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 경험에 대한 조언, 예측에 집착한다.
이런 준비에 너무 치중하면 새로운 것과의 만남, 신선한 경험을 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길을 잃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고 했다. 길을 잃음으로 고통과 불편을 겪을 수 있으나 새로운 변화와 만남이 시작하기도 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고요 속에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 놓으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며 여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본문발췌]
정보가 부족해서 타락할 일은 없다. 이해가 모자라서 타락할 뿐이다. ... 결핍된 것은 믿음이 아닌 경이에의 의지다. ... 신비의 존재에 대한 응답의 하나는 외경이다. - 아브라함 헤셀
우리 너머의 아름다움에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서고, 삶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 속에서 우리의 길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들음을 통해 우리보다 큰 존재들과의 관계와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보다 큰 존재와의 우정은 근원적 지혜를 열어준다. 이것이 존재의 작업work of being이다. 경험과 존재 사이의 우정은 삶에 필요한 지혜를 열어준다. 이것은 인간됨을 위한 작업work of being human이다. 타인들과의 우정은 보살핌의 지혜를 열어준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작업work of love이다.
나를 포함한 생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이 생명들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그물망 속에서 우리와 생명들과의 우정을 다지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이 충만해지는 길이다.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우정을 향한 첫걸음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들어보기를. 깊은 들음에 전념해보기를 바란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마다 세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일이 가능할까? 숨을 내쉬는 순간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호흡을 통해 자신을 채우고 비우면서 두 호흡이 주는 선물을 찾고 있는가? 이것이 아마도 존재의 작업일 것이다.
요즘 집 근처 카페에 가면, 나를 아는 젊은 점원들이 주차장에서 내 모습을 보자마자 내가 마실 핫초콜릿을 만든다. 사람들의 마실 것을 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친절한 형태의 들음이다. 들음을 위해 우리를 둘러싼 존재들의 필요를 존중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일상 속의 위엄이다.
그냥 걸음을 멈추고 하루 일과를 계속해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새의 노래를 따라 한두 블록 거리를 헤매도 다른 무언가를 얻는다. 새를 따라갈 때 또 다른 삶을 발견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실제로 그것을 얻는다. 이처럼 여정의 모든 지점이 그 자체로 목적지다. 어느 하나의 지점이 다른 지점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무엇을 따르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는 오로지 가슴만이 알고 있다.
직관을 통한 들음이나 믿음의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다. 하지만 "아니요"라고 하기보다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차분한 용기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 용기를 얻으려면, 미래가 우리에게 닿을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와 정체성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시각들이 우리에게 닿아 우리를 넓고 깊게 재정비해줄 수 있도록 꽉 움켜쥐고 있던 세계관을 느슨하게 풀어주어야 한다. 삶을 받아들이는 가장 용감한 방법은 "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력에 영향받는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해도 중력은 그대로이다. 모든 상황 저변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면 중력처럼 변하는 않는 의미를 경험한다.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고 마음을 여는 것도 깊은 들음의 방법이다. 살아내려면 반드시 이렇게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으로만 존재를 제한하면 우리 모두를 연결 짓는 신비로운 방식을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세계를 축소시킨 탓에 대대로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개개의 부족과 국가들은 저마다 다른 부족과 국가를 제압했다. 그들만의 제한적인 시각을 지키려했기 때문이다. 들음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평화는 들음에서 시작된다.
들을 줄 아는 폭넓은 삶에 겸허히 다가가려면 함께할 때 더욱 많이 들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눈을 뜨고 개개인이 아는 것과 궁금해하는 것들에 열성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생명과 서로에 대한 이런 관심은 존중의 토대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아직 모르는 것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 똑똑함이나 어리석음과는 관계가 없음을 깨달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사슴이 숲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판단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 물러나게 한다. 삶의 한가운데서 부어오른 손을 펴고 고요히 앉아 있을 때 더욱 깊이 듣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따. 삶의 수많은 가능성들은 우리가 이렇게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멈춰야 침묵의 중심점에서 그 가능성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중심점에 이르면, 태어나면서부터 받아온 지루한 가르침들에 억눌리지 않고 삶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받음과 취함 -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과 가져오는 것 - 의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 누군가 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확실히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취하는 데 익숙해져 쌓아두기만 하면, 들음을 멈추게 된다. 둘 사이의 불균형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오염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받음과 취함을 모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저 취하고 습득하기만 하지 말고 받음의 역량을 키워서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력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장고'보다는 '도관導管'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런 열림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받음의 축복이다. "그대는 하늘을 향해 대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가?"라는 노자의 물음은 자신이 만들어낸 거처로 세계를 규정하지 말고 별빛을 받아들이라는 권유다. 머리와 가슴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생명의 흐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햇살과 비, 공기만큼이나 필수적인 일이다.
어느 하나의 시각만으로 전체 세계를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펼쳐지는 실재를 향해 조금씩 이해를 쌓아갈 뿐이다.
길을 잃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길을 잃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 칼 융의 말처럼 에고가 내 집의 주인이 아님을 자각하는 순간 - 여행은 시작된다." - 헬렌 루크
지도를 잃어버리는 순간 비로소 길을 알게 된다. 대지의 재현물이 아닌 대지 자체를 직접 밟으면서 스스로 겸허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겸허해지면 열심히 세운 하찮은 계획을 잃어버려도, 관심의 진정한 힘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해안을 따라가며 그리워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대신 사랑 자체의 붉은 물결 속에서 헤엄치게 된다.
답이라고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여행은 진실로 시작된다. 상실을 겪어내고 자신의 통제력을 잃어본 사람은 누구나 모든 해답 뒤에 더욱 커다란 질문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든 도달 너머에 예상치 못한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적인 차원에서 볼 때, 길을 잃는 것은 필요한 혼란일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모든 미지의 것들이 만들어내는 활기찬 세계 속으로 밀려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길을 잃는 것은 더욱 깊은 길로 나아가는 서막과 같다.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름을 인정하고 나면 변화의 기회가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로소 구체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자신의 맥락이 의미를 잃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자신이 야심차게 짜놓은 구역 안에 스스로 갇혀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지도를 버리고 발에 와닿는 땅의 감촉과 두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시 직접 체험해는 것이 좋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체험하다 보면, 정해진 양식을 부수고 경이감을 다시 삶의 인도자로 삼을 수 있다.
어떻게 계획을 세워도, 우리 앞에 의무처럼 던져진 목적을 향해 터널을 뚫고 나아가다 보면 삶의 많은 것들이 주는 감동을 놓치게 된다.
현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스펀지 같은 사람, 깔데기 같은 사람, 여과기 같은 사람, 체 같은 사람이다. '스펀지' 유형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 '깔때기'는 한쪽으로 받아들여 다른쪽으로 내보낸다. '여과기' 유형은 와인을 내보내고 찌꺼기만 간직한다. '체' 유형은 거친 겨를 제거하고 고운 가루만 모은다. - <피르케이 아보트> 5장 18절에서
할 말만 하는 간결함이 바로 고대인들이 철학을 하는 태도 -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중 소크라테스의 말
지나치게 강력한 중력이 억압적이고 치명적인 결고를 불러오듯 중력의 소멸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체시킬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무게를 이겨내는 방법은 세상 속에 머무는 것뿐이다. 빛과 어둠의 유대 속에서도 또 다른 역설이 작용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너무 절실하게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어둠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그림자가 없으면 거리를 지각할 수도 없다. 거리를 지각하지 못하면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것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길을 찾아갈 때는 어둠을 피해가지 말고, 어둠과 함께 어둠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의 순수함을 능가할 수 없다. 이런 깨달음은 울를 겸허하게 만든다.
깊은 들음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서 어떤 순간이든 드러난 것을 몸과 존재,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수전 맥헨리
깊이 들으려면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을 내려놓아야 한다. 건전한 들음을 위해서는 먼저 추측부터 지워버려야 한다. 사실 자신의 완고한 확신을 넘어 조금이라도 바깥세상을 보려면, 준비해 두었던 모든 결론들을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속으로 상대의 말을 자르거나, 세상의 반박이나 변론에 맞서기 위해서 내 견해의 저장고를 뒤지지 않도록 마음을 닦아야 한다.
들음은 반응이나 반작용이 아니라, 연못이 작은 물줄기들로 채워지듯 열린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들음의 깊이는 듣는 수단에 따라 달라진다. 머리로 들으면 삶을 더욱 많이 이해하게 되지만, 마음으로 들으면 삶을 더욱 많이 느낀다. 온 존재와 영혼으로 들으면 스스로 변화해서 삶 자체와 어우러진다. 삶은 순간들 속에서 언제나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들을 마주하고 귀 기울이는 방식에 따라 변화의 길이 다르게 펼쳐진다.
너무 여러 가지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강을 품고 있던 흙무더기가 강물에 씻겨 자유로워지듯, 잃음은 떠남이자 내려놓음이기도 하다. 이렇게 경험의 강물은 삶의 작은 그릇을 문질러 닦아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이나 일이 명확하지 않을 때, 전후좌우 위와 아래, 옳고 그름이 애매할 때 불편해한다. 그러나 깊은 진실이 다가오는 데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할 일은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름의 긴장을 견뎌내는 것과 관련 있으며, 삶에서 마주치는 것들을 성급하게 명명하거나 정의 내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은 아주 중요하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진실에 다가가려면 개인적인 견해나 믿음을 섣부르게 갖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전체성이 우리를 에워싸고 역설적인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시간을 넉넉히 둘 줄도 알아야 한다.
만나는 모든 것들에 공감하면 우리 스스로 더욱 많이 성장할 수 있다. 다른 존재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을 연습하는 짓은 그만두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실천하기 어렵고,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경험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모든 것을 준비한다. 생존에는 매우 도움이 되지만 이런 준비에 너무 치중하면 어떤 새로운 것도 접촉하지 못한다. 언제나 다가올 일들을 예측하다 보면 미리 준비한 반응에 의존하고 만다. 예측이 지나치면 맞기도 전에 "아야"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면 결국 신선한 충격을 경험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지나친 경계로 인해 마음의 그물망과 정신의 골키퍼가 생겨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가오던 모든 것들이 방향을 바꿔버린다.
사실 살아 있음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본래 색깔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까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 머물러 우리의 영혼을 생기 있게 만들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계절의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절이다. 행복이든 고통에 시달리든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폭풍우를 물리치고 모든 것을 관통하여 흐르는 음악을 듣는다. 경험은 호된 스승과 같다. 생명력의 예기치 못한 재발견 속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이 생명력은 우리의 재능과 장애물 사이의 마찰에서 생겨난다. 깊은 들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적인 나약함을 인정할수록 삶의 모든 요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된다. 이런 대화는 피어남으로 어둠을 풀고, 사랑으로 외로움을 푸는 경외의 작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경험으로 인해 삶의 그물망 속에 계속 엉켜들어도, 모든 것과의 관계를 풀고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작업에는 언제나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분리와 통합을 경험한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것이 불러오는 상황도 인정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언제나 진심을 다해야 한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들어주는 것이다. - 폴 틸리히
배려가 친밀감을 낳는다는 것은 삶의 이치다. 타인을 도우면 모든 것의 가슴에 닿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런 부는 오로지 커지기만 한다. 물론 우리가 도움을 준 이들이 떠나거나 죽어버릴 수도 있다. 혹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해서 타인들의 사랑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친절이 낳은 친밀감은 몸속에서 빛으로 변해, 결국엔 우리 마음의 등불이 된다.
현대의 문화는 우리에게 완벽하고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통도 없고 상실로부터도 자유로운 삶을 고집스럽게 신성시하면, 결국은 주어진 고통과 상실에 난타당하고 삶의 목적도 잃어버리기 쉽다. 아무리 원해도 언제나 확장된 상태로 숨을 들이쉬기만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행복할 수도 없다. 확장과 수축, 들숨과 날숨을 모두 경험해야 살 수 있다. 마음, 정신, 영혼도 모든 경험에 열리고 닫혀봐야, 경험이 우리를 관통할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고통, 상실, 장애물은 우리를 열었다 닫아주는 역동적인 삶의 힘이다. 이것들과의 평생에 걸친 대화를 이해하고 못하고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고통이나 상실을 불러들일 필요는 분명히 없다. 하지만 어떤 날씨든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몫의 고통이나 상실도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통이나 상실을 신성시할 필요도 없다. 고통과 경이감의 교차 속에서 경험의 풍파를 통해 자신을 다듬어가는 과정이 바로 삶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도 이 여정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고통과 상실, 장애물, 사랑과 경이감, 진실과의 평생에 걸친 대화를 통해 확장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살아 있음의 본질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경험을 받아들이면 종종 그 기저에서 비옥하고 촉촉한 대지 같은 모든 이들의 경험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느껴가는 일은 쉼 없는 들음과 같으며, 이런 들음은 서로의 살아 있음을 표현하게 만드는 힘들고도 장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불평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준 답의 의미는 그저 사는 것 외에 삶을 위한 학습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꿈과 계획, 전략들은 우리가 이미 몸담고 있는 찬란한 실재에 일는 우회로일 뿐이다. 지금까지 길을 가는 동안 이미 듣거나 듣지 못한 말,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주의를 기울였을 때 시간이 속도를 늦추는 방식, 자연 속에서 나래를 펴는 침묵, 우리 영혼의 소명과 경험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체성 등을 듣는 여러 가지 들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각각의 들음은 기술이라기보다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능력에 가깝다.
고요한 스승과 같은 들음은 우리가 과장하거나 소란을 부리면 뒤로 물러나버린다. 개개의 들음마다 용기의 또 다른 측면을 적용해야 한다. 깊이 들을 때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우리의 경계를 버리고 매 순간을 진실로 살아내리라 다짐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인들도 세상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세상이 그들을 움직이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면, 타인들도 많이 고통받았지만 어떤 이들은 점점 어두워진 반면 어떤 이들은 축복 속으로 들어갔음을 안다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수많은 이들이 가장 사적인 절망의 순간 신에게 큰 소리라 간청했음을 안다면, 침묵과 물속의 지혜가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음을 안다면, 사랑이라는 불꽃이 딱딱한 남자는 부드럽게 만들고 단호한 여자는 더 생각해보게 만듦을 안다면, 봄이 아무리 찬란해도 사랑을 주지 않으면 꽃들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별 하나의 긴 호흡이 오랜 세월 무수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안다면, 한 조각의 꿈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는지를 안다면, 물질적인 힘에 압도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안다면, 도움이 될 것들이 몰려와도 오해를 하면 기회를 그냥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음을 안다면, 그런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공통적인 것인지를 안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안다면,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사람이 두 눈을 감듯 우리가 알던 것들을 버리고 그저 살아내야 한다. 누구도 아직 살아낸 적이 없는 삶을 살 듯.
더욱 많이 보면 지혜가 확장되고 깊어지며, 더욱 많이 느끼면 연민의 마음이 확장되고 깊어진다. - 프라사드 카이파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삶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면 자신이 냇물 속의 작은 물고기임을 깨닫고 흐름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의 고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이 심오한 기회를 잡는다고, 일이 생각대로 되어가지 않을 때 실망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지와 다르게 전개되는 삶에 분노와 화를 간직하고 있으면, 불가해한 전체 속에서 겸허하게 한 부분을 차지하는 축복을 놓치게 된다. 양심적으로 투자했는데도 주식 시장에서 돈을 벌지 못하거나 물려받기로 한 트럭이 허리케인으로 망가지거나, 우리 대신 다른 사람이 승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똑같이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계속 화와 분노에 젖어 있으면 고착되고 만다.
고요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을 창조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우리와 함께하면서 편안히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반김과 보살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의 핵심은 충분함을 아는 데 있다. 1평방인치의 가슴속에 행복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 행복감으로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전부 채울 수 있다. - 겐세이
양자 물리학의 한 가지 가르침은 안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모든 것이 단단하거나 분리되어 있는 대신 유동적으로 통합되어 있고 입자가 아닌 파동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심리적, 영적인 단위도 마찬가지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충분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정체성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모든 것을 결합시키는 생명의 파동임을 알게 된다. 모든 생명력의 근원인 자연과 영혼의 본질적인 파동이 모두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통일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지만, 이것을 느끼면 생명과의 유대감 속에서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식물이 빛을 받아들여 당을 만들어내듯 인간은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상의 생명체들 중에서 이런 내적인 감수성을 지닌 존재는 없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역동적으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생명을 받아들여 생명이 우리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삼라만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에 가슴으로 힘을 얻을 때는 경험 자체를 느낀다. 물론 둘 다 가치가 있다. 정신으로 이해하면 경험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가슴으로 느끼면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충만한 삶이 보답으로 주어진다. 그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해는 지각이라는 개념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언제나 변화하는 생명 전체와 더욱 밀접하게 조화를 이루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나 어떤 물건을 이해했다고 할 경우, 이런 이해는 흔히 거짓된 위안을 안겨주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를 제한한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붙잡기 어려운 것이어도 살아 있는 것에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맡기면, 이해는 우리가 가꿔나가야 할 관계가 된다. 우리를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세계와 가슴 사이의 춤이 된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것들도 가까이서 보면 모두가 또 다른 완전한 세계다. 그 세계에 들어가보면, 이 본질적인 세계에 우리도 속해 있음을 발견한다.
통증과 두려움은 때로 도움이 될 모든 것들을 구름처럼 가려버린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몸과 환경, 심지어는 우리의 삶을 떠나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야만 극복해낼 수 있다. 두려워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고, 혼란스러운 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혼란을 풀어버릴 수 없다.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보내게 하는 것은 고요의 지점이다. 그리고 삶은 이 고요의 지점에서부터 펼쳐진다. 들숨과 날숨처럼 견딤과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둘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둘이 함께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들고 삶의 정점으로 인도해주는 능력들을 익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작업이다. 둘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엮어 삶의 본질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겨 준다. 외적으로는 견딤endure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endear이 우리가 할 일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 살다 보면 둘 사이의 경계선은 불분명하게 없어진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분명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삶에는 폭풍우와 고요한 상태가 모두 존재하며, 폭풍우를 건너뛰지 않고 고요한 상태로 폭풍우를 견뎌내는 것이 삶의 과제다. 그리고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은 폭풍우 속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진정한 자리는 바로 중심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풍우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리 힘들게 느껴져도 폭풍우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희망은 확실히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희망은 무언가 결국 잘되리라는 신념이 아니라, 어떻게 되든 결국에는 의미가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를 때 진정한 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모를 때 진정한 여행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혼란을 겪어보지 않은 마음은 할 일이 없다. 흐름에 방해를 받아본 냇물만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 - 웬델 베리
삶의 속도를 늦춰야만 시간도 느리게 흘러간다. 다급함, 걱정, 두려움, 후회 등 모든 것을 비워야만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연못이 우리를 반겨준다. 모든 것을 겪고 나면 정직하게 표현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런 삶은 언제나 들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때 들음은 중요한 것을 기억하고 명명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다. 이런 훈련들이 우리를 언제나 진실하게 만들어준다.
100개의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아질 때까지 멈추고 비워라. 그런 상태에 이르면 집착도 부정도 사라질지니. - 도겐
지혜의 핵심은 아마도 들음이 열어주는 공간과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는데 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깨어남과 사랑과 청소는 모두 영원히 계속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계속 만들어내는 온갖 소음들과 산만함들을 청소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넘어서, 자신의 걱정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넘어서 깊이 들을 때 비로소 마음속에서 이방인이 사라진다고 확신한다. 진실로 들으면 사랑의 빗질 속에서 서서히 서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헌신할 때마다 이 세상에서 삶의 소중한 시간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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