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깨끗한 공기, 목재, 연료, 먹거리까지 나무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실질적 이로움 뿐 아니라 천천히 단단하게 자라는 나무의 생장을 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 느린 삶에대한 깨달음도 얻는다.
[본문발췌]
정해지지 않음에서 정해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나무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무도 사람도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무가 잘려 판재가 되어도 아직 나무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또한 나무가 사람의 손에 쓰일 것임이 정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구를 만드는 과정은 그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어떤 가구를 만들지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한다. 공구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몸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나무에 상처를 입힌다. 상처 입고 상처 입히며 사는 것이 또 인생이지 않나. 그 속에서 깨지고 배우기를 반복하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또 조금씩 나아간다.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으면 완성을 해야 하듯 한 번 시작한 인생은 어디로든지 나아가야 한다. 가구를 만들고 실수를 반복하여 그것으로 도 내 삶을 반추한다. 그때 여기를 보강했으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가구가 만들어지듯 나는 삶을 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가구를 만들며 인생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다. 조금씩 나은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조금씩 나은 가구를 만들며 삶에 적용을 해본다. 머릿속에만 남아 있던 지식이 활력을 얻는다. 그건 마치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것과 같았다. 생각의 힘이 세지니 삶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을 견뎌낸 추재의 나이테가 더 짙은 색과 깊은 밀도를 가지듯 고난의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나를 영글게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지문이 있듯 나무에게도 자신만의 결이 있다. 18밀리 두께를 사이에 두고 나무는 서로 다른 결을 보여준다. 나무의 결은 나무가 건네는 인생 이야기다. 예전엔 한 해를 일컬을 때 '춘추'라는 말을 사용했다. 봄과 가을이 한 해를 상징했던 것이다. 나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나무의 춘추를 알아야 한다. 단단히 빨리 자라는 나무는 없다.
하늘의 도는 활을 매는 것과 같다. 높은 곳은 밀어 내리고 낮은 곳을 들어 올리며, 남는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은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으니 부족한 것을 덜어 남는 사람에게 바치는구나 - 도덕경 77장.
'함께'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은 그렇게 산다. 나무가 봄과 여름에는 빨리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디 자라는 것처럼 자연은 변화에 맞추어 합당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그것이 하늘의 도이자 자연의 순리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모두가 욕심이다. 욕심은 타인을 해치고 사회를 망친다. 때로는 그 욕심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
발끝으로 서는 자는 오래 설 수 없고, 황새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 도덕경 24장
준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깊어질 수 없으며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다. 조금 더 높아 보이기 위해 발끝으로 선 까치발은 금방 가라않는다. 자신의 페이스를 넘어 욕심을 부리면 잠시 동안은 빨라 보일지 몰라도 점차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빨리 단단히 자라기 바라지만 결과는 반대다. 늦고 무르게 성장하여 급기야는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는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절망도 영광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주역>에 '물극필반'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궁극에 다라르면 다시 그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더 많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닫으면 암것도 만날 수 없다. 어디로든 갈 수 없다. 우리가 문을 걸어 닫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자물쇠를 채우고 경첩에 좀이 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의 경첩은 좀먹지 않는다. - <여씨춘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그 움직임으로 인해 맑음을 유지한다. 경첩이 좀먹지 않는 것은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정체되어 있지 않음이다. 경첩이 움직이는 반경은 짧다. 아무리 커다란 문일지라도 경첩의 크기는 한정되고 경첩은 그 크기가 허락한 공간만을 움직인다. 그러나 반경이 짧다고 그 의미까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쓰지 않으려 하니 버려졌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하나의 사물을 보는 다른 눈. 자투리 나무도 버려지면 그저 땔감이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투리 나무의 쓰임을 찾으면 내 책상을 빛내는 소품이 된다. ... 준비하고 생각하고, 그래서 맥락을 파악해야 자투리를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단지 자투리 나무만이 아니라 나 자신, 내가 가진 전력, 나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투리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 자투리는 나무만이 아니다. 내게는 또 시간의 자투리가 있다.
겨울은 한 해가 남겨 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밤은 낮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이 남겨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 <삼국지>, 위서... '동우'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독서하기 좋은 세 가지 여분의 시간, '삼여지설'
동우에 의하면 삼여지설의 첫 번째는 겨울, 두 번째는 밤, 마지막은 비 오는 날이다. 동우는 이 시간이 마음으로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되었기에 겨울은 한가로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기가 온밤을 비춰주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당시는 밤이 한가로웠을 것이다. 비가 오면 쉬는 일이 많았기에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한가로움을 채우는 것은 독서다.
변화의 시작은 일상을 일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천 조각이 조각보가 되고 자투리 나무가 명함꽂이가 된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투리에서 자투리 아님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본 것에 정성을 들이는 것 아니겠나.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고 들리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현상일 뿐이다. 그 현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통찰력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한다. 말이 행동과 일치되는지 준엄히 살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공자가 말했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거칠어지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화려해진다.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 - <논어>, 옹야
맹자가 고자에게 일러 말했다. "산속의 작은 길도 많이 다니면 큰길이 되지만 잠시 다니지 않으면 곧 띠(풀)가 우거져 막혀버리는 법이거늘, 이제 그 띠가 자네 마음을 막아버렸구나." - <맹자>, 진심장구 하
걷지 않으면, 길은 없어진다. 금방 띠가 우거져 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마음의 길도 그렇다는 데 있다. 마음에도 길이 있고 생각에도 길이 있다. 그 길도 가지 않으면 띠가 우거지듯 막히고 굳어버린다. 굳은 마음, 막힌 생각은 더 이상 새로움을 품지 못한다. 굳어버린 마음으로 사물과 세상을 대하면 참혹한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죽나무는 그 모습으로 인해 살아남는다. 굵고 곧은 나무들은 목재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찍히고 베어진다. 하지만 가죽나무는 장인에게 쓸모없음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장인에게 쓸모없음이 가죽나무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장님에게는 아름다운 무늬를 보일 필요가 없고 귀머거리에게는 음악소리가 필요 없다. 어찌 육체적으로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겠나. 정신면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 - <장자>, '소요유'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늬는 무의미하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음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고 통찰하고 듣고 이해하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생각의 장님이며 마음의 귀머거리일 것이다. 생각의 눈을 뜨고 마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그려진 선을 따라 색을 채우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삶이란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대부분 모자라다. 그래서 또 함께할 수 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그때서야 아픔은 덜어지고 기쁨은 더해진다.
재료를 갖추고 세상에 나가는 순간 방황은 시작된다. 톱질과 대패질로 목재가 가구로 바뀌듯이 인고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삶도 바뀌지 않는다.
삶은 과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 번 정한 좌표를 최종의 목적지로 여긴다.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일까? 그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 목적지라고 알았던 그곳이 단지 중간에 거쳐 가야 하는 곳일 수도 있다. 좌표는 끝이 아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점이 있고, 그 점이 서로 이어져 삶의 길을 이룬다.
격물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밝힌다는 것이고, 치지란 그로써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됨을 의미한다. 사물에 부딪혀 이치를 파악한 후에야 뜻은 정성스러워진다. 정성스럽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성스러워지면 마음이 바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닦아가야 천하를 화평케 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군자는 때에 맞게 처신한다. 이는 즉, 중中을 잡는 것을 이른다. 천년이 흘러도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 <중용장구>
관리의 신표, 그것이 부절이다. 옛날, 특히 중국의 사신은 부절을 가지고 있었다. 부절은 온전한 하나의 형체가 아니었다.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신표에 증인을 찍고 이를 둘로 갈랐다.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 보관했다. 하나에서 나와 둘이 되었으니 그 둘은 꼭 맞았다. 부절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세상에는 들어맞아야 할 것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들어맞아야 한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한다. 일은 때에 들어맞아야 하고 나와 나의 사명이 들어맞아야 한다. 문제는 들어맞지 않을 때 생긴다. 그 들어맞음이 중용이다.
공자는 사람의 관계에서 어떻게 중용을 지키는지 보여준다. 그 사람에 맞게, 그 상황에 맞게, 그 일에 맞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맞아야 한다.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할 것 없음을 부끄러이 여긴다면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 <맹자> 진심, 상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고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최소한 고치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잘못을 덮으면 잠시는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잘못은 눈덩이처럼 불어 더 큰 재앙을 일으킨다. 마치 하인리히법칙처럼 말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린 지금 제각각의 직각자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타인에게 들이대는 직각자, 직장과 사회와 제도, 그리고 국가에 들이대는 직각자가 다르다. 내 이익에 부합할 때는 소리를 높이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자를 들이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움인 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직각만이 옳다 믿으며 자신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한다. 나는 직각을 맞추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무리 직각으로 맞춘다 하지만 조금씩 각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맞추어 나무를 연결해도 조금씩 달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직각을 맞추려는 노력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알을 깨지 않으면 다른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저 지금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이 일상이 계속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또 꿈을 꾼다.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알 속에서 웅크리며, 그래서 현실과 이상에 괴리가 생기고 괴로움에 찌든다. 알을 깨려고 하지 않으면서 알 밖의 세상을 그리기에 알 속의 현실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때에 굳어 있어 매미가 얼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의 지식에 묶여 편벽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비처럼 다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샌딩과 오일로 마감을 하면 가구는 완성이 되지만 삶에 완성이란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지나간다.
상대를 이해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더 넓게 끌어안는 것이다. 군자는 그렇게 사람을 포용한다. 소인은 반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해를 구할 수도,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다.
미니멀니즘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존재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일까? 모든 것을 버리고 발가벗은 육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는 장식과 같은 허세를 버리고 담백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자신의 것을 최소화하고 조화를 이루어나가야 함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대된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병세를 '파랑새증후군'이라 한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은 이루저질 수 없다. 우리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기대지 않은 이상은 망상이 된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이상이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힘이 된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달리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모진 것을 이긴다는 이치를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건만, 이것을 능히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형체가 없는 물은 형체가 있는 바위에 구멍을 낸다. 칼을 휘둘러도 물은 잠시 갈라질 뿐 곧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무엇으로도 벨 수 있는 것 같지만 어느 무엇으로도 벨 수 없는 게 또한 물이다. 이 부드러운 물은 또 무엇이든 뚫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은 부드럽지만 강하고 또 강하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바로 갈 수는 없다. 그 과정이 쉽다면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기에 결과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가구도 그렇다.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가구는 완성되지 않는다.
산을 만드는 것과 평지를 메우는 것은 모두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야 산이 될 수 있는데 붓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삼태기의 흙이라도 부었다면 이미 시작한 것이다. 시작하는 거도 어렵고 마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시작에는 끝이 있고 끝이 있은 후에야 또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을 수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없다. 실패도, 꼴찌도 시작한 사람, 무언가를 시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다. 그러나 시작했으면 힘을 다해 끝까지 가야 한다. 힘을 다했을 때, 기회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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