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상대적이다.
인생에서도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
[본문발췌]
데미스 허사비스는 2007년 발표한 논문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상력 혹은 창의성은 기존에 없던 생각이나 개념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한결같이 여겨져 왔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 어딘가에 이것만을 관장하는 영역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그 영역은 기억이 저장되는 곳과 동일했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새로운 것도 결국 기존의 저장된 기억들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었다.
창의성은 기억에서 온다. 이 논문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의 세계 10대 과학 성과로 선정되었고, 훗날 수십만 장의 기보를 집어넣은 알파고는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우 창의적인 수를 두게 되었다.
이세돌의 가장 큰 승리는 알파고로부터 따낸 1승이 아니라, 네 번의 패배마다 홀로 복기를 시도했다는 인간성에 있다. 알파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인공지능과 대국을 해도 이세돌 9단은 복기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인류가 갖는 가장 위대한 차별점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것이 정말 있다면, 바로 시간일 것이다.
미국의 신경학자 피터 망간Peter Mangan 박사는 청년, 중년, 노년으로 세 가지 그룹을 만들어 각자 마음속으로 3분을 세게 한 뒤 실제 흘러간 시간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청년 참가자 대부분은 정확한 시간 길이를 맞혔지만, 60대 이상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더 긴 시간을 3분으로 느꼈다. 체감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입학식 때는 등굣길이 정말 멀게 느껴졌지만, 반복적으로 학교에 가보면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짧게 느껴진다. 젊을 때는 새로운 학습이나 보상 과정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쉽게 말해서 외부 자극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인데, 많은 생각들이 정신 없이 생겨나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특별한 자극도 점점 줄어들어, 예전처럼 뇌는 세상을 새롭게 느끼지 못하고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비슷하게 살아간다. 인지하는 세월은 그렇게 빨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간은 보통 일정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위스 장인의 명품 시계처럼 시간이 얼마나 정교하게 흘러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흘러가는 이 시간 위에서,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곳곳에 숨겨진 경이로움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가가 관건이다. 늘 신선한 자극을 주는 과학도 좋고, 철학이나 예술이어도 문제없다. 아니면 당장 내일 아침 출근길부터 처음 가보는 경로로 이동해 보면 어떨까? 손바닥만한 화면에 얼굴을 묻는 대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관찰해 보면, 아마 첫 출근길만큼 느껴지는 여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늘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 낯선 기억이 시냅스에 저장되는 과정에서 도파민이 대량 분비되기에, 시간은 점점 느려질 것이며 하루를 이틀처럼 보내게 될 것이다.
뇌에는 기억이 저장되는 시냅스라는 부분이 있는데, 뇌세포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연결된 길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시냅스가 복잡하게 연결될수록 기억이 단단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수녀들의 시냅스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복잡한 연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뇌를 관리해 왔다. 기억을 하나의 시냅스에만 저장하지 않고 새로운 시냅스를 계속 연결해 가며, 알츠하이머병으로 일부 연결이 끊어져도 나머지 시냅스로 마치 벤치의 후보 선수들처럼 뛰쳐나가 그 자리를 채워준 것이다.
우리 뇌는 수면 중에 불필요한 기억이 담긴 시냅스의 연결은 아예 끊어버리고, 특정 기억에 대한 시냅스는 유연하게 만들어서 기억 회로를 강화한다. 일종의 기억의 가지치기를 통해 중요한 건 살리고 버릴 건 버리는 것이다.
수명을 늘리는데 집중하느라 늘어난 수명만큼의 시간을 쉽게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최대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는 최선의 삶이 아닐까.
우리 몸의 수많은 복잡한 동작 역시, 신경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뇌의 미세한 전기신호가 온몸에 퍼져 있는 근육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 몸은 전기로 가동되는, 생명공학 기반의 생체 로봇인 셈이다. 따라서 뇌가 일할 때마다 뇌파가 발생하며, 뇌파를 측정한다는 것은 뇌 활동을 측정한다는 의미다. 뇌파를 통해 잠을 자고 있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뇌의 기능에 이상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우주에서는 거리를 시간으로 표현한다. 우리 역시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전화에, 몇 분이 남았는지 시간으로 답한다. 거리와 시간이 교차하는 상황은 우주처럼 드넓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더욱 편리하다. 우리는 더 멀리 볼수록 과거를 보며,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는 훨씬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더 먼 과거를 볼 수 있고, 최초의 별이나 은하를 연구할 수도 있으며 이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죽어가는지, 그리고 외계 생명체 탐사나 생명의 기원도 연구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가 작다면 엔트로피가 낮다고 표현하며, 반대일 경우 엔트로피가 크다고 한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모든 변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특히 우주 역시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없이 고립된 거대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기에,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항상 움직이며 한쪽으로 향하는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 역시 언젠가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질 것이며, 가장 높은 확률을 갖는 형태에 도달하고 나면 더는 변하지 않는 채로 멈출 것이다. 우주 종말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이 개념이 있다면 아마도 엔트로피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정보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어제 서울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주식이 떨어지고 있는지, 친구가 머리카락을 어떤 색으로 염색했는지, 이런 모든 게 다 정보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정보는 좀 다르다. 그들에게 정보란 모든 입자의 양자적 특성인 '양자 정보'가 보다 익숙하다. 책의 정보는 제목이나 내용이 아닌, 책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어디에 어떤 구조로 모여 있는지, 얼마나 빠른지, 어떻게 도는지와 같은 양자 정보를 의미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이러한 양자 정보를 갖는 입자들로부터 만들어진다.
크루아상과 수제비는 둘 다 밀가루로 만들지만, 어떤 조리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여기서 조리법을 정보라고 볼 수 있다. 탄소라는 입자도 나열하는 방법에 따라 연필심이 되거나 다이아몬드가 된다. 심지어 다른 입자와 섞어서 아주 복잡하게 구성하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정해진 수십가지 입자들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어떻게 나열하는지에 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 이걸 해내는 녀석이 바로 정보다. 만약 입자들 사이의 특수한 관계인 정보가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저 똑같이 떠도는 입자일 뿐이다. 우리 인류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현대물리학의 기반이 되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법칙을 만들었다. 정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의 총량은 반드시 보존된다는 것이다. 책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더라도, 원래 정보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책에 가해진 에너지를 꼼꼼히 계산하고 입자를 하나하나 모아 재구성하는 게 가능하다면, 책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정보는 절대 파괴되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책의 정보가 굉장히 해석하기 어려운 정보로 형태가 바뀐 것뿐이다.
"과학자가 자연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자연이 아름답지 않다면 연구할 가치가 없을 것이며, 자연이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삶 또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 앙리 푸엥카레
과학에서 '실패'라는 것은 때로는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에 과거를 질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인류는 짧은 과학의 역사 동안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해 왔다. 낡은 이론과 학설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난 잘못들을 실패라고만 보기에는 어폐가 있다. 과학은 쏟아져 나오는 실패들 속에서 합리적인 이론을 구축해 나가야 하며, 수정이 필요한 기존 논리들 역시 패러다임 변화의 1등 공신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과학에서의 실패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한히 접근해 가는 과정을 실패라고 한다면, 모든 실패는 또한 목적지로 오르기 위한 비상계단일 것이다. 결국 누구도 해보지 못한 시도를 하고,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 바로 과학에서의 숭고한 실패의 정의다. 과학은 실패를 위한 학문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도 끝없이 시도된 실패로부터 태어났다.
새롭게 정의된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과학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한 과학자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 누구도 자신의 접근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에서 유일한 '실패'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상태이며, 혹시라도 '실패하나 과학자들'이라고 불릴 만한 역사의 영웅들조차 새로운 통로를 열기 위해 힘차게 벽을 두드렸던 개척자들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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