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과 관련된 OECD의 통계나 <이코노미스트>의 유리천장지수 등을 보면 대한민국은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 육아휴직제도의 보장 등 법과 제도가 일부 바뀌더라도 사회 가운데 스민 편견과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본문 발췌]

 

오래전 읽었던 어떤 시가 떠올랐다. 가난다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데....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 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 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 ....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작품 해설], 『우리 모두의 김지영 - 김고연주(여성학자)

    •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기에 여성에 대한 대표성을 지니는 캐릭터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에는 '나답게' 사는 것, 그래서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개인의 과제가 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통해 내가 구성되는데, '나'를 구성할 만한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정체성에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경험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정체성들 중에서도 자기 정체성의 핵심은 '성'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주목하면 한국인의 절반은 상당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성에 기반한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모든 공적 영역에 작동하는 강려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아이를 위한 것들만 허락된다. 아이를 위해 시간, 감정, 에너지, 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엄마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면 엄마의 자격을 의심 받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 출산 후 독박육아 몇 개월 만에 겨우 집을 나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타인에 대한 돌봄이 사라진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타인을 돌보고 있는 존재인 엄마가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카페나 다니면서 자기 아이만 위하는 '이기적인 벌레'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여성혐오 시대에 '모성애라를 종교'조차 침탈되는 양상이다. 모성에 대한 신성시도, 맘충이라는 혐오도 여성을 옭아맬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

    • 김지영은 회복될 수 있을까? 마지막 장은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 김지영의 생애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김지영을 만나면서, 또 자신보다 뛰어났던 아내가 결국 전업주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특별한 경험과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다며 자부심마저 내비친다. 실제로 그는 수학영재였던 아내가 언젠가는 잘하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각과 성찰은 딱 여기에서 멈춘다. 임신한 동료 상담사가 유산 위기를 여러 번 겪다가 결국 사표를 내자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라며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내 아내, 내 딸과 다른 여성들은 이렇게 분리된다. 그리고 내 아내와 내 딸은 내가 아닌 다른 남성들에게 '김치녀' 또는 '맘충'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내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다하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21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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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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