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nk - black - blanc,
소멸, 어둠, 빈 서판을 채우는 새로움.
[본문발췌]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면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 간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진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 - 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여러 해 뒤 그 생명 - 재생 - 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빈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흩날린다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 - 사라지고 있는 -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해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 권희철(문학평론가)
"흰색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인 것이다. ...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의 무요, 태어나기의 무인 것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 있는가. ....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돕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요." - 김연수, 한강 대담.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작과 비평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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