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교류 양과 속도,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내 집단 편향(ingroup bias)에 갇혀 편견과 고정관념이 확대되고 생각의 정체(停滯) 된 사람들이 양극화와 혐오 사회를 조장한다.
[본문발췌]
수치심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사바나를 무리 지어 돌아다닐 때부터 역할을 해왔다. 진화 심리학에 따르면 수치심은 고통과 아주 유사하게 우리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고통은 불과 날카로운 칼날을 조심해서 쓰고 성난 말벌이 보이면 달아나라는 가르침으로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 수치심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수치심은 하나의 집단이 불어넣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에 집단의 규율과 금기가 새겨진다. 그 목표는 개인의 생존이 아닌 사회의 생존이다. 이런 점에서 수치심은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내포한다.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 습관, 도덕 등 관련 규범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다. 내가 기준에 못 미친다고 자각할 때, 또는 같은 반 친구나 동료, 슈퍼볼 광고가 기준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수치심이 우리를 덮친다. 어떤 때는 그저 기분이 나쁜 정도겠지만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아가 공허해진다. 인간 존엄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며, 내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수치심이 날리는 잔인한 펀치다.
수치심은 의지를 꺽고, 침묵시키며, 명료한 사고를 막아 편향성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수치심에 사로집히면 피해자는 체념하고 굴복한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는 늘 굶주려 있는 수치심 머신을 거쳐 끝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수치심 산업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약물 중독부터 빈곤 문제까지, 이들은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실패를 초래했다고 전제한다. 즉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 잘못은 그들이 했으니, 자책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겨도, 또 문제를 해결하고 정해진 구원의 길을 따라갈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강력한 수치심 머신이 새로 등장했다. 페이스북과 구글을 비롯한 여러 기술기업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최적의 값을 꾸준히 찾고 있다. 이는 트래픽과 광고효과를 높여 엄청난 이윤을 낳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기업 가치를 자랑하는 이들은 그 부산물로 서로 헐뜯고 조롱하는 해로운 흐름을 낳았다. 기업들의 알고리즘은 상대를 혐오하고 악마화할 수록 보상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유명인이 논란 발언이나 행동을 했을 때, SNS 팔로우를 끊고 배척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잃게 하는 행위)를 부추긴다. 이런 온라인에서의 삶은 현실 인식에 혼란을 주고 대중을 교란한다.
수치심의 감정 여정 : 상처 > 부정 > 수용 > 초월
수치심이 인간사에서 억압과 이윤, 통제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없애려면 사회는 빈곤층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
거대한 수치심 머신은 비만, 약물 중독, 가난, 허약함을 이용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힘과 시장 지분을 얻는다. 일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을 돈벌이로 삼거나 일회용품으로 취급하면서 보통 두 가지 전술을 결합해 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릇된 전제를 복음처럼 받아들여 이 현상에 가담한다. 패배자는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자기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하고, 그렇게 충분히 후회해야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본다. 수치심은 강력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적이다. 강력한 수치심 산업에 맞서야 할 때다. 이들은 현재의 역기능을 영속화하고 이로부터 이윤을 얻지만 해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비만율이 치솟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가 도시와 시골에서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엄청난 수이 흑인 청년들이 교도소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금박 시대Gilded Age(남북전쟁 이후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미국이 누린 대호황기) 이후로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 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존엄성 침해를 자각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런 끝없는 말싸움 덕분에 소셜 미디어 기업은 트래픽을 끌어올리고 광고 수입을 넉넉히 챙길 뿐 아니라 값진 정보를 얻는다. 내가 동의하는 게시물을 공유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낼 때,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 정보를 토대로 기업은 이용자를 더욱 정교하게 세분화할 수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고 수익성이 있는 맞춤형 광고가 가능해진다. 그 결과 지난 10년 사이에 페이스북과 구글 등 회사는 주가가 급등하면서 자산가치가 수조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라섰다. 디지털 거물 기업이 갈등에서 얻는 횡재는 그저 운 좋게 얻은 게 아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논쟁을 부채질하도록 자사 플랫폼을 설계한다. 또 이용자의 견해를 극단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그렇게 해야 논쟁이 과열되어 이용자가 쉽게 이탈하지 않는다.
디지털 거물 기업들이 여론을 작고 고립된 집단으로 쪼개는 일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존중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온라인이든 사교모임이든 새로운 동질 집단은 그 집단을 넘어 시야를 확장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다. 동질 집단은 나의 정보 채널을 장악하고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는 어리석게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과 공유한 가치가 보편적이라고 믿어버린다.
수치심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지런히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때마다 잠깐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옹졸한 권력감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에 중독된다. 우리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 듯한 소규모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과도한 감정에 몰입하지만, 그 감정을 기계적으로 자극하는 허술한 시스템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영속적으로 굴러가는 수치심 머신이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수치심 네트워크에서 벗어나게끔 다른 선택지와 다양한 경로를 탐색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며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가 그 공간에서 빠져나올 때 사랑과 용서로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 지도자들이 선포한 다양한 '전쟁'들을 떠올려보자. 빈곤과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비만과의 전쟁 등이 있었다. 단호한 지도력과 지성, 충분한 자금만 있으면 이러한 사회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팡파르를 요란하게 울리며 각각의 전쟁을 시작했다. 사람도 달에 보내는 세상이니, 이런 사회 문제는 당연히 해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비용도 꽤 든다는 게 분명해지자, 우리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해자를 위해 시작한 전쟁이 피해자들을 겨냥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원대한 야망은 증발했고, 그 자리를 각종 재활시설과 약을 파는 업체, 처벌을 앞세우는 관료주의, 교도소가 대신했다. 어중간한 정책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또는 이런 난제를 고민하는 일이 지겨울 때, 우리는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사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뚱뚱하고 마약에 중독되고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해결책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러니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
도와주는 것보다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담론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광범위한 생태계를 부추긴다. 피해자가 자책하고 그들의 노력이 실패할수록 사업가들은 부유해진다. 업체를 다시 찾는 고객은 황금알이다. 고객 각자가 겪는 처참한 실패는 수치심을 불어넣는 현실을 정당화한다. 이런 담론을 CEO든 정치인이든 쉽게 받아들이는데, 그 논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비용도 절감되고, 더 나아가 시장에 훌륭한 돈벌이 수단도 제공한다. 한마디로 수치심은 유망한 사업이다.
불평등은 승자에게 상을 주고 패자에게 벌을 주며 끊임없이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분노하지 말자. 무의식적으로 약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차고 넘친다.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교도소 개혁에 힘쓰거나 유권자 억압에 저항하고 싶다면 뛰어들라. 그러나 종종 우리는 분노로써 행동을 대신하는데, 분노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돈도 안 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모욕 행위를 부추길 뿐이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화를 내는 건 아닌지 돌이켜보자.
공감은 꼭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회의 병폐를 바로 잡지 못한다. 대신 나름의 정당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되도록 다른 사람의 말을 믿으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오해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보통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당사자만큼 속상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한 사람에게 내가 이를 망쳤을 때 받고 싶은 위로를 해주고,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주도록 하자.
용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수치심의 이면이다. 수치심이 상처를 찢어놓는다면, 용서는 상처를 봉합하는 힘이 있다. 넬슨 만델라는 "용서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용서가 두려움을 없앤다. 따라서 용서는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공감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힘든 일이며 일관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오늘날 수치심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가 모두 실수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동에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영원히 수치심의 늪에 갇혀야 하는가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 저녁 식사 자리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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