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를 철학으로 이해하기.
매트릭스는 프로그램화 된 세계다. 어디선가 본 사회생활은 학자금 대출로 시작해 자동차 할부, 주택 모기지로 이어지는 '할부'라는 프로그램에 종속된 삶이란 표현이 갑자기 떠오른다.


[본문발췌]


운명이란 현재의 눈길이 과거의 순간들에 던지는 소환장이다. 운명을 부정한 것은 운명이란 현재가 과거에 던지는 '회고적=추후적 눈길'(베르그송)일 뿐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받아들일 때 삶의 매 순간은 나의 시간들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미래를 바꾼다. 맞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한 것이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길을 찾도록 도울 뿐이다. 그것이 바로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이다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선택, 그것이 우리 삶의 대부분의 상황이다. 우리는 삶의 표면에서 살아간다. 삶의 심층은 우리 인식의 빛 저편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심층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며 현재 자신의 감정, 기분, 느낌에 근거해 행위해야 한다. 아직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으며 이미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 규칙성의 오류 = 자유의 투쟁
오류=자유=저항의 존재는 '프로그램'을 위협한다. 그래서 오라클은 미래가 열린 미래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내 관심사는 하나야. 미래. 미래는 모두가 함께 열어가야 해." 완벽한 결정론으로부터의 일탈, 그것은 존재론적 분기를 통해 나타난다. 베르그송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결정론의 세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곳에는 선택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지도리가 존재하는 세계, 분기점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논리적으로 여럿인 갈래들 중에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갈래만이 선택되어야 한다. 그 선택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필연인가, 주체들이 의지인가? 주체들은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물을 열어야 한다.


"변함없는 보편적인 것은 딱 하나. 그것만이 진리지. 바로 인과법칙 말이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목적론 vs 인과론, 인과는 보이지 않는 심층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목적은 주체의 상황에 따라 미래에서부터 현재에로 작용하는 힘이다. 서로 대조적이지만, 목적도 인과도 우리를 지배하는 외적인 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점심을 걸러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어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고시를 준비한다. '때문에'는 과거로부터, '위해서'는 미래로부터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시간과 우연, 새로움의 창조. 베르그송적 주제
"모든 것은 선택이야. 그러나 선택은 예정되어 있지." 표면에서의 선택은 사실상 심층에서의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희망은 소용없다.
"인간은 늘 희망에 기만당하지. 희망은 인간의 강점이자 약점이야." 기계는 법칙성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은 희망에 따라 움직인다.


전통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벤야민에 따르면, 그것은 에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존재 근거와 존재 한계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원본성과 유일성 그리고 다시는 복제될 수 없는 일회성에서 아우라가 생긴다는 것이다.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 더 나아가 사물의 권위를 형성한다.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삶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받영하고 있다. 토마스 앤더슨이 매트릭스 안에서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미래가 보장된 직원으로 살지만 실제의 현실에서는 단지 건전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캡슐에 갇힌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삶을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시계 바늘에 쫓기며 몸을 움직이고, 수많은 기계 사이에서 이리저리 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욱이 매트릭스 안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요원일 수 있는 것처럼, 이 현실 세계는 온갖 감시와 통제로 가득하다. "매트릭스는 바로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려온 세계라네."


삶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가 중요하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어가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이나 진실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이것은 사실이고, 저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시각으로 인하여 전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의 눈으로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를 보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은 두 눈에 비치는 단편적인 세계를 전체 세계처럼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사랑이다. 세계 안에 있는 자가 세계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그러한 세계를 보는 것은 따라서 이 세계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그러한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안에 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품는다는 것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질시를 관용과 화해로 용납한다는 것이며, 결국 이것은 전 세계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란 모든 것들을 품고 용납하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보인다는 것이다. 진실을 마주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부터의 탈출은 타인을 용납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며, 결국 사랑을 품을 때에야 가능하다. 나는 오늘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가장 소박한 모습인 욕구는 인간의 삶을 추동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이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런데 욕망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할 때 쾌락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충족보다 더 큰 쾌락을 만들어냄으로써 금방 결핍의 상태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흔희 좋은 차나 좋은 배우자를 갖기를 꿈꾼다. 하지만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는 순간 성취감의 쾌락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욕망하게 하는 새로운 결핍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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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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