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인생의 지혜, 행복의 조건, 삶의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류시화 시인이 엮다.


[본문발췌]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안에 있다.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어떤 생각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잎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린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꺽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특성의 아름다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물이 한 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다. 모자라고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 그걸 딛고 일어서라는 새로운 창의력,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것을 비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인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묵은 버릇을 떨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튼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적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이 용서 받는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수렁에 갇혀 새날을 등지면 안된다. 맺힌 것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세상 문도 활짝 열린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풀을 뜯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그 틀이 다르다. (그냥 바라보는 기쁨)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이것을 익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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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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