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인공의 짜여진 모방보다는 다양성과 상상력으로 창작된 자유로운 표현에서 나온다.

 

 

[본문발췌]

 

1권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은 '미학aesthetica'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가령 인간의 '지식'은 인식론에서, '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 그런 학문도 하나쯤 있을 법하지 않은가.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새로운 학문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스테시스aesthesis'를 본떠 '에스테티카'란 이름을 붙였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형식 미학'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내는 '천재'다. '낭만주의 미학'

 

 

 

2권 마그리트와 하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문학에선 허구가 사실로, 즉 문학 텍스트 속의 상상적인 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 이렇게 예술의 본질은 생생한 '경험'을 매개하는 데 있다. 어떤 완성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에셔와 마그리트 모두 인간 사유의 패러독스를 작품에 담으려 했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계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됬었을 거다. 어쨌던 사유의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상한 패러독스에 빠져든다. 인간의 사유가 지닌 한계에 제일 먼저 부딪힌 사람은 아마 칸트일 거다. 그 뒤 철학자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어떻게? 헤겔은 주관과 객관을 넘어선 초월적인 관념에 의뢰했다. 하지만 고공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럼 메를로-퐁티처럼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면? 너무 애매하다고? 그럼 하이데거처럼 아예 사유의 틀을 바꾸어 주관과 객관의 고리를 뚫고 열리는 존재의 진리에 호소하든지...

 

 

 

3권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일 뿐.... - 솔로몬의 격언을,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용한 것을, 보르헤스가 인용한 것을, 다시 인용하다.

 

 

모네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수련이 형상은 화가의 붓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그가 그린 것은 꽃의 시각적 인상이다. 모네는 화면 위에 현실에 존재하는 꽃을 복제한 게 아니다. 우리의 눈에 복제된 꽃의 인상을 또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 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

 

 

우리는 자연이란 '자원의 보고'라 배웠다. 한마디로 인간이 맘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재료들의 창고라는 얘기다. 그런 문명의 폐해를 우리는 시커멓게 죽어가는 자연 속에서 보고 있다. 옛사람들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 한 조각, 벌레 한 마리도 대화의 상대로 여겼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까지도 그들은 영혼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거꾸로 영혼이 있는 생명까지도 사물화(事物化)하고 사물화(死物化)하여, 결국 사물화(私物化)하지 않는가. 이게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만든 자본주의 문명이다.

 

 

기술합리성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도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도르노는 어떤 전체주의적 위험을 본다. 가령 우리 앞에 연필과 공책이 있다고 하자. 둘은 사용가치가 다르다. 어느 게 더 귀중한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 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사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킨다.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들을 찍어내는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때문에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를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확대 재생산시켜줄 클론을 원할 뿐이다. 예컨대 우리의 대학을 보라.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시장원리가 대학에 도입되자. 학과들의 다양성이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획일적인 틀 속에서 관리된 인간들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이다.

 

 

개별을 배제하는 보편의 감옥에 사는 것과, 그 밖에서 개별자로 자유롭게 사는 것.

 

 

벤야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탁월한 방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더스는 몽타주라는 편집기술에서 외려 탁월한 조작의 수단을 본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내가 아는 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귄터 안더스다.) '팬텀'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라면, '매트릭스'는 그 재료로 세계를 짜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구성한 것이라는 얘기다. 편집의 몽타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문을 짜는 원리는 세계를 짜는 원리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술이 아직 재현이었을 때, 현실은 원상이고, 그림은 모상이었다. 모상의 진리는 원상과의 일치에 있다. 복제는 원본과 일치할 때에만 참된 존재다. 원본과 다른 사본은 사기다. 실재는 실재, 허구는 허구. 이때만 해도 모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예술 과제는 있는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비로소 있게 하는 현시(presentation)가 되었다. 작품의 진리는 있는 현실의 정직한 증언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의 힘에 있다. 한 세기 동안 우리는 그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하지만 없는 현실의 창조란 있는 현실의 조작일 수도 있다. 예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힘이라면, 우리의 현실은 허구다. 그럼 그것은 대체 누구의 허구인가? 게다가 오늘날 세계 체험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미디어도 예술을 닮아서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리는 대체 누구의 작품 속에 사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미학은 존재의 윤리로 견제되어야 한다. 가상과 실재, 허구와 현실은 어쨌든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예술이 종언을 고할 때 사라지는 것은 외려 현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했던 현실은 사라지고 있다. 앨리스 앞의 체셔 고양이처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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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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