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본문발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유理由를 아는 것은 이치理致를 아는 것이라 할만하다. 존재하는 것을 물物이라 하면, 존재의 이유는 사물의 이치이고, 우리는 이것을 물리物理라 부른다. 
 
과거의 학자나 지식인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하늘은 우주와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원자들은 서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어야 할 곳과 움직임 그리고 가야 할 곳에 대한 생각으로 섬세한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종교 회의를 개최하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방법으로 뒤섞이고 뒤범벅이 되는 끝없이 계속되는 그런 일에 의해서 서로 부딪히고 몰려다니면서 모든 가능한 움직임과 조합이 이루어진다. 결국 원자들은 이 우주가 만들어지는 데에 필요한 그런 배열을 갖추게 된다.'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나'라는 원자들의 '집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나를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집합'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되어 영원불멸한다.
 
 
'물질을 정복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고귀하고 경건한 한 편의 시이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원자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과 일상을 설명하는 뉴턴 역학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원자들의 집단이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일상의 물체처럼 행동하는지, 정말 크기가 중요한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측정 문제'라는 양자역학 역사의 지긋지긋한 논쟁과 관련 있다. 
 
돌멩이의 낙하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돌멩이가 언제 떨어질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원자를 설명하려면 양자역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을 원자로부터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세포, 세포에서 인간으로 층위가 바뀔 때마다 이전 층위에서 없던 새로운 성질이 창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층위에 따라 다른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것은 다르다. More is different.
 
 
'나는 진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었다. 흙이 말한다. 왜 당신은 나를 건드리는가? 그대와 나는 둘 다 같은데. 비록 일부가 가라앉고 일부는 떠올라도 우리는 모두 단지 흙일 뿐이다.' - 오마르 하이얌.
우리는 죽으면 흙으로, 즉 지구로 돌아간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이렇게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것일수록 보다 더 작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자들이 지배한다. 지구상 생물은 포도당 분자를 산화시켜 이산화탄소와 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는 탄소, 산소, 수소 원자가 배열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때 원자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원자핵 내부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우주는 시공간상에서 물질이 운동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연극이다. 물질의 운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지구상 모든 물질이 운동하는 원인, 즉 에너지의 근원을 추적하면 태양에 다다른다. 태양은 원자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열로 불타오른다. 이렇게 우리는 별과 연결되고, 별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자핵과 연결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핵은 변하지 않는 물질의 토대가 되지만, 별의 원자핵은 쪼개지고 합쳐지며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어떤 원자핵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는 또 다른 원자핵으로 만들어진 물질들의 움직임을 추동한다. 이렇게 우주는 원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다.
 
 
같은 원자들이 모여 배열하는 방식에 다라 세상의 온갖 다양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이가 동의하는 생명의 속성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며 번식을 통해 '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와 복제, 이 둘의 결합이 생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잠시 생명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은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생명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닐까? 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며 생명은 더없이 경이롭고 삶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기적 같은 찰나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낭비하거나 남을 미워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며, 진화란 이러한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cessity)
 
 
생명의 핵심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복제, 번식, 진화도 일단 생존해야 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구상의 동물은 호흡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걷고 숨 쉬고 생각하고 번식한다. 한때 이 에너지를 신비한 생명의 기운 같은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호흡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은 연쇄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학 반응이 이렇게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생명에 쓰이는 원자는 무생물에 쓰이는 원자와 동일하다. 생명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생물은 정교한 생화학 기계다. 이 기계는 수많은 원자로 되어 있고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 수많은 원자가 관여하는 이상 실수는 반드시 일어난다. 예측 불가의 불확실성은 원자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에 내재된 본질적 특징이다. 제법 큰 규모의 원자 기계에서는 열역학적 요동이 실수의 이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류가 누적되고 고장이 잦아지다가 생화학 기계는 결국 작동을 멈춘다. 우리는 이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생물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DNA, RNA, 단백질 모두 원자로 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화학 반응은 양자역학에 따라 작동한다. 화학 반응을 지시하는 존재는 따로 없다. 충분히 많은 분자가 빠른 속도를 갖고 무작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원자 수준에서 이것을 위한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는듯하다 하지만 수많은 원자들이 모여 생명의 몸체를 이루는 순간, 외부 변화에 저항하며 자신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드는 '것'이 탄생한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하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복제하려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이런 원자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만들어진 원자 구조물이 복제의 특성을 얻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끝없이 복제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학은 우주에 의도나 목적이 없다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생명은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 기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지구 밖에서 다른 생명체를 발견하는 날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외계 생명체의 화학 체계가 지구의 생명과 유사하다면 생명의 보편 원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생명의 힘은 애초에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지구가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사랑은 휘발되고 없다. ... 사랑의 시작을 여는 필수조건에는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고, '필연'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실수일 뿐이다. .. 실수의 첫 발이 사랑을 점화시킨다. 그 실수는 이후, 가장 특별한 것, 가장 현명한 것, 가장 필연적인 것으로 미화된다. 미화하는 힘 자체가 사랑의 힘인 셈이다.' - 김소연, <마음사전>
 
 
'인생의 목표가 행복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이야.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중요하고 사소한 약속들을 지켰다는 증거였다.' -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무한은 숫자가 아니라 과정이다. 끝없이 커져가는 과정이다. 점은 무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따라서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이 점이라면 사랑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사건이 한 사건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간이 가진 특별함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생각, 형태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무형의 상상에 있다. 바로 인간의 문화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었고, 문화를 통해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포유동물이 되었다. 인간다움은 문화에 있지만 문화의 이름으로 강요된 악습과 억압은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제 문화의 산물인 과학이라는 방법론은 인간이 상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인과적 설명을 끌어들이는 건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무언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생각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미 일어난 진화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인과적 설명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보니 진화사를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이 진화의 목표였다는 설명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언어를 이용할 수 있어 인간의 사회는 다른 동물의 사회보다 더 강력하고 정교한 소통이 가능하다. 인간은 더 깊은 공감, 더 강한 협력을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읽기에도 능하다. 나아가 가상의 스토리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는 허구를 믿는 능력과 관련 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지폐'는 색칠한 종이 쪼가리다. 하지만 지폐가 가진 허구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경제는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도덕과 윤리도 그것이 왜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지 않는 순간,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세상은 기본 입자에서 원자, 분자, 생물, 지구, 태양, 우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 각 층위는 자기만의 창발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의 층위를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층위의 특성으로 쉽게 환원할 수 없다. 각 층위의 개별 특성을 알고, 이웃한 층위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고, 전체를 조망할 때에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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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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