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것도 모두 우리의 탐욕과 편리함으로 빚어진 기후변화의 영향이라고들 하는데, 이상기후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흙, 물, 공기의 오염은 당장은 생활의 불편정도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미래 세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다.


[본문발췌]


그린벨트 운동의 네 가지 핵심 가치

  •  
    환경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환경을 사랑하는 이는 지구에 이로운 행위를 한다. 나무를 심거나 잘 자라도록 보살피고, 자라나는 나무에 거름을 주고, 동물과 동물 서시식지를 보호하고, 흙을 지키고, 지구와 주위 환경과 그것이 주는 모든 것에 실질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 환경에 대한 사랑
  • 지구 자원에 대한 감사와 존중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긴다. 지구 자원을 조금이라도 낭비하려 하지 않으며, 쓰리게 줄이기, 재사용, 재활용(reduce, reuse, recycle)의 3R을 실천한다.
  • 자강과 자기 발전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생활환경을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으며,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약물중독과 같은 무기력하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멀리한다. 필요한 내적 에너지를 스스로 이끌어 내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이해한다. 자각(스스로 깨닫기), 자강(스스로 강해지기)
  • 헌신하려는 마음과 자발적 활동
    그린벨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다른 이들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쓰면서도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음을 뜻한다. 그린벨트 운동은 공동선을 위해 제 몫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공동선이란 가깝고 친밀한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고, 머나먼 곳에 사는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따. 여기서 '다른 이들'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삶과 지구를 우리와 공유하는 뭇 생명을 두루 아우른다.


나는 지구가 파괴되면 인류 또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과 관찰로 깨달았다. 물이 오염되고 공기 중에 매연과 연기가 가득한, 상처 입은 환경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중금속과 플라스틱 잔류물로 오염된다. 또 흙은 사실상 쓰레기와 다를 바 없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더러워진 흙은 우리 건강을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끝내는 몸과 마음,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므로 환경을 해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인류 전체를 해치는 일이다. 지구가 되살아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돕는 일이다.


기후변화를 겪으면서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두 이 지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욕구와 바람은 지구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충분히 가지려면 다른 사람들이 덜 가지고 살아야 한다. 괜찮다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덜 파괴적인 다른 방법을 찾는 일 말고도 안 된다고 말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가이아, 즉 그 자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한다. 그의 학설처럼 지구는 자기 조정 수단을 작동해 기온의 균형을 되찾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과 많은 종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자원이 베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원에 값을 매긴다. 우리가 바로 이런 태도로 지구를 대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생태 위기가 그렇게나 많이 발생한 것이다. 환경 파괴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

이 욕망은 우리가 지난날을 잊고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빚어 낼 수 있다. 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이제 그만. 이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하는 것은 확고한 원칙의 문제이다. 지구를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높은 의식을 지닌 이들은 올바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들은 균형과 조화를 소중히 여기고 욕망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 선 밑으로든 위로든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사람들이 주로 도시에 사는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과소비가 주요 욕망이기 때문에 생태 문제가 심각해진다. 하지만 매립지나 스모그에 덮인 도시, 또는 물고기들이 죽어 있는 오염된 강에 가 보지 않는 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눈으로 보지 못한다. 한편 더 가난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평등 때문에 빈곤에 시달린다. 그래서 지역 환경을 지나치게 파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파른 비탈이나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나무와 풀을 베어 내고 농작물을 길러 대규모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방목한 가축이 남김없이 풀을 뜯어먹는 바람에 목초지가 사막처럼 변한다.


누구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의 관대함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 의식 또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들에서 필요한 만큼만 거두고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쓰레기가 줄고, 생태 발자국은 가볍게 찍혔다. 그것은 오늘날 가난한 많은 나라들이 목표로 하는 식량 안보의 기반을 닦는 일이기도 했다. 자급자족은 식량 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중요한 원칙이었지만, 공동체는 길손을 돕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를 때맞춰 돕는 일을 소중히 여겼다.


생태 발자국ecological footpring. 인간이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원의 생산과 폐기에 드는 비용을 토지로 환산한 지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은 세계적인 규모로 퍼져 나가면서 우리 환경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한 예로 2006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연구에 따르면, 고기와 유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세계 축산업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에 18퍼센트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온갖 운송 수단이 내뿜는 온실가스의 총합보다 크고, 벌목과 숲의 감소로 일어나는 온실가스 효과와 맞먹는다. 집약적인 축산업은 가축을 먹이는 데 대규모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공기와 물과 땅을 더럽히고 숲과 초지를 파괴하고 있다.
많은 토착 부족의 경제와 문화에는 공적 공간의 공유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복지와 공동선에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있었찌만 이는 나날이 자기 자신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윤리로 바뀌어 왔다. 과거 공동체는 땅이 베푸는 풍요를 공동체 구성원과 길손들과 공유하는 특성이 두드러졌던 반면, 오늘날의 공동체는 땅에서도, 신체적, 환경적, 도덕적으로 자신들을 지켜 주었던 관습에서 멀어졌다.
이런 자연관의 변화는 자기 존중의 상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 원인이자 결과였다.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 온 것이다.


세상을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보면 시스템 전체가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 시각은 우리와 지구의 관계를 더 깊이 질문하도록 이끌고, 우리가 지구에 어떤 태도를 지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도록한다. 우리는 우리가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한 채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그 질문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관점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 사이에서, 큰 그림과 작은 그림 사이에서, 측정과 데이터에 기반을 둔 지식과 오랜 지혜와 경험에 기댄 지식 사이에서 말이다. 이 서로 다른 관점의 균형을 마음에 새기고, 이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무를 출발점 삼아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나무들을 목재용으로만 기른다면 나무가 한창 자랐을 때 베어 내는 것이 공공 정책이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연자원 이용에 관한 기존의 경제학은 인류가 주위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많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기존 경제학은 나무의 가치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팔아 손에 쥘 수 있는 돈의 액수로 따진다. 사실 과학자들은 숲이 자연과 사회에 심리적으로, 생태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널리 이바지하고 있는지를 근래에 와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숲은 물을 정화하고 모아 두며 기후 패턴을 조절한다. 나무는 약재로 쓰이고 식량을 공급한다. 흙을 기름지게 하고 탄소를 가두고 산소를 내뿜는다. 다양한 종의 식물과 동물을 보호한다. 사람들은 숲에 기대어 삶을 영위해 간다. 자연을 팔아 돈을 쌓는 것, 인간의 탐욕으로 환경과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이다.


숲은 무엇을 낳는가?
흙과 물과 깨끗한 공기이다.
흙과 물과 깨끗한 공기는
삶의 토대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느끼고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용과 착취, 지배를 중시하는 또 다른 관점에 너무도 자주 굴복해 왔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연 전체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식민지 이전에 존재했던 키쿠유 생활양식을 되돌아볼 때 나는 키쿠유 사회가 자연 세계에 감사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즐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탐욕스럽고 물질적인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임을 확신하게 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키쿠유 사람들이 강에 가는 이유는 물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말해 물을 병에 담아 팔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강가에서 편안히 쉬고 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간다. 강가에서는 칡이나 바나나, 사탕수수를 기르고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며 감탄한다.
환경을 사랑한다면 베어지는 나무를 자신처럼 느껴야 한다. 땅이 죽어 가기 때문에 함께 죽어 가는 사람과 사회가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 우리는 황폐해지는 자연을 안타까워해야 하고, 인간의 행위로 위기에 처한 종을 알게 되거나 오염된 강과 매립지를 볼 때 분노해야 한다. 메마른 도시 환경 속에서도 공원이나 나무나 꽃을 가꾸며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강물이 더 이상 바다로 흘러들지 않을 때, 또는 물에 쓸려 온 흙이 호수 바닥에 쌓여 굳어 있을 때 느끼게 될 절망을 알아야 한다.


감사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고 그것을 지혜롭게 쓰겠다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그린벨트 운동에 꼭 필요한 가치이다. 우리는 하나의 방침을 통해 이 가치를 증진해 왔다. 그 방침이란 오랫동안 선진국 환경 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쓰레기 줄이가, 재사용, 재활용의 3R을 가리킨다.


모타이나이는 그대로 번역하면 "낭비하지 말라"라는 뜻이지만 이는 물건뿐 아니라 자원과 시간에도 적용된다. 모타이나이는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것에 느껴야 하는 감사를 아우른다. 또한 우리가 운 좋게 받아온 것들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경의를 표하는 태도와, 그것을 낭비하지 말고 조심히 써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괄한다. 모타이나이는 소유물이 마치 자신의 정체성이라도 되는 듯이 집착하지 말고 가진 것에 고마워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올바르게 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자신이 과분하게 받았을지 모른다는 죄의식이 스며 있다.
모타이나이는 여러 수준에서 우리에게 호소한다. 3R과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줄이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은 과소비와 낭비가 만연한 선진꾸뿐 아니라, 환경 악화 탓에 더 가난해지고 삶의 바탕인 생태계가 되살아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 보다 가난한 나라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모타이나이라는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버리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또는 함부로 소비하는 데에서 벗어나 감사의 가치를 깊이 고민하도록 이끈다. 모타이나이는 우리가 쓰는 자원에 고마워하고, 우리가 만들어 낸 쓰레기와 속수무책으로 낭비한 시간을 반성하며,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원천에, 그것들이 집에 오기까지 지구가 치른 대가에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질적 소유가 더 커진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더 만족하거나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부와 기반 시설, 소비적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수십억 명도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현재의 생산수단을 이용해 이 수준의 부와 안락을 누리려면 부와 문명과 다른 종들이 기대어 살고 있는 생태계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든 지표가 가리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 문명 세계를 정복하고 파괴하는 데 앞장섰고, 자신감 있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고 억압했으며, 다른 나라의 천연자원을 약탈해 이익을 보았던 바로 그 나라들이 환경 의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의 시민들이 현재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장 잘 안다. 선진국의 많은 시민들이 3R과 모타이나이를 실천하고 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자원을 쏟아붓고, 일터와 가정, 지역사회에 찍힌 크나큰 생태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미 자국의 천연자원을 초토화시킨 많은 산업사회가 오늘날 개발도상국에서 자원을 시굴하고 있다. 이는 약탈하고 낭비하는 산업 성장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임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가난한 나라들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도 목재, 광물, 원유, 커피, 밀, 콩 같은 일차산업 생산물의 수출을 경제 기초로 삼고 있다. 이들 나라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천연자원인 환경을 위험한 수준까지 악화시키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풍요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나라와 지역의 부패와 정치인들과 손잡은 비양심적인 기업에 설득당해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실제 가치에 못 미치는 헐값에 팔아 버린다. 심지어 그들은 지구를 중심에 놓은 새로운 의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원이나 그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보고서 강가에 우뚝 선 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스스로 헤엄쳐서 강가로 나와야 빠져 죽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물살이 더 거세질수록 물에 빠진 이는 공포를 느끼고 허우적대다가 결국 빠져 죽을 가능성만 더 커질 것이다.


물질적 부는 오염과 쓰레기, 천연자원 고갈 등 눈앞의 환경을 대가로 증가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일정 수준의 안락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전에는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따르는 비용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자신들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재의 환경 위기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길을 상상하지 못하거나, 지난날 한 나라나 지역의 문제였던 것이 지구적 범위로 확산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사는 곳에서 자신과 환경에 편안함을 느끼고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물질적인 것들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 이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공감하고 아집을 버리며 타인에게 이바지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영혼으로 충만하다.


구조적 불평등 탓에 부유한 나라에서든 가난한 나라에서든 분명 가난한 이들은 가난에서 탈출하기 어렵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기 쉽다. 그 불평등을 인식한 그린벨트 운동은 나무를 심고 황폐해진 자연과 숲을 되살리고 식량 안보를 증진하며 물을 모아 두고 쓰레기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일에,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변화에 꼭 필요한 민주적 협치(good governance)를 정착시키기 위한 활동을 오래전부터 결합해 왔다. 민주적 협치란 지도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결정을 내리고, 경제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공평하고 책임감 있게 자원을 이용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약자이든, 또는 처한 환경이 얼마나 불공평하든,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고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린벨트 운동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나무 심기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사실로 증명했다. 지구의 상처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싸움이 성공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힘이 꼭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은 교회 목사나 임원 장로들이 왜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지 않느냐는, 신도들에게 기대어 먹고살지 말고 정식 직업을 갖든지 적어도 가축을 키우거나 농사를 지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설교하는 것이 우리 직업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말하는 것이 어떻게 한주 내내 매일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건강하고 몸뚱이가 멀쩡한 사람들이, 극빈층에 가까운 사람들이 포함된 신도들에게 기대어 사는 데 만족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을, 그리고 교회를 잘못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공정해지려면,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맞설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자원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합리한 일이 저질러졌을 때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의식 수준을 갖는 게 아닐까. 그 의식은 우리에게 어디에도 압도당하지 않을 의지를 줄 수 있다. 우리는 강인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깨어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그 일에 몰두한 나머지 다른 일을 할 틈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소명 의식은 어려운 고비를 지나 전진하게 하고, 자신에게 있는 줄 몰랐던 힘을 줌으로써 장애물을 뛰어넘게 한다. 하지만 소명 의식은 찾아다닌다고 해서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외부의 사건과 상황, 지식이나 긴박한 필요에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 깊은 곳, 자신만의 근원으로부터 우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의식은 또 다른 중요한 가치의 샘, 다시 말해 헌신하고 되돌려 주고자 하는 바람에서 솟아나기도 한다.


토머스 베리 신부,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어울림이다.", 또 지구는 공유지로 "모든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다른 모든 존재 덕분에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에 이바지한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두 보프, "사회적 불공평은 생태적 불공평을 낳고, 생태적 불공평은 사회적 불공평을 낳는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인간의 존엄성은 지구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사용하는 기초를 이룬다.


슈바이처는 자연을 도구적인 가치로만 여기는 개념을 거부하고, 생태계 생명의 다양성과, 나무든 냇물이든 흙속의 지렁이든 모든 피조물이 존중받고 더 나아가 경외받아야 함을 인식했다.


우리는 앞에 놓인 과제를 보고 우리에게 충분한 힘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가난, 불의, 벌목, 사막화, 토양 유실, 기후 변화가 미칠 재앙에 가까울 영향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거대한 문제들을 생각할 때 특히 그렇다. 또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힘없는 이들을 격려할 때, 또는 지도자들에게 정의와 공명정대함을 요구할 때 특히 그렇다. 우리가 너무 작고 너무 하찮으며 너무 유약하다고 느낀다. 변화를 일구어 내려고 하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렵다. 하지만 우리는 벌새처럼 고집스럽게 행동하기를 배우고 변함없이 헌신하며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벌새처럼 작게 느껴진다 해도, 작은 부리로 그 구슬만 한 물방울을, 다시 말해 작은 변화의 씨앗을 물어다 필요한 곳에 떨어뜨려야 하며, 아무리 성공할 가능성이 적더라도 그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 우리보다 권력을 많이 가진 이들로부터 경멸이나 조롱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 관심조차 못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한 걸음 전진해 우리와 함께 걷도록 힘을 줄 수 있다. 현재 상태를 벗어나 스스로 힘을 내 행동에 나서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결국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사회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 시절이 어른이 된 지금보다 더 소박하고 참되고 순수했다고 늘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역사를 거꾸로 돌려서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소유를 줄이고 쓰레기를 덜 만들어 내도록 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날이 통합되고 세계화되는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 자체가 더 많이 갖고 금세 버리며 흥미를 잃은 것은 곧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E. 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퍼뜨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 수준에서든 거시 경제 수준에서든 여전히 더 많이 축적했느냐의 잣대로 성공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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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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