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시간, 진화의 시간, 역사의 시간, 사람의 시간.....
현재를 사는 사람의 시간 선상에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본문발췌]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과 언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직후 <로로르>는 '1894년 재판의 법률 위반과 에스테라지 의혹에 항의하며 재심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항의문과 수백 명의 지지서명을 실었다.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를 비롯해 작가, 예술가, 건축가,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도 있었지만 서명자 가운데 대다수는 이름에 학위를 병기한 교수와 대학생들이었다. 클레망소는 그들을 가리켜 '한 가지 이념을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지식인들'이라 했다.

 

어떤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하게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보통은 고등교육을 받고 학위를 취득해 연구, 교육, 창작, 정보유통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며 말과 글로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 때 재심 요구파에만 지식인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한때 수십만 회원을 이끌고 재심 반대운동을 펼친 '프랑스조국연맹'의 지도자는 작가 모리스 바레스였으며 시인, 문예비평가, 규소, 대학생, 교사, 예술가들이 그 연맹의 중심을 이뤘다.

 

지식인 집단은 민주주의와 과학혁명의 산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대학은 귀족가문 청년들의 놀이터에서 학문 연구와 고등교육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럽 전역의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전통적 인문학이 다양한 갈래를 이루며 발전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국가와 민중 사이에 시민사회를 형성했다. 정치인과 정당이 선거에 이기려면 시민사회의 다수 의견이나 여론을 존중해야 했다. 지식인이 말과 글로 여론을 움직여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프랑스만 그랬던 게 아니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는 물론이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국 같은 전제국가에서도 지식인들이 정당을 결성하고 대중을 움직여 혁명을 일으켰다.

 

 

언론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4부'가 됐다. 언론사는 개인기업 또는 주식회사 형태의 사기업이지만 정보를 유통하는 공적 기능을 담당했다. 정보 유통에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지식인은 언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중과 접촉하기가 어려웠다. 정보유통망을 장악한 신문, 잡지, 방송 종사자도 지식인 집단의 일원이 됐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봤듯이,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언론이 크게 꾸준히 보도하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됐다. 지식인과 신문, 잡지, 방송의 시대는 컴퓨터를 활용한 네트워크혁명이 일어난 20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20세기 특유의 현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여 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랑케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특성과 결함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인간의 '필요(need)'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demand)'에 응답한다. 아무리 절박해도 가난한 사람의 요구는 경청하지 않으며, 돈을 가진 고객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준다. 무일푼의 실업자는 아이를 먹일 감자를 구할 수 없었지만 부자가 반려견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극단적인 전체주의와 전통적인 제국주의를 내포한 나치즘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파국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 사이에 깊은 골을 팠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평등한 정치 시스템이고 자본주의는 '1원 1표'의 불평등한 경제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게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에 발언권을 준다. 둘은 화합하기도 하고 서로 배척하기도 한다.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이 자리를 잡고 있던 미국과 영국 등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지키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정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로 치달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이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당의 이탈리아, 천황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삼는 공화정이 문명의 대세가 됐다. 추축국이 승리했다면 나치즘과 같은 '모든 악의 연대'가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인류 문명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상적인 사회, 정규적인 노동, 삶의 안전,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확실성 같은 것이었다. 친위대와 적극 동조자들은 전쟁과 학살 행위에 앞장섰지만, 평범한 독일인은 게슈타포가 모든 것을 감시하고 시민들이 서로를 밀고하는 공동체에 최소한으로 참여하면서 사적 공간으로 도피했다. 사회적 관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사회적 행위 능력을 잃고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기만 기다리는 무감각한 인간이 됐다. 이것이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이었다. 이렇게 보면 적극적인 나치 동자자가 아니었던 사람에게는 큰 책임을 묻기 어렵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봤다. 특별한 동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이 전적으로 결여된 탓에 악을 행했으며, 자기가 저지르는 악을 악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고 했다.
 
 
"자유는 자신의 종교를 따를 수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선택할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헛되이 죽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미국답기를 바란다." - 무하마드 알리
 
 
"백인이 우리더러 흑인지상주의를 가르친다고 비난한다 해서 자신들이 저질러온 백인지상주의 범죄를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흑인의 정신과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향상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죄 많은 백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노예였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하는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것과 가다. 백인은 다른 사람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못된 뱀한테 물렸고 나 자신도 물려서 내 아이들에게 뱀을 피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친다고 비난하면 되겠는가?" - 맬컴 엑스
 
 
미합중국은 이주민의 나라였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17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대륙의 모든 곳에서 원주민을 내쫓고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았다. 19세기 중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사금이 나오는 캘리포니아로 몰려갔을 때는 원주민을 '보호구역'이라는 황무지에 가뒀고, 19세기 말에는 운디드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저항하는 원주민을 학살했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는 자본주의 탐욕과 인종주의 폭력이 난무한 야만의 시간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백인은 아프리카의 주민을 납치해서 노예로 부렸다. 1억 명 가까운 아프리카 사람이 노예 사냥꾼과 싸우다 죽거나 현지 수용소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하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노예 해상무역을 법으로 금지한 19세기 초까지 살아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천만 명 이상의 흑인 가운데 65만 명 정도가 미국에 들어갔다. 그들은 주로 목화와 담배 따위를 재배하는 남부의 농장에서 일하거나 노예소유주의 시중을 들었다.
 
 
맬컴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를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겼다.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헤르츨처럼 맬컴은 미국 사회의 흑백통합은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분리를 주장했다. "우리는 왜 통합이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임을 부인하는가? 제정신이 있는 흑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통합을 원하지 않는다. 제정신이 있는 백인도 마찬가지다. 제정신이 있는 흑인이라면 백인이 자기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통합 이상의 것을 주리라고 믿지 않는다. 미국 흑인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백인에게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맬컴이 백인 인종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폭력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맬컴은 '분리(seperation)'는 '격리(segregation)'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격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하는 것이지만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인이 백인에게 종속되어 있으면 언제나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하며 백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흑인의 생활을 규제하고 '격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래서 '흑인의 능력 향상'과 미국 내부의 '흑인공동체 형성'을 과제로 제시했다. "미국 흑인은 자기 사업과 품위 있는 가정을 세우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민족이 그런 것처럼 흑인도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방법으로 동족끼리 사고팔고 동족끼리 고용해서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추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미국 흑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 자존심이다. 다른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것을 흑인도 스스로를 위해서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흑인도 갖기 전까지는 결코 자주적이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빈민가의 흑인은 자신의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결함과 죄악을 스스로 바로잡아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높여야 한다."
 
 
20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혁명이었고 가장 중대한 '기술적 사건'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사회주의혁명은 지나갔다. 그러나 문명과 지구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지도 모를 핵무기의 위험은 21세기에도 인류와 공존한다.
 
 
'우주의 시간'에서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원자 배열상태의 일시적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적어도 태양은 영원하다. 태양도 언젠가는 '별의 죽음'을 맞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그러기 전에 끝날 테니 그렇게 말해도 된다.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나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지구는 작아지고 세계는 한마을이 됐다. 비행기, 열차, 자동차, 선박이 공간을 압축했다. 정보와 자본은 빛의 속도로 국격을 건너뛴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혔다. 어떤 중대한 사건도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경제체제의 표준이 됐다. 개인의 자유와 만인의 평등을 토대로 삼아 권력자를 선출하고 권력을 제한, 분산하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정치체제로 자리를 굳혔다. 세계는 문화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균질해졌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때로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면서 짧고 부질없는 인생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다. 20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사는 거야. 불가능은 없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이심한다. 영원한 건 없어도 지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은 있지 않나? 나는 '역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 사이에 '진화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만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꾸기 어렵다.
 
 
인류가 지적 재능을 발휘해 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성취할수록 부족본능의 파괴력은 더 커졌다.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이 세계전쟁은 그 양상을 극단까지 드러냈다. 부족본능은 '피아'를 구분해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갈라놓는다. 피아 구분의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피부색, 언어, 종교, 이념, 정치체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와 '그들'을 나눌 수만 있으면 된다. 인류는 과학혁명으로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를 수십 번 절멸할 만한 양의 핵폭탄을 비축했고, 지구 대기의 화학적 구성에 영향을 주어 기후변화를 일으켰으며, 자연에 없는 화학물질을 생산하고 배출해 토양의 해양 생태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부족본능은 그대로다. 표현형식만 달라졌다.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세상의 변화를 살피다가 마르크스를 떠올렸다. 21세기에 19세기 공산주의자라니! 생뚱맞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과학기술, 물질적 생산력, 법과 정치, 관념과 사상, 그 모든 것의 관계를 마르크스만큼 명료하게 설명한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들은 생산활동에 참여할 때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편입된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조성되며, 또 거기에 여러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만들어진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전반을 제약한다.' 자본주의체제가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오리라고 한 마르크스이 주장은 오류로 드러났다. 그러나 생산력 발전이 사회조직과 사상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라는 견해는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지금 그런 현상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과학혁명이 일으키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다른 체제로 이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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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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