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바보가 권력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현재 진행형이다.
[본문발췌]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이다.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직한 바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직하지 않은 바보는 골칫거리다! 나는 토론회에서 거만한 바보를 무더기로 만났고 아주 낭패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 <파인만!>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었다. '난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거만한 바보'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권력이나 종교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얼룩졌다.
사람은 정말이지 서로 다르다. 같은 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다. 한겨울에 길고양이한테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길고양이를 붙잡아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면서 아이한테 저분들 덕에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준다. 돈이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부자도 아니면서 돈자랑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따진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만 관대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하자.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전향을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뿐이다. 나는 전향 그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때가 있다. 게다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지 의심한다. 그런 것을 들어 누구에겐가 감정적 호오好惡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 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 근육, 관절, 시력,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 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개인들이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 뭉치면 힘이 허용하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탄소는 왜 생명의 중심이 되었을까? 과학자들이 찾은 답을 정치학 언어로 번역하면,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성공했다. 중도는 좌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끔 치우치는 경우에도 슬쩍 편을 드는 정도에 그칠 뿐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도 몰입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녔지만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싸움을 먼저 걸지는 않아도 누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는다. 무능한 중도는 극단에 휘둘리지만 유능한 중도는 좌우를 통합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의 대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온화하고 태도가 유연하다. 남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필요할 때는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무엇이든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 나간다.
의학자는 암을 고치고 유전 결함을 바로잡으며 잘린 신경을 수리한다. 문제가 하나같이 복잡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의학은 극적으로 진보한다. 세계의 수많은 연구 집ㅈ단이 정보를 공유한다. 신경생물학자, 미생물학자, 분자유전학자들은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한다. 의학자는 분자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을 토대로 건강과 질병을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준까지 내려가서 연구한다. 유기체에서 분자까지 생물 조직의 모든 수준에 적용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사용한다. 의학은 통섭을 행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인종 갈등을 완화하는 방법, 개발도상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방법, 세계 무역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낙관적 전망이 부족하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념투쟁 때문에 중요한 발견도 빛이 바랜다.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는 서로 이해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과학을 통일하고 인도하는 지식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혼돈 상태를 창조적 효소라 착각하고 이론을 당파적인 사회운동과 개인적인 정치철학에 얽어맨다. 예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사회다윈주의처럼 극단적인 이론을 수용했고, 지금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극단적 사회주의까지 온갖 이념을 인정한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까지 나왔으니 이념의 시장은 한없이 넓어졌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족 충성심에 쉽게 속박당하고 이론의 창시자에게 구속된다. 사회과학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생물학과 심리학의 물리적 실재에 단 한번도 끼워 넣어 보지 않았고 심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을 무시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과대평가하고 인종주의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통괄적,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학문이 넓고 깊게 발전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딜레마와 마주쳤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전체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목표를 영원히 상실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불완전한 지식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여러 사실과 이론을 종합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말하려는 개념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정적인 대답을 요약하면,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은 생물학의 사건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할 수 있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인문학의 전통적인 언어로 바꾸어 보자.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하찮은 수학은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하다. '수학이 과학의 여왕이라면 가장 쓸모없는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연구의 무용성을 자랑삼는 수학자는 없다. 정수론으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한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 기하학, 미적분학과 대학의 공학, 물리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다. 일상의 일과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을 주는 수학,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쓰는 수학도 그렇다. 현대 기하학과 대수학, 정수론, 집합론, 함수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진정한 수학이다.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쓸모가 없다. 인류의 물질적 평안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유용성을 기준으로 보면 진정한 수학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찮은 수학이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것과 달리 진정한 수학은 인간의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 정수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전쟁 목적에 쓰인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수학자의 삶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 - G. 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화의 종말 - 데이비드 A. 싱클레어, 매슈 D. 러플랜트 (2) | 2023.09.30 |
---|---|
지중해 기행 - 니코스 카잔차키스 (0) | 2023.09.23 |
지배권력과 경제번영 - 멘슈어 올슨 (0) | 2023.09.09 |
셰임 머신: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 캐시 오닐 (2) | 2023.09.02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23.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