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잃지 않고 버티는 삶,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생각이 필요한 시간.
[본문발췌]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 라캉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이지, <속분서 성교소인>
우리의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아무런 반성 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 주인이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실어 나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낙타와 달리 사자의 등에는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짐도 올릴 수가 없다. 짐을 올리려면 사자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세 번째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 즉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이'의 정신이다. 니체의 아이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제라고 할 수 있다.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네모남을 버리려면 혹은 버렸다면, 얼음은 반드시 물로 변형되어야 하거나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얼음과 물은 상이한 두가지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갖는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음과 물 사이의 변화는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양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얼음과 같은 마음이나 물과 같은 마음은 모두 우리 마음의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치열한 자기 수양에 의해 우리는 성인도 될 수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 ...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 <중론>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불교 고통의 메커니즘과 치료의 방법, 사성제
인간은 고통의 존재라고 선언하는 고의 진리,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집의 진리, 고통은 소멸될 수 있다는 멸의 진리, 집착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도의 진리
집착을 소멸시키는 팔정도 : 바른 견해, 바른 사유, 올바른 말/행동/생활/노력/집중/참선
우리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롭게 펼쳐진 삶의 환경과 우리 내면의 습관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습관대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삶의 환경이 타락했다면 습관을 지키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삶의 환경이 더 좋아진 것이라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위령공'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거꾸로 배열된 비늘)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 한비자, <설득의 기술>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논리적 사유의 핵심이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유는 타자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아우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어떤 사업도 협동조합주의, 상업주의, 그리고 중농주의를 반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메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이 기존의 가치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드디어 '새로운' 혹은 '낡음'과 관련된 시간의식을 얻게 된 셈이다.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이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 존재가 되고 또한 무자각적인 행동의 효과적인 동인이 된다. 스펙터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 매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으로서(세계는 더 이상 직접 파악될 수 없다),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 -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명 연장의 꿈이 오직 소비의 영역에서, 다시 말해 소비자로 하여금 주머니를 열도록 유혹하는 데 있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낚시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시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대립과 갈등이 심화될 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사랑과 공존의 지혜를 포기하도록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졌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는 길이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 가난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충실성의 지지자, 즉 진리 과정의 지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상을 지킨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것을 뒤흔들 만한 사건,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사건을 만났을 때,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 주체는 바로 이런 충실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며 나를 만나리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까지 말이다. - 이성복 시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해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노동보다는 놀이를 통해 인간은 놀라운 집중력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 놀이 개념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창조성의 비밀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시민 사회 속의 개개인의 관조이다.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간' 이다." -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우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지닌 '새로움'이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지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환경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통찰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 몽테뉴, <수상록>
참다운 여행은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첫 번째 배움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배우는 것. 두 번째 배움은 여행지에서 삶이 충분히 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일상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여행은 차이의 경험이다. 낯선 여행지와 익숙한 일상 사이의 차이, 혹은 이제는 익숙해진 여행지와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사이의 차이. 이 두가지 차이를 동시에 겪어내야만,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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