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음을 알 때,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본문발췌]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 한세상 멋있게 살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은 그 멋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시 이 우주, 자연, 세상, 인간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우리의 삶 자체도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진(眞)과 성(聖)에 맞닿아 있음을 나는 믿는다. 아름다움의 체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신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회한만 남고, 앞으로 다가올 날을 바라보면 두려움만 가득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번뇌의 깊은 바다 속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듯이, 고통과 부조리의 일상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본다면 우리의 삶 또한 빛으로 가득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절학무우(絶學無憂)를 설파했다. 학문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한대,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대적하려 할 때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동양에서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서양의 전통적 학문 연구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니, 또한 되새겨 볼 일이다. 학문이란 인간을 위한 것이고, 결국 인간 문제에 귀결된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비합리적 존재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가장 극명하게 분출하는 전쟁의 역사를 보면 잘 드러난다.


"훌륭한 것들을 많이 보아라!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들을 보게 되면, 당신은 점차 훌륭한 것에 눈이 뜨일 것이다." - 미호박물관 설립자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더 이상 가져갈 수 없으니 비로소 무소유 앞에 직면한다. 모든 관계를 떠나니 무한한 고독과 대면한다. 천 길 낭떠러지에 서서 한 걸음 앞으로 내 딛는 순간에 열리는 새로운 세계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죽음도 흰 눈에 덮인 겨울의 호수 풍경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뜰을 바라보다'
아침에 일어나 방을 깨끗이 청소하니
마음 또한 정갈하다.
마당의 고요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뜰에는 목수국이 하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무성한 잎 사이로 분홍빛 해당화가 수줍어한다.
앞산의 녹음은 짙음을 향해 달려가고
뜰의 나뭇잎은 투명한 햇빛 아래 반짝인다.
뜰 안에는 새소리만 가득한데
멀리서 찌르레기 소리 가물가물하고
먼 산의 뻐꾸기 소리 아련히 들린다.
무더위 물러가고 백로가 지났으니
이제 소슬한 가을바람 소리도 곧 듣겠지.
지금까지 무수한 가을을 지내 왔건만
앞으로 나에게 맡겨진 가을은 얼마나 될까?
우주는 본시 시작도 끝도 없어
인간의 목숨을 정해 놓아으니
스스로 헤아려 볼 뿐 그에 따르리라.
다만 세상에 나 없어도
무심한 우주의 운행은 계절을 바꿔 가며
꽃을 피워 낼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슬픈 마음이 든다.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天命)을 안다고 했다. 천명이란 참으로 현학적인 개념이다.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천명(天命)을 안다는 말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풍류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멋이자 경지이며, 동양 예술정신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바람이 흐르는 곳에서 만물은 기를 얻어 소생해 움직인다. 바람은 생명이다. 동양 회화 제일의 품평 기준 또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이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사람을 만든 것도 바람이요,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바람이다. 이렇게 우주의 생명은 바람이니, 우리의 삶도 바람이요, 우리의 생명도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


이 세상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마시는 공기, 내가 먹는 음식이 '나'라는 일시적인 존재를 이루듯이, 수백 년 전의 퇴계가 나에게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었듯이, 그렇게 지난 독서의 순간순간들이 나의 영혼을 이루었고, 언젠가는 또 다시 흩어져 광대하고 영원한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스님은 가시는 길에 그렇게 힘들여 추구하던 불법의 아름다움도 아무런 집착 없이 순순히 내려놓았다.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바람을 찍고 싶다던 스님,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당신의 소회를 무든 제자들에게 답하셨다.
'삼라만산이 천진불(天眞佛)이니,
한 줄기 빛으로 담아 보려고 했다.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마라,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스님은 그렇게 가셨다. 그러나 마당에 떨어진 꽃잎, 바위 위에 낀 이끼,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산허리를 덮은 운무를 보면 그 속에 스님이 계실 것이고, 우리 모두 스님을 그리워할 것이다.


우주의 시간은 참으로 광대하고, 인간의 생명은 찰나이면서 영원하다. 지금 이 순간 애달아하는 우리의 운명도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러하니 하늘이 이승에서 나에게 남겨 준 시골집에서의 마지막 삶의 안식도, 앞으로 떠돌아야 할 길고 먼 나그네 길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인숙이 아니겠는가?


한칸집.
집주인은 한칸집이 작고 검박한 집이기를 바랐지만, 이 집이 한편으로는 무척 화려한 형식이기도 하다는 필자의 의견에 건축가는 동의했다. 한칸집에 대해 건축가는 자연의 화려함을 빋대어 그것은 생명과도 같이 화려하다고 했다. 건축은 자연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지닐 때 화려함으로 승화되는데, 그것이 인문적이고 예술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 그런 집이야말로 '삶의 무대이자 피안으로, 삶을 살되 삶을 잊게 하는 집'으로서 우리 삶을 확장시킨다.


일본 중세의 승려 요시다 겐코는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비바람 맞지 않고 한가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여기에 병의 고통을 참기 어려우므로 약을 포함하여 이 네 가지가 부족함을 가난이라 하고, 네 가지가 부족하지 않음을 부유하다고 하며, 네 가지 이외의 것을 얻으려 함을 사치라고 했다.


우리가 외부의 자극과 충격으로부터 마음을 고요하고 잠잠하게 유지할 때 본연의 맑은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천국이나 열반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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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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