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빛, 신선한 공기, 시원한 바람, 맑은 물~~~ 자연이 주는 선물을 제대로 느끼는 것도 행복이다.
[본문발췌]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 공포, 그 철저하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고독감, 그 모두로 인하여 나의 영혼, 나의 몸속에 꺼지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는 청춘을 '이동하는 집'의 주민들은 포기해 버린다. 이동식 행복, 이동식 안락의 공간을 끌고 다니는 월급쟁이들이 나는 무서웠다. 카라반의 집단이 반드시 어느 날 내 청춘의 불덩어리를 서서히 눌러 끄고 그들의 관광, 그들의 바캉스, 그들의 안락을 유형무형으로 나에게, 우리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은 지나거버리는 것이다. - 알프레드 드 비니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지중해안의 사람들은 철부지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산타크루스에서는 한계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와 같은 대장관 앞에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그 속에 몰입시켜 자연 자체가 되고 그 영향을 얻고 싶어질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후일 그 대장관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장관은 우리들 자신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 장 그르니에, 생트 빅투아르... 산타크루스... 프로방스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토스카나 파의 대화가들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속에서,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거장들의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우리가 피렌체나 피사의 길거리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참다운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 그 자체보다 가장 천박한 시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 카뮈, <사막>... 존재의 참된 증거인 살과 뼈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 신분,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인격에 따라서만 그 사람의 모습을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른바 카뮈가 '천박한 시'라고 부르는 것) 이전에 사람의 얼굴은 생명이 약동하는 살과 뼈로 거기에 있다.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 카뮈, <사막>.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피에솔레 언덕의 프란체스코 수도원...
아름다움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자가 정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한층 더 신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전자 속에는 신이 있지만 사랑 받는 사람 속에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
안개 속의 곤돌라들은 저 깊은 잠과 같은 죽음 속을 끝없이 그렇게 가고 있는 듯하다. 배이자 관이고 관이자 배인 '카롱'의 통나무처럼,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안개 속, 시간도 공간도, 위도 아래도 없는 몽환 속으로 곤돌라는 가고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행복이란 없다, 하룻날의 곡선 저 너머에 영원은 있지 않다.
해 질 녘, 초록색의 황혼 녘, 바닷가에 서면,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나의 별, 잘 익은 과일, 하루에 한 번 익은 지구가 비로소 내 가슴에 깊이깊이 들어앉는다. 내가 그 별 속에 살고, 그 별이 나의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전을 시작한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17년,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0) | 2020.08.13 |
---|---|
원칙 Principles - 레이 달리오(Ray Dalio) (0) | 2020.08.12 |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사사키 후미오 (0) | 2020.08.10 |
군자를 버린 논어 - 공자, 임자헌 옮김 (0) | 2020.08.07 |
나와 세계 - 재레드 다이아몬드 (0) | 2020.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