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공감, 더 많이 듣기를 실천하고 의도를 단정짓지 않기, 닫힌 생각을 멀리하기... 대화에 필요한 것은 부족하고 대화중 하지 말아야 할 다수의 잘못된 내 행동을 반성한다.


[본문발췌]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대화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위로서(영어 단어 'conversation'에서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타인의 믿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본래 협업인지라, 상대방이 믿음을 제고하고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남 뿐만이 아니다. 대화는 나의 믿음을 되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화에서 가장 먼저 목표를 삼아야 할 일은 상대방의 추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 즉 맞서고, 다투고, 따지고, 비웃고,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보다는 손잡고, 힘을 합치고, 듣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협력적 사고를 하자. '이 사람은 내 적이며, 내 말을 알아듣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접고, 대신 이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은 내 대화 파트너이며, 그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가령 그가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을 서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회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아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상대의 결론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추론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교양의 척도는 수긍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옛말도 있다.


상대방의 말 듣기, 말은 줄이고 더 많이 듣는다. 듣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고, 스스로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지 전달과 진정한 대화를 구분한다. 메시지 전달은 선생이 되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다. 반면 대화는 주고받으며 서로 배우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것만 좀 알아들면 생각을 바꿀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메신저 노릇을 할 때 메신저를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메시지 전달 모드에 돌입하면, 나는 질문 중심의 '듣고 배우기' 모드로 들어가자. 질문은 엇나간 대화를 본 궤도로 슬쩍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


상대방이 왜, 어떻게 지금처럼 생각하고 믿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면 상대방에게는 물론 스스로도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는 게 아니었음을 겸허히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려면 우선 나부터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남들이 아는 건 나도 안다'는 흔한 오류. '읽지 않은 장서 효과(Unread Library Effect)', 인류의 지식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는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수중에 있으니 책에 든 정보를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연구해보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지식이 없는 상태다.

사람들에게 빌린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면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믿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참여자들에게 어떤 정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실시할 방법, 예상되는 효과 등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게 했더니,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사람도 더 온건한 견해로 선회했다. 타인의 사고에 개입할 때 이런 현상을 잘 이용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첫째, 상대방이 주로 말하도록 유도하고 나는 주로 들음으로써 상대방은 내가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된다. 둘째, 상대방이 그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의심하게 된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를 자각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 하나가 바로 '무지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는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바람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나 자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세 가지 큰 장점이 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도 있는 읽지 않은 장서 효고를 극복하는 기회가 된다. 즉, 주어진 문제에 관해 실제보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잘 모르겠네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그럼으로써 상대방에게도 모른다고 시인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상대방의 체감 지식과 실제 지식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는, 미묘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예" 또는 "아니요"로 답하는 단답형 질문보다는 상대방이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하자. 그러면 상대방을 대화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다. 인질 협상 전문가 크리스 보스는 열린 질문 중에서도 이른바 '교정 질문'을 추천한다. 교정 질문은 '어떻게'나 '무엇'이 들어가는 질문이다. "예" 나 "아니요"로 답할 수가 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대화의 '주제'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아니다(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보기에 옳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공동의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나와 도덕적 견해 다른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특히 상대가 관심을 둔 가치에 나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령 상대방의 눈에 내가 도덕적 관점에서 아군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적군에 속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야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전투적 대화를 피하자. 글로 쓴 주장은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크다. 화가 났을 때는 절대 아무것도 올리지 않는다. 이메일 답장이나 온라인 대화 참여도 하지 않는다. 누가 올린 답글에 화가 벌컥 난다면,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는 답글을 달지 않는다.

트위터에서는 절대 논쟁하지 않는다. 트위터는 글자 수 제한 탓에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수많은 사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를 집단으로 공격하는 이른바 '조리돌림' 같은 문제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페이스북에서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 과련 주제를 피한다.


탓하는 행동은 일방적이고 단정적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잘못했다!"라고 못 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제 자체가 과거형이다. 반면, 기여 요인을 밝히는 행동은 상호 간에 공동으로 진행되는 노력이다. 사태가 일어난 경위를 더 폭넓게 파악하는 게 목표다.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사고하자는 얘기다. 현 상황의 수많은 기여 요인을 이해하고 나면, 문제를 진취적으로 풀어나갈 출발점에 제대로 설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견해 차이가 벌어지는 요인 하나는 당파성이다. 우리는 우리 편 내부에서조차 당파적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보수가 진보를 탓하거나 진보가 보수를 탓하는 행위는 외부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내부 구성원들에게 우리 편의 가치관, 그리고 상대편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하는 행위다. 이로 인해 당파성은 더 커지고 진영 간의 예의는 점점 무너진다. 기여 관점으로 전환해 이 같은 폐단을 막자. 어떤 상황을 들여다봐도, 문제를 초래한 기여 체계는 알고 보면 복잡할 것이다.

우리 편의 나쁜 행동을 지적받았을 때 "그건 양쪽 다 마찬가지"라고 응수하지 않는다. 양쪽 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기여 분석에서 남 탓하기로 되돌아가는, 방어적 행동이다. 비판을 인정하기만 하고 되받아치지 말자. "맞다, 그럴 때가 있다"라고만 하자.


우리가 대화할 때 굉장히 흔히 하는 실수가 있는데, 알게 된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는지(믿음이나 결론)에 주목하기 쉬운데, 그보다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추론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상대방의 결론보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큰 이점이 있다. 사람마다 남에게 이의를 제기받으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있다. 자주 듣는 반론에 대해 늘 반복하는 주장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자기가 결론에 '어떻게'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입이 아프게 반복했던 메시지를 거두고 대화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상대방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에 도달한 추론에 질문을 제기할 때보다 상대방이 방어적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방어벽을 쌓고 입장을 더 강하게 고수할 위험이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그런 문제가 많이 사라진다. 믿음 자체보다는 인식 원리를 캐물을 때 상대방이 위협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가진 비장의 카드다. 그 카드를 활용하면 거의 실패 없이, 주제가 무엇이건 훈훈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상대방과 함께 진실을 모색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고 상대방의 사고에 개입할 방법이 없으며 예의를 지키기 쉽지 않다면,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하면 된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사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배우는 모드를 활용하면 거의 모든 대화를 '연착륙' 시킬 수 있다. 무언가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화를 좋게 끝낼 수 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대화 중에 저지르기 쉬운 기초적 실수
  •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 화내기
  • 상대의 말 끊기
  • 고의로 무례하게 굴기
  • 조롱하거나 탓하기
  • 비웃기
  • 상대방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기
  •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
  • 상대방의 발언을 최대한 인색하게 해석하기
  • 상대방이 질문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머리가 나쁘다고 공격하기
  • 실수하거나 도움, 정보, 의견을 청하는 사람을 나무라기
  • 상대방의 억측에 대한 비난
  • 믿음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신공격(예; "그런 걸 믿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 타인을 '무지하다, 무능하다, 부정적이다, 말썽꾼이다'라고 간주하기
  • 자신의 진짜 생각을 속이기
  •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하지 않기
  • 믿음의 이유보다 믿음 자체에 주목하기(즉, 인식 원리보다 결론에 주목하기. 예를 들면 "사형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뭐가 있을까?"라고 묻는 대신 "사형은 정당한 처벌이니 살인과 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 피부색이나 기타 타고난 특성을 이유로 그 사람의 생각을 깍아내리는 발언
  • 설득력 있는 근거를 새로 접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기
  • 대답을 얼버무리기(특히 상대방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 메시지 전달하기
  • 자신의 취약점을 인정하지 않기
  • 우리 편 극단주의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동
  • 상대방의 문법 실수 지적하기(짜증을 유발하는 행동이다.)
  • 상대방의 도덕적 잘못을 질책해 상대방의 논점을 이탈하거나 흐리는 행동
  • 말 끊기
  •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마무리 짓기
  • 대화를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 강압에 못 이겨 대화하기
  • 대화 중에 휴대전화 보기
  • 유명인 이름 팔기
  • 투덜대고 불평하기
  • 자랑하기
  • 대화 중단을 거부함으로써 관계 악화를 초래하는 행동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한심하면서도 위험한 징후의 하나는,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없다고 믿는 개인과 집단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 토머스 소웰(2018.7.30)


좋은 인간관계야말로 건강과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에서 이긴다고 그만큼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기틀은 자기가 옳음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 옳으려면 혼자 살라", 자기가 옳다는 걸 인정받으려고, 상대방의 행동을 고쳐주려고, 혹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고집을 피우다가 좋은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예가 많다. 그냥 친구가 잘못 알고 있게 놔두자.


'프레임(틀)을 바꾼다'는 말은 표현 방식을 바꾸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사안에 뭔가 다른 방식으로(이를테면 거부감이 덜 드는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프레임 바꾸기는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가기'가 아니다. 질문이나 쟁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또 사안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부정적 태도를 줄이고 더 솔직하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래퍼포트 규칙 지키기. 상대방의 말을 재정리하고, 동의하는 점을 밝히고, 배운 점을 언급한 다음 반박한다.
상대방의 견해를 명확하게 재정리하면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음을 알릴 수 있다. 또 '내가 동의하는 점을 조목조목 밝힌다'는 규칙을 지키면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부각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정치, 종교, 도덕 문제에서 상대방과 의견이 갈릴 때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그래야 공동의 기반을 다지고 협력의 틀을 유지할 수 있다. 또 합의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화가 막히거나 분위기가 과열될 때 합의점을 되돌아보고 라포르를 형성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에게 배운 점을 언급하는 세 번째 규칙은 상호 학습과 존중의 자세를 권하는 효과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뭔가를 얻었음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의 모방을 유도할 수 있다. 교육 분야와 교정 분야에서는 이를 '친사회적 모델링'이라고 부른다. 친사회적 행동의 본보기를 먼저 보이는 것이다. 래퍼포트 규칙은 상호 존중과 열린 자세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설령 상대방이 화답하지 않더라도, 이 규칙은 협력의 외양을 유지하고 내가 상대방의 의견을 중시함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래퍼포트 규칙에는 본보기 보이기, 듣기, 메신저 잠재우기, 배우기 등 앞서 소개했던 각종 기술과 전략이 총망라되어 있다. 남의 견해를 비판하거나 반박하기 전에 확실히 이해할 것을 요구하므로, 경솔과 부주의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도 한다. 이 규칙은 무례한 대화를 확실히 예방해주는 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다른 근거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합리적 논거를 꼼꼼히 살펴서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럼에도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데 대개 서투르다. 믿음이 틀렸음을 확인하기보다는 옳음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가졌거나 갖고 싶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쏙쏙 뽑아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성향이 있다. 또 대부분은 믿음을 먼저 형성한 다음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찾아 나서곤 한다.

도덕적, 사회적 믿음이나 정체성 차원의 믿음을 바꾸려고 할 때,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행동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음에 반하는 근거를 제시받으면 믿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는, 역화 효과가 있음을 잊지 말자. 역화 효과가 일어나면 상대방이 기존 믿음을 한층 더 고수하면서 대화가 교착되고, 결국 노력은 헛수고가 되기 쉽다. 역화 효과를 유발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사실'이다. 근거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한' 사람이 되련느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변 사람에게서 받는 영향에 믿음의 내용이 훨씬 크게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가 쓰인 문장은 상대방의 견해를 반발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 점이 바로 '그래, 그리고' 기법의 핵심이자 강점이다. "그래, 하지만..."이라고 하면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의 제기처럼 들린다. 마치 '네 논리를 한번 방어해보라'는 주문이 되어버린다. 반면 "그래, 그리고..."라고 하면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권유가 된다. 그렇게 하면 생산적 대화의 길이 활짝 열린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 심리학자 폴 에크머
분노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순환하며 증폭되기 쉽다. 그래서 대화 참여자 중 한 명이라도 화를 내면 상황은 대부분 악화한다.
  • 화는 답답함 아니면 불쾌함에서 기인할 대가 많다. 답답함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가로막혀서 화가 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거나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게(혹은 조금이라도 신경쓰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될 때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신경을 건드리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가 폭발한다. 답답함이나 불쾌함이 고의로 초래되었다 싶으면 더 화가 나기 쉽다. 그러니 더욱, 상대방의 의도가 선하다고 간주하는 원칙을 잊지 않도록 하자. 대화 분위기가 격앙될 때는 기억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분노는 뭔가를 바꿔야 하는 신호다. 제대로 바꾸려면 분노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분노가 일었을 때, 우리는 대화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쟁점을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바뀌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설령 화난 사람이 상대방이라 해도 그렇다. 완전히 틀린 사람이 내가 아닌 상대방이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분이 상한 이유는 예컨대 내가 너무 세게 밀어붙였거나 혹은 예민한 표현을 써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나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대화에 화가 스며들었다면 이미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 화는 판단력을 흐리고 대화를 엇나가게 한다. 화는 우리를 신경계의 노예로 만든다. 모든 감정, 특히 화는 지식과 믿음과 정보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화가 나면 예의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 화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화는 화가 정당함을 확인하려는 인지 편향을 강하게 일으킨다. 그래서 꼭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는 온갖 정보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특히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품었거나 부도덕하다고 간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고 있다!"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 화를 비롯한 모든 감정에는 이른바 '불응기'가 뒤따른다. 불응기에는 신경계의 작용과 일시적 감정 편향으로 인해 정보처리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불응기는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불응기는 감정이 강할수록 오래가며,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이나 몇 시간까지 갈 수 있다.



상황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꼭 익힐 필요가 있다. 타인의 생각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관점이 가진 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믿는 감정의 세기를 느껴야 한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
  • 입을 꾹 다문다. 상대방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는다.
  • 소셜미디어는 피한다. 화났거나 불쾌한 상태에서는 '절대' 이메일이나 소셜미디어 댓글에 답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자. 흥분을 가라앉히자.
  • 듣고 또 듣는다. 대화 분위기가 팽팽해지면 일단 듣는다. 다 들었으면 또 듣는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한다. 그리고 또 듣는다. 그런 다음 내 말을 한다.
  • 팽팽한 긴장감을 부인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긴장감과 압박감, 불안감 등 부정적 감정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답답함은 부인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 '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심기가 불편한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고 표현하면 상대방은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대신 '답답함'이라는 말을 쓰고 대화가 답답하다는 점을 인정하자.
  • 속도를 늦춘다. 대화의 진행 속도를 늦추면 긴장도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
  • 화를 화로 받지 않는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똑같이 맞대응하며 화를 터트리지 않는다. 특히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절대 되받아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면 모욕으로 응수하지 않는다. 그러면 상황은 악화할 뿐임을 기억한다.
  • 탓하지 않는다. 특히 격론 중에 상대방을 뭐라고 판단하거나, 악화된 상황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난 잘 얘기해보자는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대화가 딴 길로 빠진 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행동이며, 퇴로를 만들어주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 상대방의 의도나 동기 또는 화난 원인을 나쁜 쪽으로 짐작하지 않는다.
  • 안전에 위험을 느끼면 대화를 굳이 이어가지 않는다.  필요하면 구실을 내세워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한다.
  • 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긴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대화를 중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단 몇 분만 지나도 불응기가 지나가고 감정이 가라앉아 더 생산적이고 예의 있게 대화에 임할 수 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화제를 바꾸거나, 대화의 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선의를 간주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뭔가 도움을 주려고 저러는 거야'라는 독백을 마음속으로 되뇌면 진정이 될 수도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여,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봐도 좋다. 아니면 위의 모든 방법을 결합해 내가 왜 화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사과한다. 내가 상대방의 분노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도덕적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는 항상 정체성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도덕과 정체성의 문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 소리없이 판단이 이루어진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사람의 뇌는 자신의 도덕이나 정체성에 관한 믿음에 이의를 제기 받으면 신체적 위험에 처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타인의 도덕과 정체성에 관여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도덕적 견해가 엇갈리는 사람들 간의 차이점을 확실히 이해해본다. 상대방이 쓰는 도덕적 언어를 씀으로써 가능하면 같은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도록 한다.


도덕적 대화를 풀어나가기 대단히 어려운 이유는, 도덕적 믿음이란 개인적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집단에 얼마나 긴밀히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소속된 공동체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주고 있다면, 도덕적 영역에서 대화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무식보다 부끄러운 것은 배울 마음이 없는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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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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