 당연히 방랑자는 여행 중에도 종종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린다. 다만 환경이 낯설고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내면보다 외부로 의식이 옮겨 가기 때문에 외로움과 고통을 덜 느낄 뿐이다.
여행은 도전이며 건강한 스트레스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쁨은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즐거움이 버무려진 '칵테일 감정'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떨칠 수 없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불편을 거쳐야 만족은 깊어지고, 두려움 앞에 마주 서야 즐거움은 빛나게 마련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설 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계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 즉,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계 바깥에 나아가는 순간 우리가 생각해 왔던 한계가 사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관념적인 한계였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었으나 발휘하지 못했던 또다른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체험해 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경험이다. 안전하다는 것은 실패의 위험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여행에서 실패랄 게 뭐가 있겠는가. 바깥세상으로의 외출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것은 단지 쉬고 싶고 놀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도전을 통해 더 성장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성장의 본능이 우리를 여행으로 이끄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 경계는 여행을 할 때 느슨해진다. 여행은 자아 밖으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사람, 자연, 문화 등과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체 게바라 어록>에는 왜 여행을 할 때 낯선 존재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거는 용기는 아마도 자연이 가르쳐준 것이리라. 자연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낯선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바람은 나뭇잎과 가지에게, 곤충은 꽃에게, 하늘은 땅에게, 모든 존재들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런 자연에는 절대 고독이란 없다."
나는 지난 여행을 통해 고독과 외로움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되었다.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것이지만 '고독(solitude)'이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고 있는 시간이라면 '외로움(loneliness)'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고 자신도 의지가 되지 않는 공허의 시간이다. 여행은 자신과 함께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여행에서 우리의 호기심은 커지고 공감 능력은 향상된다. 여행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공감의 시간이다.
여행자가 갖춰야 할 일곱 가지 항목 중 첫 번째는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 기준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 프레야 스타크
여행에서 우리는 시간표에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공기와 낯선 풍경은 감각의 문을 두드린다. 감각의 문이 서서히 열리면 우리의 지각은 보다 분명해진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귀에 와 닿지 않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생각은 자꾸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끌고 가지만 감각은 우리를 현재에 머무르게 해준다. 감각이 살아나기에 우리는 점점 '지금-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여행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순화시키고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더 생생하게 느끼거나 듣게 되고, 더 뚜렷하게 바라보고, 더 주의 깊게 맛보거나 만져보게 된다. 여행지는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풍경에 불과하지만 여행자의 예민해진 감각을 거치면서 새로워지고 때로는 신비로워진다. 낯선 땅의 여행자는 그 새로움을 깊이 받아들인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상대의 작은 몸짓에도 뜨거워지듯이 여행자는 얼마든지 절정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 이렇듯 여행지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깨어난다. 우리의 에너지는 머리를 벗어나 온몸으로 흘러 들어간다. 심장은 힘차게 박동하고, 감각기관의 세포는 하나하나 열리고, 감춰진 몸의 더듬이는 말미잘의 촉수처럼 뻗어 나와 풍경의 채집자가 된다. '깨어 있는 몸',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과 교감할 준비가 돼 있는 여행자의 몸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돌처럼 굳고 강하고 분명하고 틀림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확실성 그 자체다.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불안과 공포를 준다. 위험은 예측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은 예측 불가능하기에 더 높은 강도의 불안을 안겨준다. 고질라 같은 거대 괴물보다 메르스처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확실한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지식은 지적 호기심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발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불확실한 세상을 설명해 왔다. 그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통제감과 안도감을 준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새로운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심리적 유연성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선택과 행동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는제도 이전의 방식과 계획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변화와 불확실성에 적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연성을 기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불확실성과 친해져야 한다.
확실성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여행은 재미없고 좁아지고 닫히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여행은 보다 즐겁고 넓어지고 열리게 된다.
삶의 발전은 오직 시행착오와 후회 그리고 이를 통한 개선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지난 선택을 비난하는 대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삶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실수하고 헤맬 수 있는 권리와 그로부터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여행에서 느끼는 문제나 불편은 내가 가진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가지거나 누리고 있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보니 문제나 불편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아무리 여행이 편해졌다지만 집 떠나면 여전히 고생이며 골치 아픈 문제의 연속이다. 왜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어원이 '고된 일'을 뜻하는 'travail'이겠는가. 하지만 여행에서의 고생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자발적인 불편은 우리 내면에서 기쁨으로 전환된다. 불편함은 나쁜 것이고, 편안함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오히려 불편함이 여행의 풍미를 느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향신료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이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에서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되며 그 눈을 통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인생의 숨겨진 비밀을 깨닫을 수 있다.
여행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 프리드리히 프뢰벨
평범하고 밋밋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 동안 느꼈던 잠깐의 행복이나 즐거움의 순간들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수많은 평범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더 빛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하고 무료하다. 하지만 그 무난한 흐름을 뚫고 올라오는 불꽃같은 시간들이 있다. 바로 도전, 사랑, 여행 등을 하는 시간이다. 그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빛나게 만든다. 그렇다고 가슴 뛰는 순간만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단하거나 무료한 이상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빛나는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평범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과 같은 일탈의 시간들은 더욱 아름답게 채색될 수 있다.
휴대전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문자 메시지, 삭제하지 않고 둔 수많은 이메일, 오랫동안 입지 않은 옷이나 신발로 가득 찬 수납함, 십 년 넘게 펼쳐 보지도 않은 오래된 책들이나 캠핑 도구, 날짜가 지났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잡지나 신문, 철 지난 아이들의 장난감 등. 당장 가까운 곳만 봐도 버리지 못한 것투성이다. 과잉 소유와 과잉 저장은 현대인들의 불안과 공허감 때문이다. 몸에 음식을 채워 넣어 심리적 공허감을 보상하려는 폭식증 환자와 다를 바 없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우리는 여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흔히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워뒀던 공백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떤 새로움으로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상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을 계속해서 '더 많이'와 '더 새로운'이라는 방향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새로움의 반대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의 반대어라고 하면 흔히 낡음, 익숙함, 오래됨 등을 떠올린다. 물론 그러한 단어들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더 중요한 반대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얕음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낡고 진부하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 새로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체험이 표면적이고 얕아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고수의 여행이다. 우리가 여행에서 즐거웠던 것은 오로지 새로운 세계를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각이 깨어나고, 자아가 열리고, 생각이 깊어졌기에 똑같은 경험이라고 해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의 그 예민해진 감각과 여행자 정신을 일상으로 가지고와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더 깊이 경험해야 한다. 무심코 지나친 일상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움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늘 이곳을 부정하고 저곳을 꿈꾸는 자는 여행자가 아니라 도망자다. 여행자는 저곳의 여행을 통해 이곳을 재발견하며 이곳을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개척한다.
여행이 끝나면 그 효과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 우리에게 안정과 번영을 약속해 준다. 좋은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자기를 잃어버리고 지금을 놓친 채 일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상을 새롭게 일궈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일상이 바쁘더라도 한 번씩 멈춰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이나 익숙한 관계에서도 그 소중함을 느끼고, 한 번씩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 앞에서 고민만 하기보다는 부딪쳐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 여정을 좋아했던 여행의 시간처럼 삶의 목표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은 좋은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좋은 여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이후의 일상에 달려 있다. 좋은 여행은 여행자 정신을 유지하고 일상을 보다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비해 여행 때는 좋았더라도 여행 후의 일상이 더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고달프거나 빈곤해져 간다면 이는 좋지 않은 여행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부름'을 들을 때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적 신호가 북소리처럼 울리면, 인생에 있어 전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그 의식을 통해 지난 시기를 매듭짓고 새 시기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의식이 바로 여행이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는 삶의 전환점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학생,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진출을 앞둔 사람, 직장을 그만드구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 은퇴 후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 등 삶의 전환기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길 위에 있다. 그들의 여행은 지난 시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삶의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그렇기에 이들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이제 그들이 곧 마주할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안전한 정착을 위한 리허설을 갖는 셈이다. 그들은 전환기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경험을 미리 얻게 된다. 인생은 전환의 연속이다. 새가 털갈이를 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곤충이 변태를 하듯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큰 만남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거부의 대가는 혹독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인생>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여행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면, 이는 어쩌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여행을 통해 여행이 삶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여행이라고 느꼈다. 여행에는 시작과 끝이 없음을 깨달았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나누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여행의 등급, 6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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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둘러보는 여행. 많은 곳을 둘러보는 여행을 말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곳을 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이동해 재빨리 사진을 찍고 또다른 관광지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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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관찰하는 여행. 자세히 살펴보고 기록하는 여행을 말한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며 여행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생생한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더욱 체계화시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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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체험하는 여행. 오감과 신체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여행이다. 이들의 감각은 열려 있기에 더 깊이 경험하고 감동을 느낀다. 이국의 맛과 예술을 즐기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슴 뛰는 활동에 도전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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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각성하는 여행. 열린 마음을 통해 깨닫는 여행이다. 이들의 의식과 자아는 열려 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과 경험에 열려 있고, 새로운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자기와의 대면을 통해 의시그이 지평을 넓힌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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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체득하는 여행. 여행에서의 자각이 체화돼 삶과 연결되는 여행을 말한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여행에서 배우고 깨달았던 것을 몸으로 실행하고, 여행자 정신이 살아 있어 일상을 보다 새롭게 바라보고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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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계. 삶으로의 여행. 여행과 삶이 하나가 돼 삶 전체를 여행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삶 전체가 여행이기에 여행을 하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여행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평생 자기 길을 찾고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삶이란 우리가 잠시 머물렀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인 여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안식년 여행을 통해 그곳이 '자연'이라는 답을 얻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왔다가 이 땅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보면 우리는 우주에서 왔다가 이 별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는 우주의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 인생이란 삶에서 죽음처럼 처음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우주에는 처음도 끝도 없으며 순환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여행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책에서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 마음속의 풍경까지 바꿔놓는다"라고 했다. 그의 글에서 '그림' 대신 '여행'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좋은 여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 때로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렇다. 지난 여행이 내게 준 것은 아름다운 경치만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나의 내면 풍경이 달라졌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바뀌었다.
니체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나는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순수했고, 가장 자유로웠으며, 가장 행복했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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