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이 많은 것을 창조한 것 같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소비하여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편리함과 욕구를 충족시켰을 뿐이다.
소비를 최소화하고 효율화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환경을 인류 후손에게 물려주기위한 최선이 아닐까?
[본문발췌]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공공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모든 종류의 자연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절대 야생의 지대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장소에서든 인간경제와 관련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자연은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셋째, 자연은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보호주의자들은 생태학적으로 번영한 상태에서 인간 역시 번영할 수 있으며, 그런 건강 상태의 기준과 지표는 야생생물들의 다양성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잠재된 야생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울러, 표토 속에 우글거리는 야생의 생물체들을 떼어놓고는 농업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벌레, 박테리아, 기타 야생의 생물체들이 표토 속에서 분해, 부식토 생성, 수분 저장, 배수 등 제 나름의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생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보존하는 길이다"라는 헨리 소로의 말은 내면의 진리일뿐만 아니라 현실이기도 하다.
일찍이 그리스인들과 히브리인들은 스스로 모든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지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산업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지게 마련이다. '경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 세대에게 계산서를 넘겨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 과정에서 고통스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굳이 교육의 가격을 따진다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그들이 받아 누리는 선물에 늘 따라다니는 책임들, 다시 말해 받은 것을 잘 이용하고 후세에 온전하게 물려줄 책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책임의식에서 멀어질 때 교육은 탐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 인해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한 가지 원인은 그 비포용성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경제는 자신에게 포함되지 않는 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으며, 무엇이 산업경제에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에 지나치게 연연한다. 이렇듯 산업경제에 대해 비판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고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제는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길게 고민하지 않고도 하느님 나라의 첫 번째 원칙, 즉 만물을 아우른다는 원칙이 떠오른다. ... 두 번째 원칙은 생태학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원칙인데, 하느님 나라에 속한 만물은 그 나라와 그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는 질서가 있다. 세 번째 원칙은, 인간은 하느님 나라에 속한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서, 혹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완벽한 방식이나 규칙으로 그것들을 아우르는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결코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즉 우리는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이 질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난해하다. 우리 처지가 어렵다는 것은 그 질서를 완벽하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섣불리 참견하고 침해한다면 엄중한 형벌을 받을것이라는 네 번째 원칙을 알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완전하게 인간으로서의 우리 스스로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 계산, 계략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당한 범위의 작은 인간경제에 참여한다. 위대한 경제에 참여할 때 역시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겸손, 연민, 인내, 관용, 이해력이 추가로 구비되어야 한다. 앞에서 암시되기는 했지만 두 경제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인간 경제가 가치를 평가하고 분배하고 이용하고 또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할 수 있어도 가치를 직접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치는 오로지 위대한 경제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것들에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합판으로, 합판을 의자로 변형시키면서 만들어낸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첨가할 수 있다. 선한 인간경제에서 이 같은 변형은 적절한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은 적절한 평가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인간경제는 자신이 직접 만들지 않은 재료들과 힘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인간경제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지식과 재능도 만들지 않았다.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가미한 것은 인공적인 것이며, 기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교의 가치는 인간생활에는 중요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2차적인 가치일 뿐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출할 마음을 먹으면 맨 먼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그릇되고, 압제적이고, 파괴적인 가치를 만든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는 의식주와 같은 생필품의 가치를 정당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때만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생필품들은 궁극적으로 보면 위대한 경제 안에서 창출된 것이다. 인간들 역시 금전적인 가치를 추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과 폭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생필품의 가치를 왜곡하고 자연과 인간 자원에 손실을 입힌다. 인플레이션과 폭리 그리고 이에 따른 손실은 어쩌면 인간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억지 부리는 데 대한 징벌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기계적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흙은 그 기능을 살펴보면 복합적이고도 놀라운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건강한 토양은 물을 보유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분수계(혹은 분수령. 내린 비가 각각 반대쪽으로 흐르는 경계선으로 하천의 유역을 나누는 경계선이 된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또한 분수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하는 '건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단순히 역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건강한 토양은 죽어 그 속에 묻히는 생명체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을 저장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토양의 이 이중적 능력은 우리에게 온갖 도움을 준다. 토양은 우리에게 좋은 작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홍수 조절과 지속적인 수분 공급, 그리고 침식 조절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표토는 물을 배출하는 동시에 보유한다. 이처럼 다양성이 수용력을 증가시키는 점은 산업적인 논리와는 크게 다르다. 산업주의자들은 저수와 배수를 서로 다른 반대 기능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다양성을 산업적인 과정에 해로운 것으로 보고 한 가지를 희생해서 다른 한 가지를 활성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수용력을 확대하려는 절망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따라서 문제를 격리시켜 지나치게 간소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기계적인 해결책에 의존한다. 산업주의자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발전이란 설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수를 쉽게 하려면 분리대나 댐과 같이 전문화된 물 저장장치에 의지해야 한다. 또, 베수를 의해서는 배수관이 도랑이나 심토파쇄기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내 분석이 지나치게 막연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예외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토양 보호의 책임이 원칙적으로 농부나 토양 관리인이 아니라 기술자에게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양 보호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땅을 파헤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의 이상은 '최소의 소비를 통한 최대의 복지' (E. F. 슈마허)가 되어야 하며,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키고 또 요구한다.
작은 경제의 일들이 위대한 경제 안에 적절하게 배치될 때 이런 미덕들을 꼼꼼하게 배려하면서 그 원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전문화를 필할 수 있다. 산업경제는 일에 대한 극도의 전문화, 다시 말해 일에서 그 결과를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산업경제는 이익의 분배로 존속되는 데다가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 사용자와 노동자, 일하는 자와 일과 생산물, 원재료와 상품, 자연과 인공, 생각과 말과 행동 등이 서로 맺고 있는 근본적인 유대관계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관계에서 분리된, 전문화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관찰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 즉 아무런 관련도 책임질 일도 없는 구경꾼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산업화된 예술과 과학은 거짓이며, 이러한 분리는 엄청난 오류이다. 결과의 전문화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바깥쪽도, 전문화나 보편성으로의 도피도, 휴식시간도 없다. 심지어는 무의미도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든 말든 상관없이 위대한 경제의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집하고 인내하지 못한다면 분해하고 파괴하는 것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범위 바깥에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억측은 다른 구성원들과의 유대관계를 해칠 뿐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 산업경제에서 예술과 과학은 전문화된 '직업'인 데다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예술과 과학 모두가 그 구성원이다. 예술과 과학은 위대한 경제로부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서로 통하는 공동체의 언어 또한 익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하려면 땅을 파괴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친밀한 인간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흔히들 소유권을 지녔다고 하면 적절하게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부재 소유권이 땅에 대한 저주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인되어온 사실이다. 기업의 소유자는 종업원의 무능력, 무책임 혹은 반감에 시달린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는 수로와 도로의 대중 소유권은 실제로 욕을 먹고 있다. 그러므로 땅은 소유권뿐만 아니라 소유자 개인이 참여하고 이용해주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땅을 가장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은 소유권을 가장 폭넓게 분배하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싸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자발적으로 싸울 것인가는 의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에는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열망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일시성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목적과 기준이라는 규정에 의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 결혼, 혈연, 우정, 이웃의 정으로 맺어진 어떤 관계도 그저 편리에 따라 존재할 수는 없다.
산업사회의 방식에 따르면, 이상적인 인간의 거주는 거주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 곳이다. 남이 집을 지어주고, 설비를 갖추어주고, 장식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해준다. 그곳에 사는 부부는 가능한 한 가족이나 집과 관련해서 생기는 힘든 일들을 직접 하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 그들이 하는 노동이란 주로 물건을 사고, 보관하고, 내다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조차 '열등한'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 '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최종의 목표는 버튼만 누르면 모든 문제가 처리되는 '주택'이다. 그런 '주택'에 사는 부부는 서로에 대해 성적, 법적, 사회적 의미의 파트너이긴 하겠지만 협력자는 아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혹은 서로에게 필요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이 늘어놓는 말에는 자기 손으로 해내거나 만들어낸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한 과거에는 본질적으로 장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기에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뿐이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대체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동안 산업경제는 분리, 퇴화,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가 서로서로 분리되자 노동과 그 산물이 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타락하면 정신은 기계나 전문가들, 정부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더욱이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공짜로 주어지던 것이 비싼 대용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체적인 건강은 삶에 필요한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쓸모 없어진 신체를 대신해서 번영한 산업화 시대의 기계는 치명적이고 잔혹하리만큼 비싸다. 인간의 몸이 유용하던 시절에는 육체가 쓸모 없어지면 당연히 죽는 것이고, 죽음은 치유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서 죽음은 점점 더 비싼 치료가 필요한 질병과 같이 멸시된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골 마을과 도시 근교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다.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공짜로 주어지거나 싼값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단순하고도 너무나 취약한 결합은 쉽게 붕괴되었으며 값비싸고 파괴적인 통신 및 운송 산업에 의해 대체되었다.
산업경제는 전형적인 채취산업으로서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폐기한다. 다시 말해 소비로부터 오염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반면에 농업은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반환해서 다시 채워 넣는 경제에 속한다.
농업적 시각에서 볼 때, 생산성보다 나은 말은 번영이다. 이 말에는 회계적인 충실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영이란 말에는 생산적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생산 수단을 적절히 배려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자기 주변을 소중히 돌볼 줄 알아야 번영할 수 있다. 번영한다는 것은, 전체의 일부가 되어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번영할 수 없다. 자신의 땅, 작물, 동물, 장소, 공동체가 번영할 때에만 비로소 번영할 수 있다. ...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는 지속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지속성의 가치는 오로지 번영에 의해 드러난다.
정착생활 때문에 비만을 비롯한 기타 질병들의 전염이 횡행하고 '건강 증진 운동'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실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직까지도 개발되지 못한 이용 가능한 에너지 공급원은 어쩌면 인간의 몸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경제가 할 일은 이런 에너지를 가치 있게 이용하고 그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손실과 수익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지리적 격차 때문이다. 농업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농장과 농장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석탄에 의한 수익이 주로 매장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발생하듯, 농업의 큰 수익들은 모두 도시에서 발생한다. 수익은 거의 손실을 자각할 압력이나 의무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 즉 잃어버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한다. 소 때문에 토양이 침식된 데 따른 손실은 포장된 비프스테이크로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공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켄터키 주 산악지대에 있는 삼림, 표토, 가옥이 유실된다고 해서 석탄 수익이 줄지는 않는다. 수익과 손실, 상품과 실비용 사이의 이런 특수한 격차는 우리가 곧 잘 사용하는 자원resource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의 뜻은 부활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resurgere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자원은 의존할 만한 공급원이며, 퍼내도 퍼내도 금방 가득 차오르는 샘물처럼 되살아난다. 표토와 농사짓는 인간의 문화는 적절한 '가정 경영', 즉 적절한 경제 속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스스로를 재충전하며 땅만큼 태양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경제는 자원과 부활하는 자원의 힘을 존중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그야말로 적절하다.
인간이 다른 생물체와 가장 다른 점은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했다는 점, 즉 인간은 문화가 만든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문화적 단련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나 짐승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오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힘'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체들 간의 힘의 서열에 있어 우리는 최상위에 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홍수, 폭풍, 화산, 지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인간, 즉 검약, 정의, 불굴의 의지, 인내를 비롯한 미덕들을 지닌 생명체로 만들 수 있는 문화를 가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문화의 제약, 규율, 개선에서 일탈할 인간들은 '자연적'이거나 '생각하는 동물'이거나 '털 없는 원숭이'가 아니라 마구잡이의 탐욕스런 살인자이며 파괴자인 괴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행위를 쉽게 저지르는 본성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농장을 잘 경영하는 방법, 숲을 보존하고 추수하고 재생하는 방법, 만들고 건설하고 이용하고 반환하고 부활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인간성도 회복시키며, 그 속에는 길들여진 것과 야생의 것이 영원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의무와 책임, 이 두 가지는 늘 어려운 데다 때로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분명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을 기준으로, 즉 자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 문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 문화가 자신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과 다른 문화들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들을 근거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결국 자연을 파괴할 것이다. 문화와 자연 간에는 대화가 있어야 하고, 조화는 그 대화의 한 가지 상황, 곧 바람직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의식적이고 진지하게 자기들의 일에 관해 이렇게 질문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가? 이것은 우리의 장소에 좋은가? .... 야생은 지금 우리가 쌓아야 할 인간적인 이해와 관용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문화이며, 야생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가정이다.
소유하는 것(집이나 직업, 배우자나 자동차)은 오로지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는 끝없는 불만족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제 과정이다.
우리는 단일 작물만 심어진 광대한 밭에서 자연의 힘이 쇠약해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일 부류만을 염두에 두어 획일적으로 개발되는 주택지를 보면서도 인간생활의 토대가 탄탄치 못함을 걱정한다. 산업문명이 가져온 획일적 문화에 젖은 우리는 마치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수많은 여백과 다양성을 가진 다목적 풍경이 보여주는 인간성과 자연성을 열망한다. 여백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작업의 종류와 땅의 종류뿐만 아니라 부지를 나누기도 한다. 산울타리 사이의 좁은 길, 강가, 나무가 늘어선 울타리 등등의 여백들은 항상 야생이 소유했으되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범위가 설정되는 것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동식물과 같은 야생의 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이들이 야외에서 뛰어놀기에도 더없이 좋다. 이런 여백의 장소들로 인해서 인간과 야생 쌍방은 서로의 경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는 단일 재배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명들에게 보다 안전한 조화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는 단일 문화의 풍경이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반면에 조화의 풍경은 민주적이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농사와 관련된 여타 업종에서도 사업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규모가 적절해야만 노동과 관리의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의 자유에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이 따른다. 트랙터를 대신하는 말수레, 비료를 대신하는 분뇨거름, 제초제를 대신하는 사이갈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옥수수 경작에 대해 랜시는 "노동력을 판다"고 말한다. 즉, 경제적 의미에서 합리적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서 이런 합리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희생자로 전락할 것이다. 랜시는 쟁기와 써레로 땅을 일구고 화학약품 없이 작물을 경작하면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노동력을 대신하여 고가의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연료를 구입하는 대신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고가의 장비를 구매하는 대신 말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석유를 대신하여 자신이 생산한 옥수수, 귀리, 건초를 사용하면서 시장가격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얻으며 사료를 판매하고 있다. 그와 그의 말들은 농장에 내리쬐는 햇빛을 공짜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태양에너지 전화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집에서 에너지와 비료를 생산하고 잡초를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농부들은 그런 기능을 갖춘 장비들을 구입하느라 등골이 휜다. 산업생산 방식에 찌든 농부들은 생산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한다. 그들의 몰락으로 번영을 누리는 공급업자들에게 그들은 한낱 소비자에 불과하다. 국가경제에 관한 한 이런 유형의 농부들은 오로지 값싼 식품을 제공하고 농업 관련 기업들만 배불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산업주의는 양심의 가책이란 게 없는 정신이다. 산업주의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물건으로 취급하며, 물건은 궁극적으로 쓰레기로 취급하는 개념을 단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산업주의는 실용과 문화, 인간과 토지 간에 꼭 필요한 관계에 무관심하다. 인간생활의 기초 경제와 경제학에 무관심한 것이다. 우리 경제는 점점 추상화하고 문서화하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주를 결정하는 실질경제를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 경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적 활력과 행복의 기준으로 염원하는 거짓 경제 또는 공상적인 경제로 점점 더 변해가고 있다. 이른바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말해지는 이런 경제에는 그 자체로 기준이 없다. 산업경제로는 자연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를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자연을 단지 '천연재료'의 공급원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는 사람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 또한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사람을 단지 '노동력'(즉, 도구나 기계의 일부) 또는 '소비자'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는 오직 통화량에 의해 경제의 건강함을 측정할 뿐이다.
"오직 성공한 자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 시스템이다" - 마티 스트레인지 Marty Strange, "지속 가능 농업이 경제적 구조 The Economic Structure of a Sustainable Agriculture"
암만파(Amish)의 몇 가지 원칙들, 이 원칙들은 관리자와 주주 그리고 전문가들이 착취해대는 세상이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가족과 공동체를 보존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 부엌과 정원, 가구와 농장에 딸린 농가의 가내 예술품들을 보존하고 있다.
-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동력(태양, 바람, 물 등에 의한 동력)을 멀리하지 않기 위해 기술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과 저동력 기술의 최적화된 사용을 병행하기 위해 농장 규모를 제한하고 있다.
- 앞서 언급한 관습과 기술의 제한을 통해 비용을 제한하고 있다.
- 집에서 생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자식들을 교육하고 있다.
- 농사일을 실용적 기술이자 정신적 단련으로 여겨 존중하고 있다.
생활수준(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생활수준)은 향상되었지만 공동체의 삶은 여러모로 쇠퇴했다.
식민경제의 결점은 그것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식민경제는 현실을 왜곡한다. 사실상 그것은 착취이익의 장부에서 비용을 지워버리는 간단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착취이익에는 농촌이 배제되어 있다. 외국의 식민지나 진배없는 것이다. 이런 배제의 결과로 실질적인 생산 비용을 착취이익이 지불하지 않으면서 착취되는 토지와 농민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있다. 이국이건 자국이건 식민지는 생태계와 공동체가 단일하기 때문에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식민주의에서는 건실한 지역경제의 발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경제는 오로지 '천연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구조만을 가지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식이다. 그런 시장은 식민지로부터 가치를 유출시킨다. 따라서 식민경제는 E. F. 슈마허가 주장하는 "지역의 자원을 가지고 지역에서 생산한 재화를 지역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이상의 실현과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다. 국가경제는 내부 식민지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공동체를 파괴한다. 즉, 지역경제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의 자급자족 원리까지 파괴한다.
지역경제는 문화적 지식과 태도 그리고 기술, 가족과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 가족과 공동체의 노동력 그리고 재능, 겸손, 성실, 아량, 이웃간의 정과 같은 문화적, 종교적 원칙 등과 관련하여 가치 있는 무형 자산이 될 수 있다. 또한 동식물 및 인간의 신체를 일종의 '태양 에너지 전환기'로 이용하면서 동력을 공급할 수 있으며, 이웃과 지식 및 기술을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무상의 공급물을 경제적 이익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지역경제는 대개 우선순위 목록에서 밀려나 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현재 공동체의 개념과 관련된 이런 경제적, 정신적 가치가 과거 공동체들의 경제적 자산이었으며, 경제적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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