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를 마음에 품고 그리스를 만나다.

 

 

[본문발췌]

 

 

굳이 이렇게 길고 고된 여행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고도 분명하다. '즉물궁리', 곧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책상머리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리하여 책과 논문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삼되, 직접 찾아가 그곳 시간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옛 영웅들의 웅변과 민초들의 함성을 만나고자 했다. 이미 무너진 신전의 잔해를 직접 쓰다듬으며 무너지지 않은 문명의 기둥을 확인하고자 했다. 더디고 고될지라도 이렇게 현장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내가 만나고자 한 문명과 역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타적이고 페쇄적인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소란스럽더라도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짐으로써만 문명이 잉태되고 자랄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민족은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며, 분열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역사의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영혼의 종속을 용납지 않으려면 거부, 사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초월하는 험난한 승부, 바로 그러한 저항이라야 진정으로 당당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쌓고 싶어했지만 난공불락이란 없었다. 인간이 쌓아올린 것들 중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없으며, 지키려는 것 중에 영원한 것도 없다. 빼앗으려는 욕망은 능동적이고 지키려는 본능은 수동적인 탓이 아니겠는가.

 

 

렌즈가  포착한 장면은 진실이 아니다. 눈으로 찍고 머리로 인화하며 가슴에 먼저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진리보다 더 진실한 것이 무어라 생각하나? 그것은 바로 전설이네. 전설은 덧없는 진실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오디세이아의 싹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 <영혼의 자서전2>

 

 

삶은 좌절이나 권태가 아닌 고독한 투쟁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숙명지워진 존재가 아닌 온전히 실존하는 내가 된다는 뜻이다. 

 

 

위대한 예술가란 표면에 덧씌워진 형상을 투과해서 이면에 드리운 본질을 본다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즉흥적이고 위선적인 행위 너머에 있는 거대한 물결을 발견하는 것이지. 증발해버리는 일상을 불변의 상징물로 재배열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 위대한 장인은 영원성과 즉흥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순례.. <영혼의 자서전1>

 

 

각 시대는 그 시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지. 각 시대는 지나간 시간 속의 사상과 사건들 중에서 오늘의 시대에 동화하고 변화시켜 행동할 수 있는 것만을 적절히 선택할 뿐이거든. - 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파르타의 폐허, <모레아 기행>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두목, 이따금 내가 이렇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대목이겠는데)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우리 기술자들은 '꽈당'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꽈당 하는 걸 조심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든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이든 간에, 모든 인공 구조물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제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법칙인 것이다.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오고, 세워진 것은 반드시 무너지는 법. 그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바로 이 시기에 피어난 그리스 문명은 결코 향기도 촉감도 없는 초자연적인 개화가 아니었다네. 그것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진흙을 빨아먹으며 꽃을 피운 나무였던 게야. 실제로 진흙을 많이 빨아먹을수록 꽃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라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올림피아의 풍경, <모레아 기행>

 

 

인간사에 일어나는 일들을 두고 굳이 목적을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신도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추구하며 때로는 위기를 맞고 스스로도 투쟁에 휘말리니 말일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일 테지. 짙은 안개처럼 본성은 우리도 모르는 깊은 심연 속에 존재한다네. 우리가 보는 세상은 허깨비가 아니어서, 제아무리 바람이 분다 할지라도 그 안개가 걷히지 않을 것이네. 그것들은 뼈와 살이니.... 한번 만져보시게, 존재할 테니까. 신이 우리를 부른다고 보나? 아니면 우리가 신을 부르는가? 도와달라고 말이지.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렇게 신에게 요청하는 대신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고 상승의 길, 오름길을 묵묵히 올라가는 것일 게야.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인 없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문명이란 다양성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이 자유롭게 겨루는 창조적 긴장이라는 씨앗이 발아하여 이룬 결실인 것이다. 이에 비해 획일성은 창조적 긴장이라는 씨앗을 말라죽이고 마는 척박한 토양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문명의 발전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코린토스는 다양성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문란하여 창조적 긴장이 발아하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 

 

 

제도의 효율성만 보고 그 안에 있는 '인간'을 외면하는 '서양식 제도주의'의 함정은 이미 그때부터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보면 그의 말대로 오늘날의 인간들은 노예로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이며, 어느 나라의 국민이고,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가 부여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헐떠거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이 아닌 노예의 삶에 다름 아니다. 고난에 맞서며 강건한 자세로 삶에 정면으로 다가서는 정신, 스파르타의 용맹이 새롭게 태어나야 할 시기다. 그의 말을 들으니 스파르타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 씁쓸하게 추억해야 할 땅이 아니라 우리에게 엄청난 숙제를 던져주는 땅이다. 여기에 덧붙여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다. 공동체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사랑과 헌신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모든 시민은 평등했고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권리와 특권은 반드시 의무와 함께했고 심지어 왕이라 하더라도 특혜를 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시민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힘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용맹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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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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