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변동성, 새로운 모험.... 삶의 원동력이 된다.
[본문발췌]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술탄에게 죽임을 당한 숫처녀들은 술탄의 이야기 안에 있었다. 세에라자드는 노동자들의 영웅처럼, 생산수단인 통제권을 쟁취한 다음,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길을 열었다.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문제 상황은 무언가 되어 가는 여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인 듯하다. 온갖 마법과 유리로 만든 산, 집채만 한 진주, 한낮처럼 아름다운 마녀, 말하는 새, 시 뱀이 되어 버린 왕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선택 사항이다.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오로지 거울 자신만 빼고. 거울이 되는 일은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에 나오는 에코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은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산속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자신의 반영에만 빠진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 작은 모험 이후로, 내게는 줄곧 나를 든든하게 지지해 준 좌우명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가 생겼고, 그때까지 본능적으로 물리쳤던 초대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 읽었던 마르키 드 사드의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 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시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 살덩이든 저 살덩이든, 오늘은 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내일이면 1000마리의 곤충으로 변해 버릴 것을?” 사드에게 중요했던 이 질문 혹은 탄식은 일반적으로 분해라고 상상하는 어떤 과정이 또한 변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썩어 가는 것도 다른 생명으로 변신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무언가가 되어 가면서 동시에 무언가가 사라지는 격렬한 과정의 일부이다. 그것은 잔인하고, 죽음이며 또한 삶이다. 살아 있는 것은 거의 모두 다른 생명의 죽음 덕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퇴화이면서 재생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궁은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고대 그리스어 ‘시그노미(sungnome)’라는 단어가 있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생각과 느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해가 용서 혹은 대상 자체의 줄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 단어의 범위는 이해를 위해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에 이르기 위해 이해가 필요하며, 감정이입은 또한 용서임을,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 도우며,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어에서는 ‘이해하다(understanding)’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면,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종종 이해를 먼저 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변명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용서’라는 말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용서란 대부분의 경우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 자신에게 주는 것이니까. 당신은 오래된 괴로움이라는 추한 짐을 내려놓고, 끔찍한 것과 이어져 있던 끈을 풀어 버리고, 거기서 멀어진다. 용서란 공적인 행동, 혹은 두 당사자 사이의 화해이지만, 용서가 마음속에서 벌어질 때 그 과정은 좀 더 불명확하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무언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마치 어떤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넘어선 것만 같다. 그러다 그 무언가는 그것에서 벗어난 당신 스스로를 축하하려는 바로 그 순간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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