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의 극복을 넘어 탐욕에 들어서지 않기를.... 탐욕으로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그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 인생을 소비하게 된다.
[본문 발췌]
흑이냐 백이냐.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허용하는 이 양극단 사이에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그 어떤 절충안도 내놓기가 어렵다.
과학은 한때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이 궁핍과 열정과 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 정신적 고뇌와 번민을 해결해 주는 처방전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저버리고, 과학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야만주의에 봉사하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도덕적인 무기가 되어 버렸다. 각종 형태의 야만주의가 끔찍하면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더 과학적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쌓여 가는 시체 더미들 속에서 과학의 도덕적 파산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과학과 도덕이 사이좋게 병진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말 끔찍한 일은 과학이 발달하는 것에 반비레하여 도덕이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마침내 원시적 야수의 상태에 이르게 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적 진보가 현대 세계의 가장 위협적인 신화로 전락한 것이다.
인류는 지금 급격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런 급격한 전환기에는 항상 절충안이 제시된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적당히 미봉하고, 관련 법칙들을 대충 끼워 맞추어 효율성만 높이는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오려 한다.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개선, 평가, 유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제 현대인들은 급격한 반전, 전선의 변화, 가치의 새로운 위계질서, 미덕의 재평가 등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충동 두 가지를 들자면 <굶주림>과 <두려움>이다. 굶주림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대한 자신의 힘을 확장시켜 공략하고 정복하고 착복하여 먹이를 획득하도록 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이미 획득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감정으로서, 자신이 얻은 것을 최대한 안전하게 오래도록 지키도록 몰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론이고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자식과 손자들이 살게 될 후대 역시 고난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고난은 생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커다란 자극을 주면서, 선하고 악한 모든 충동을 자극하여 각종 장애물들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에 극복의 노력이 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계속 잠들어 있거나 꾸물대거나 제멋대로였을 힘들을 모두 동원하게되고, 이때 우리가 동원하는 그 힘들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나 더 나아가 인류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도약하기 위해 용수철처럼 몸을 긴장시킬 때 인류의 몸속으로 우주 전체의 생명 에너지가 흘러든다. 우리가 결실 없는 안락한 순간에 망각해 버리는 저 분명한 진실이 이럴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류는 비록 불멸의 존재는 못 되지만, 이런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영원불멸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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