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사로잡힌 삶을 살것인가? 자비와 용서를 통해 원망과 분노에서 자유로와질 것인가?
분노(憤怒), [명사]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비슷한말] 분에(憤恚), 의분, 울화, 노기, 진노, 울분, 격노, 격분, 노여움, 노발대발
[반대말] 희열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anger, rage, fury, resentment, indignation, (formal) wrath, [동사] get angry, be outraged[infuriated, exasperated, indignant]
분노를 느끼다, feel anger[resentment]
[글과 책 속에 쓰인 '분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코에케 류노스케, <침묵입문>
불교의 삼독 : 탐욕(貪欲, 욕망), 진에(瞋恚, 분노), 우치(愚癡, 어리석음)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들이 난무할 때, 그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권력의 결정적인 토대가 되는 것은 감정 통제 능력이다. 상황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권력의 가장 큰 장애인 동시에, 감정 표출로 얻는 순간적인 만족보다 훨씬 더 대가를 치르게 하는 크나큰 실수다. 감정은 이성을 흐리게 한다. 상황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면 통제력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게 된다. 분노는 감정적 대응 가운데서도 가장 파괴적이다.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또한 잔물결 효과를 일으켜 상황을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적으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만든다. 만일 당신에게 해를 입힌 적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분노를 표하는 것보다는 친교를 가장함으로써 상대의 경계를 풀어놓는 것이 훨씬 낫다.
분노와 감정 노출은 전략적으로 비생산적이다. 당신은 항상 침착함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적을 만나게 하면서 당신 자신은 침착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결정적 이점을 확보하게 된다. 적의 평정을 흐트러뜨려라. 적의 자만 속에서 맹점을 찾아 휘저어놓아라. 그러면 당신이 적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군주는 화 때문에 군대를 출정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지도자는 분노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 손자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화를 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고통 역시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이다.
분노는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외톨이가 되기 원한다면 자주 화를 내라.
마음속 그 분노에 찬 코끼리를 강제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 자비의 마음을 사용하라.
당신이 미친 마음과 싸우는 대신, 그 마음을 평화롭게 대하라. 그 자비의 힘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마음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온순하게 그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당신은 부드럽게 그 마음을 토닥이며 말한다. "그래, 내 마음이여. 그래, 내가 다 안다."
김선현, <그림의 힘>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자기를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무한 욕망이 탐욕이다. 그 탐이 충족되지 않아 너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는 것이 '진, 분노'이며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치, 어리석음'다. 그러므로 욕망을 다스려라, 줄여라, 끊어라, 그리고 평화로워라, 친구여.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뇌의 눈확겉질은 여러 신호들을 받음으로써 - 내장의 감각, 욕망의 대상, 감정적 충동, 겉질의 다른 부분에서 온 감각과 기억도 입력 받는다. - 감정의 조절자로 기능한다. 분노, 온기, 공포, 혐오, 같은 본능적 감정들을 받아서 그 사람이 지닌 목표와 통합한 뒤, 적절한 계산으로 신호를 조절하여 원래의 감정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냉정한 숙고와 실행을 제어하는 겉질 영역으로도 신호를 올려 보낸다. 신경 해부학이 제시한 이 흐름도는 심리학자들이 환자와 실험실에서 관찰한 내용과 제법 잘 맞는다. 19세기 의학 기록의 미사여구와 21세기의 임상 용어에 차이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눈확겉질이 손상된 환자에 대한 요즘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피니어스 게이지에게 적용해도 좋을 듯하다. "자제력이 없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하게 행동하고, 타인의 기분을 쉽게 오해하고, 충동적이고, 자기 행동의 결과에 무관심하고, 일상생활에서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통찰하지 못하고, 추진력이 약하다."
폭력의 세 번째 뿌리는 복수심이다. 피해를 똑같이 되갚으려는 동기이다. 그 직접적인 엔진은 분노 체계이지만, 탐색 체계에서도 이유를 끌어올 수 있다.
사법 체계는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피해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강제로 투옥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폭력적이다. 요즘 많은 공동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때로는 형사 재판을 보완하고, 때로는 아예 대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조정자 앞에 나란히 앉는데, 가족과 친구가 동행할 때도 있다. 조정자는 피해자에게 괴로움과 분노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가해자에게는 진심 어린 회한과 피해 보상을 전달할 기회를 준다. 흡사 대낮에 방송되는 진부한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리지만, 이런 자리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는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피해자를 만족시킴으로써, 너무나 느릿느릿한 사법 체계로 분쟁을 가져가지 않아도되도록 해준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칼루 린포체
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 마음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그것에 의해 왜곡된 인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움, 분노, 질시, 화, 슬픔, 괴로움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눈에 보여 쉽게 뽑을 수 있지만 영혼에 박힌 큰 가시는 보이지 않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일이 잘못되어 날카로운 송곳이 몸에 박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박힌 가시를 굳이 뽑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화, 분노, 미움, 걱정 따위는 쌓아두지 마십시오. 쌓아둘수록 자신의 상처가 그만큼 깊어질 뿐입니다. 원망, 핑계, 가슴앓이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가슴에 맺히면 결국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구도의 열정과 혁명적 분노가 함께 할 갈 수 있는 길!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흐름에 참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혁명이 아닐까. 거꾸로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비슷하지만 가짜'다.
오행과 오장육부의 관계 : 木(간, 담)은 분노, 火(심/소장)은 기쁨, 土(비위)는 생각, 金(폐/대장)은 슬픔, 水(신장/방광)은 두려움의 정서를 담당한다. 해당 장기에 문제가 있으면 감정의 균형이 깨어지게 마련이다.
감정의 흐름이 깨져도 장부에 병이 생기고, 거꾸로 장부에 문제가 있어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깨지게 된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조정래, <천년의 질문>
인생이란 결과적으로 무상이오. 허나 인생살이 그 과정은 길어요. 낙심하지도 말고, 너무 괴로워하지도마시오. 인생사의 얻고 잃음이란 모래 한 주먹 쥔 손을 오무렸다 펴는 것과 같은 것이오. 손을 오무려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손을 펴도 모래는 흘러내리는 거요. 다만 시간 차이가 좀 있을 뿐이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두고 맨손으로 떠나게 되어 있소. 그러니 집착을 버리시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오. 새 마음으로 다가올 날만 생각하시오. 그것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가 뜨고 지듯이, 달이 차고 기울듯이, 그런 걸음으로 다가올 날을 맞이하시오.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가는 지금부터가 자신을 위한 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오. 과거에 집착해 분노와 증오를 못 버리는 것, 그것처럼 큰 어리석음은 없소.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들의 연합체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제도의 문젝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 - 이러한 심성을 내면화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하시라도 권위주의와 독재의 야만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것이 광장의 촛불이 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타올라야 하는 이유다.
이기주, <글의 품격>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노에 굶주린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가 있다. 정치인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상대 진영을 향해 증오의 언어를 쏟아내고, 언론은 종종 자극적인 기사로 이념과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긴다. 인터넷 '댓글 문화' 역시 밝은 빛만큼이나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주역>에 이르기를 "서부진언書不盡言"이라 했다. "글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적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은 종종 무력하다. 문장이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가 지닌 한계와 무게를 알고 글을 적어야 한다. 오늘날 분노를 머금고 우리 손끝에서 태어나 인터넷 공간을 정처 없이 표류하는 문장들이 악취를 풍기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 망설임 없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글을 토해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사에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글을 휘갈기다 보니 문장에 묻어 있는 더러움과 사나움을 미처 털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에픽테토스는 메데이아를 대하는 우리의 적합한 태도로 분노나 노여움이 아닌 동정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메데이아는 어떤 의미로 보나 "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절름발이처럼(에픽테토스가 자신의 몸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똑같이 사용한 단어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메데이아는 지혜를 결여하고 아마티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일종의 지식 거부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불랍리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 바람에 외부인들이 마땅히 끔찍한 행위로 인식하게 될 일들을 벌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스토아의 태도나 이에 상응하는 불교나 기독교의 똑같은 태도를 내면화하만다면,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분개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욕을 하거나, 비난하거나, 증오하거나, 우리에게 불쾌감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 소견으로는 그렇게 해서 귀결된 세계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굴욕, 분노, 위협의 수준을 높여 개인의 발전을 앞당긴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꺾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신랄한 모욕을 감당한 결과로 더 이성적이되거나 자신의 성격을 더 깊이 통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성격의 고질적인 측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따뜻하게 접근한다기보다 우리의 천성을 야멸치고 분별없이 공격하는 것만 같은 제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방어적이되고 과민해질 수밖에 없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수리와 언어라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뇌 기능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심하게 결여된 환자를 수없이 관찰하고, 적시에 적정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는 이성과 정동(분노, 두려움, 기쁨, 슬픔 등 비교적 급속히 일어나는 일시적이고 급격한 감정의 움직임을 가리는 심리학 용어),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E. F. 슈마허 외 지음, 골디언 밴던브뤼크 엮음, <자발적 가난>
이제 자신의 손발에 의존하는 법을 배우고, 복장과 삶의 양식을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조상들이 허락했던 관습에 따라 지키기로 하자. 욕망을 조절하는 법과 사치를 절제하는 법, 야망을 낮추고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가난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가난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검소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재산보다는 내면에서 부를 추구할 것을 다짐하기로 하자. 전차 경주나 대회뿐만 아니라 삶의 투기장에서도 우리는 원의 내부에 머물러야 한다. - 세네카
Seven Deadly Sins : 오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음탕함, 게으름... Four Cardinal Virtues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정치뉴스는 우리 앞에 내던져진 그 모든 불화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복잡한 역할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개혁을 지적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 개혁에는 어떤 완고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노하지 않고 수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경제뉴스는 현재의 경제적 발전상을 조명할 뿐 아니라 시장 자본주의가 보다 합리적이고 만족스러운 형태로 변화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적이면서도 적용 가능한 많은 이론들을 탐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냉소와 미성숙한 분노 양쪽 모두를 잠재우게 될 것이다.
김형경, <좋은 이별>
1969년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제안한 애도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의 애도 과정에는 슬픔이나 통곡하기가 들어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애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이론이지만 그보다 앞선 1962년, 그랜저 E. 웨스트라는 심리학자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사로잡히게 되는 감정의 10단계에 대해 먼저 발표했다. 그의 10단계는 충격, 감정의 표현, 절망과 외로움, 육체적 불쾌감, 공포, 죄책감, 분노와 적개심, 저항, 희망, 현실 긍정이다.
열정을 쏟았던 대상은 사라졌지만 열정은 여전히 떠난 사람을 향하고 있다. 돌던 팽이가 단숨에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리비도 투자도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마음속에 여전히 잃은 대상을 간직한 채 그의 집 앞을 서성이거나, 그가 언제 돌아올 거라 믿거나, 뒤늦게 혼자 분노한다. 리비도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이다.
사랑의 대상을 잃은 박탈감과, 사랑의 대상은 존재하는데 그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거나 학대당하는 결핍감 중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박탈은 대상을 포기할 수 있지만 영원한 절망이 따르고, 결핍은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인해 거듭 분노가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쪽도 나쁘기는 마찬가지만.
고통은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다. 아까운 삶을 분노하고 복수하는 데 허비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기회, 창의성을 발휘할 역량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분노도, 고통도 내가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용서를 정하면 잘 받아 준다. 건성으로 약삭빠르게 사과하는 태도만 취한다고 느껴질 때라도 용서를 받아 준다. 더러운 오물도 흙으로 덮어 주면 좋은 거름으로 바뀔 수 있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꽤 공격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밖으로 쏟아낸다는 겁니다. 타인의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하죠. 왜냐고요? 그래야 덜 불안하거든요. 사람의 공격성이라는 게 노여움이나 분노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장막을 찢고 나온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버리기 연습>
불교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키워야 할 4가지 감정으로, '자비희사(慈悲喜捨)'를 강조한다. 자(慈)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비(悲)는 가엽게 여겨서 괴로움과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이며, 희(喜)는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사(捨)는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차분하게 그 목소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상대가 나쁜 말을 입에 담을 때에도 현실의 정보를 명석하게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번뇌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고통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오히려 이쪽에서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차분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면, 생각이 머릿속으로 숨어들어 분노를 증폭시키는 일 없이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인정받고 싶다,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라는 만의 번뇌와 '내 이야기를 듣지 않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는 분노의 번뇌 등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병이 아주 깊은 사람은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이때 가장 강한 자극으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걱정, 불안, 분노와 같은 번뇌이다. 이번 번뇌에서 비롯된 생각의 잡음이 마음 속에서 들끓기 시작하면, 뇌는 흥분 상태가 되어 잠들기 어려워진다.
화를 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기 마음의 분노를 이겨내라. 긍정의 마음으로 부정의 마음을 이겨내라. 기분 좋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함으로써 인색해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거짓을 말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 - <법구경> 223
한 번 분노의 불꽃이 마음에 점화되면, 마음의 습성은 분노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면서 보다 강력한 분노를 만들어낼는 충동이 강해진다. 때문에 나쁜 결과로 스스로를 몰아가게 된다.
로널드 T. 포터, <욱하는 성질 죽이기>
분노 유형 : 돌발성 분노, 잠재적 분노, 생존성 분노, 체념성 분노,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
분노의 보편적 원인 : 뇌의 결함, 심리적 트라우마, 알콜/약물 남용, 부모의 잘못된 본보기, 욱하고 화를 폭발시켰을 때 발생하는 대가와 쾌감, 극심한 부끄러움이나 버림받았던 기억 등
분노 때문에 고민이라면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전체 인구의 약 20퍼센트 가량이 끓어오르는 화, 즉 욱하는 성질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통 부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어떠한 경우이든 욱하는 성질은 위험한 것이며 치명적일 수도 있다.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 막을 수 있다. 분노는 예방이 최선이며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열쇠이다. 대부분의 경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갖거나, 다른 분노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화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뇌가 이성을 잃고 통제불능 상태가 되지 않도록 약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다.
각 분노는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치료법을 요한다. 이 과정을 혼자 해나갈 자신이 없다면 가족, 친구, 전문 카운슬러, 의사 등 주위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욱하는 성질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습관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로 변합니다. 또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 그것은 화로 변합니다. 그 화를 처리하지 않으면 심한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데 더 익숙합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더 쉽지만,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의 문제르르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종종 표면의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화에 대해서는 좋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비록 타당한 것일지라도 지나치게 화를 내면 곧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래된 상처와 분노에 매달립니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노를 되새김질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용서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 기회는 용서만이 부릴 수 있는 마술입니다. 타인과 자신을 용서할 때,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되찾게 됩니다 부러진 뼈를 치료하면 부러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와 삶도 용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루치르 샤르마, <애프터 크라이시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은 강력한 성장 기간이 끝나는 단계에서 생기는 금융 위기의 영향을 부풀릴 수 있다. 호황기가 정점에 도달하면 상류층으로 부의 쏠림 현상이 생기면서 부자들은 늘어난 재산 중 일부를 사회적 분노를 유발하는 과시적 소비 형태로 금융 투기에 탕진한다. 그런 뒤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국가 부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한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당신은 자기 감정의 근원지를 알고 잇는가? 슬픔, 기쁨, 환희, 분노, 좌절의 감정들을 유발하는 ‘감정의 근원’ 말이다. 이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자신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자기 자신과 시간을 가지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슬퍼지고, 무엇 때문에 기뻐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에는 수많은 전환점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어느 한 집단이나 세계의 어느 한 지역이 차지하고 있던 지도적 역할과 주도권은 다른 집단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근대 국가가 발흥하고 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이동한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시기 등은 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뚜렷한 사례들이었다.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격렬한 동요와 권력투쟁의 시간이 존재한다. 예전의 권위는 약화되고 예전의 지표는 사라진다. 야망과 분노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구성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 또는 그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를 구성하려는 우리의 선의가 퇴보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들이 크게 증대해왔다고 감히 말하겠다. 우리의 능력이 감소되었거나 우리의 도덕적 자질이 쇠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즉 대륙, 민족, 계급 간의 세력균형의 변화가 낳은 충돌과 격변의 이 시대는 그러한 능력과 자질을 점점 더 크게 위축시켜왔고, 그것들이 발휘해야 할 적극적인 성취효과를 제한하고 차단해왔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장(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글쓰기는 지성과 영혼을 건드리는 작업이지만 정치는 국가권력을 다루는 작업이다. 국가권력의 본질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이다.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거나 마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폭력을 선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권력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정치는 글쓰기와 달리 거의 언제나 살벌한 대결과 가시 돋힌 공격, 분노, 경쟁심, 질투, 굴욕과 같은 감정의 격동을 동반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자유를 추구하고, 사물을 보는 시점을 보다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은 많은 이점을 낳는다. 우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확대시키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분노나 혐오의 감정도 자연히 필요치 않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 선악을 넘어서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수행의 목적은 현상계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질의 차원, 즉 진여의 세계로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관습적인 명칭들 - 부모, 아이, 나, 너, 꽃, 구름, 오다, 가다 - 에 의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관습적인 명칭들을 초월하는 중도의 차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관습적인 명칭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그러면서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부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 안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그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 진여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며,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습관의 힘에 계속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는 차마 살펴볼 수 없는 약한 부분을 짚어낸다. 또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걱정이 은밀하고 강렬할수록 웃음의 가능성도 커지며, 이때 웃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꼬챙이에 꿰어내는 솜씨에 바치는 찬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들의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집 안 대청소를 해서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먼지를 떨어내듯 머릿속도 켜켜이 쌓인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우리 몸에 가끔 디톡스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영혼에서 독소를 빼내야 한다. 걱정, 불안, 경쟁심, 분노, 조바심 등을 내보내고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바로 휴가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물질은 생각이 눈에 보이게 된 상태일 뿐이다. 사람의 모든 성공도 결국 생각에서 시작돼 현상이 되고 물질화된 결과다. 생각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파괴적이거나 건설적이 된다. 공포, 불안과 의심, 걱정과 절망, 슬픔, 분노 같은 생각에서 파괴적인 결과가 나온다. 반대로 세상의 법과 조화를 이루면, 지극히 사랑스럽고 행복한 일, 협조와 평안, 위로, 안심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파괴적인 생각은 소멸되며 사라지지만 건설적인 생각은 확장하며 보존된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인생의 대부분은 사소한 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사소한 일도 좀처럼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컨대 기차를 놓쳐도 화를 내며, 음식을 잘못지어도 골을 내고,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다고 해서 성을 내며, 옷을 세탁소에서 빨리 가져오지 않는다고 모든 산업계를 탓한다. 이와 같은 사소한 일로 하여 낭비하는 정력을 올바로 행사한다면, 큰 나라를 세울 수도 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고뇌와 분노와 초조감은 해로울지언정 조금도 이롭지 못한 감정이다. ... 나는 앞에서 말한 철저한 체념이 없이 능히 이러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러한 고뇌의 바다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는, 인생이 전보다 매우 즐겁게 생각될 것이다. 전에는 괜히 화가 잘 치밀던 사람들의 특이한 개성도 이제는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오싱 젠, <창작에 대하여>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 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분노가 시인을 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분노가 예술가를 낳을 수는 없다. 분노의 격정을 언어로 표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분노는 조형예술가가 다루기에 만만한 감정이 아니다. 피카소가 그린 20세기 회화의 걸작 <게르니카>에는 정치적 경향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담긴, 미의 파괴에 대한 거대한 슬픔은 고대 그리스의 소조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전율시킨다.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항거가 '이에는 이' 식어서는 곤란하다. 분노를 예술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감정적 충동을 뛰어넘어, 진심과 전력을 작품에 쏟아부어야 한다. 예술은 항거의 도구가 아니다. 예술을 항거의 도구로 삼느니 직접 거리로 뛰어나가 시위를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예술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고 싶은 것은 정치의 욕망이다. 예술의 본질은 심미에 있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느린 속도로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거나, 느린 속도의 삶은 여유롭고 빠른 속도의 삶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속도로 인해 과도한 긴장감과 적대감 그리고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오히려 시간 압박이 없으면 삶의 활력이 사라져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결국 적절한 시간 압박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나와 시간의 관계'와 '일과 휴식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바라보고, 필요에 따라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진정한 휴식의 시간은 삶에 연쇄적인 변화를 가져옴을 느겼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이 시간과 관계가 만나 삶을 이룬다. 삶을 이루는 두 개의 중요한 원자 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삶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시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쫓아다니거나 쫓겨 다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가팅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안나푸르나에서처럼 지금 이 사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때처럼 시간을 음미하며 다양한 속도를 즐기고 싶다.
동물원의 동물들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물원의 비생태적 환경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비생태성에 대해서는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그 해로움이 얼마나 큰지 자각하지 못해서다. 각종 난치병 치료법이 속속 개발되고, 평균 수명은 놀랄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왜 우리 사회의 정신 건강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을까? 자살률은 떨어질 줄 모르고, 매일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분노와 불안이 일상적 감정이 되고, 사람들은 갖가지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도시 자체는 거대한 동물원이다. 그것도 아주 열악한 동물원이다. 창살과 사육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도망가지 않기에 창살이 필요 없을 뿐이며, 사육사가 없어도 될 만큼 모든 것이 시스템화돼 있을 뿐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처럼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유의 본능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도시 동물원'에서 잘 적응하도록 집요한 교육을 받는다. 밖에서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내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뛰지 마!' '떠들지 마!' 등 하루 종일 '~하지 마!'의 강요 속에 살아간다.
'만일 우리가 부름에 대해 떠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을 요구되는 모험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성자들도 우리와 같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도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았고,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비난과 모함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괴로워했고 더없이 슬픈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은 요즘 우리들과 비교해 한 치도 다름이 없다. 성자들은 이기적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웠다. 분노와 절망보다는 자에와 희망의 등불을 밝혔다. 나와 너, 민족과 계급, 피부와 남녀의 금 긋기를 부정하고 평등과 상생의 세계를 꿈꾸고 가꾸었다. 우리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삶이다.
수행은 곧 내 삶의 참된 변화와 완전한 내적 혁명이다. 수행은 언젠가의 지향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거짓에서 진실로, 탐욕에서 비움으로, 분노에서 자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사견에서 정견으로,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개선되고 탈바꿈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삶을 이루어 내는 모든 실천, 곧 생각과 움직임이 수행이다. ... 세상을 벗어난 한적한 깊은 산중에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고 그저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는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이 될수는 없다. '탐욕과 성냄과 자만과 위선이 떨어져 나간 사람,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써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 없고 기대도 없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아무런 집착도 없고 의혹이 없어 집착과 근심을 초월해 더러움이 없이 맑은 사람, 자비로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라고 <법구경>은 말하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분노와 미움, 짜증과 적대감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느낀다면 상대방의 내면에 대해 생각하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정당함은 생각하지 말라. 고요한 내면의 생각을 통해 상대방의 선함을 찾아보라.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가능한 한 공통점을 많이 발견하라. 누군가에게 화내는 일을 그치고 평화와 용서, 사랑을 되찾으려면 자신과 그 사람의 공통된 죄를 기억하라.
인생은 죄, 유혹,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한 투쟁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다섯 가지 큰 죄악이 있다. 과식, 나태, 정욕, 분노 혹은 증오, 그리고 마지막이 오만이다. 우리의 육체가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안의 성스러운 영혼도 합쳐져 있을 것이다. 육체가 없다면 삶도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삶은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 분노를 이겨내고 자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하며 친절히 대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다.
분노는 화내는 사람에게 가장 해롭다. 분노하게 된 일보다는 분노 자체가 더욱 해롭기 때문이다. 누군가로 인해 화가 날 대 우리는 상대의 나쁜 점을 통해 화난 감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반대로 상대의 좋은 점을 찾아보라. 그러면 기쁨과 만족이 커질 것이다. 때로는 상대에 대한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나 행동에서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너 자신도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깊은 강의 물은 돌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이 무례한 말에 상심하는 사람은 깊은 강이 아닌 진흙탕 웅덩이인 셈이다.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분노나 짜증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자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분노는 한때의 광기이다. 그러므로 이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다인은 분노에 사로잡힐 것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살마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ㅜ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개발,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강요된 서구의 표준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외 현상은 적개심과 분노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 사태와 근본주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퍼 리, <파수꾼>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도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적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게 더 현명한 거야...."
강신주의 <감정수업>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분노로 행한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 징키스칸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분노가 나를 지치게 할 때 (에밀리 디킨스)
먹잇감이 죽으면 분노, 그것을 살찌우는 것은 허기
Anger as soon as fed is dead, it's starving makes it fat.
분노 다스리기 (헬렌 알프레드손)
나는 분노를 저장해두곤 했는데, 이것이 내 경기에 방해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것을 쏟아낸다. 이제는 함께 경기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경기에만 온통 집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게임이 끝난다.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두려움은 신뢰의 부족이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항상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타인의 분노라든가 폭력에 의해 자신이 피해자기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더 나은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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